43화.
“그게 무슨…….”
“제가 보기에 그저 한량 같았던 리한을 신격화시키는 부대 분위기도 그렇고, 전시 상황에서 저한테 주어지는 이 수많은 혜택도 그렇고. 제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리한은 혁명군에 합류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곤란합니다.”
“너무 궁금한데, 리한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제가 협상할 만한 대단한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나마 뭔가 가치가 있는 것 같은 제 몸뚱이 하나를 걸어야죠.”
“유진 양.”
사브르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한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군인은 군인인지, 순식간에 변하는 분위기에 유진은 살짝 주눅이 들었다.
“당신이 대단한 무기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군요.”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작은 여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위압적으로 말했다. 유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
“당신을 인질 삼아 리한 장군님을 끝까지 붙잡아 둘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베푸는 건 우리 쪽이니까요. 당신의 팔을 하나 자르고, 나머지 한쪽 팔을 자르기 전에 그에게 황제의 목을 가져오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의 개죽음은 우리도 바라지 않으니 요구하지 않지만.”
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치 있는 존재로 대해 줄 때 가만히 있으시죠. 아메탄 왕국에 얌전히 보내 주는 것은 우리 결정이지, 당신들의 권리는 아니니까.”
물론 유진은 누군가 자신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할 때,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었고 맞으면 맞았지 가만히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브르의 말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 * *
행정국의 유진이 앉는 자리에 생성된 문서 때문에, 악단이 조기 출발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브가 아메니티에 홀로 살아 돌아왔을 때, 산하기관과 왕궁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스타람의 지원군과 합류한 반란군은 거세게 진격했고 여기저기서 국지전이 벌어졌으며 그 와중에 악단과 호위 병사들은 크게 다쳤고, 간신히 도망쳤으나 도적 떼를 만나 이브 혼자만 살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수사국에 진술을 모두 하고 지친 몸을 이끌며 퇴근할 때, 수사국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그녀를 붙들었다. 호화로운 차림새와 말끔한 생김새와 대조적으로 그의 눈에는 광기마저 돌았다.
“유진, 유진 유니트는?”
“…….”
“유진도 죽었어? 어떻게 됐어? 리한 카드민은? 그 자식은?”
“……모릅니다.”
이브는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제가 리한의 암살을 실패했기 때문에, 유진과 리한은 둘이 따로 움직였습니다. 유진이 외교국의 징표가 있다며 괜찮다고 했는데…… 게다가 리한 역시 직접 보니 체술이 뛰어났거든요.”
“그렇다고 전쟁터에, 너희는 호위병까지 데려가면서 달랑 둘만 보내?”
“담당자는 유진 유니트입니다.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반말 쓰지 마시죠.”
이브가 금발 머리를 넘기며 짜증을 냈다. 물론 이브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전쟁터에 둘이 움직인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속으로는 유진과 리한이 함께 죽는 것도 나쁜 결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리한이 위험하다는 판단은 진작 내렸고, 유진에게 충분히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살아 돌아오면 그저 돌아오는 것이고, 중간에 전쟁통에 휘말려 죽으면 유진이 아깝기는 하나 리한이라는 위험 요소를 제거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아 하니 리한 카드민은 반란군에 합류했다더군요. 바로 장군 칭호를 주고 군대를 맡긴 것을 보니 계획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진 유니트의 생사는 모르겠습니다.”
이브는 저벅저벅 발소리를 울리며 멀어졌고, 노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 * *
유진은 꼬박꼬박 약도 잘 먹었고, 두팜과 함께 가벼운 운동도 했으며, 입맛이 없어도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두팜이 잘 알려 줘서 말도 서툴지만 홀로 탈 수 있는 요령을 익혔다. 물론 이동할 때에는 두팜과 함께 말을 타야 했지만, 자세가 익숙해지자 처음에 말을 탈 때처럼 피로하지 않았다.
그 이후 사브르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녀의 혈색은 예전처럼 돌아왔고, 어지럼증이 가끔 생기긴 했지만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밤에는 리한이 쓴 ‘나의 공화주의’를 읽었고, 낮에는 이틀을 꼬박 달려 이미 리한의 군대가 점령해 놓은 히코르트 협곡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동하시느라 불편하셨죠? 끼니도 부실하고…….”
두팜이 그녀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내려 주며 싱글벙글 웃었다.
“여기는 잠자리도 좀 편하실 거예요.”
“아냐. 진짜 별로 안 불편했는데.”
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내 고향은 바닷가라서 파도가 높게 치면 짐 싸서 산기슭으로 도망가는 게 일이었어. 해풍이 지나고 나면 바닷물 짠내가 배어 있는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그 때에 비해선 훨씬 편해.”
“저는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엄청 예쁜데, 엄청 무섭기도 하고…… 보면 시원한데, 또 가슴 깊숙이 두렵기도 해.”
“물이 엄청나게 많은 거라면서요. 끝도 없이 물이 펼쳐져 있다고 그러던데.”
그녀는 두팜과 대화를 나누며 후발대 병사들과 섞여 협곡의 길을 걷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위로 들었다. 두팜이 따라서 위를 쳐다보다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리, 리한 카드민 장군님이세요! 우리를 보나 봐요!”
두팜은 신나서 고개를 숙였다. 유진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리한은 처음 보는 갑옷을 입고, 검은 말에 올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유진이 이곳에서 자주 보게 된 총이라는 무기도 익숙하게 옆구리에 차고 있었다. 그의 뒤에 가득한 군인들을 보며 그녀는 이상하게 렌토의 공연이 생각났다.
그녀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고, 리한은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하더라도 그에게 닿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평생을 평범하게 살 예정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르자, 리한은 광활한 제국령에서 수많은 군대의 앞에 선 사람이 되었고, 그녀는 약소국의 말단 행정 직원에 불과한 사람이 되었다.
‘되게 이상한 시기였구나.’
유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내가 리한의 숙식을 해결해 주고……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신변을 보호하겠다고 했던 그 시간들…… 그거, 되게 이상한 시기였구나.’
바람에 유진의 곧게 뻗은 은발 머리가 날렸다. 리한은 그녀가 어린 소년병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유진이 많이 나은 모습을 보자 안심이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보고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 거슬렸다.
마지막에 ‘이제 서로 제자리에 돌아가자’라고 한 것은 자신인데, 자신과 떨어지고 나서도 멀쩡해 보이는 유진의 모습에 왜 자신이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의 성격상 자신을 보고 눈물바람으로 달려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저렇게 또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보고 난 뒤에도 침묵을 유지하며 무심히 사라지자,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친 후에도 일관적으로 무표정이었으며 심지어 표정에 공허감까지 감돌았던 것이다.
정찰병들의 보고를 무뚝뚝한 표정으로 들으면서, 그의 시선 끝에 걸려 있던 유진이 사라지는 것을 본 그의 심장이 아프게 죄어들었다.
* * *
한 번 낫기 시작한 유진의 몸은 빠르게 회복했다. 그녀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나의 공화주의’를 읽거나 두팜과 장난을 치며 평화롭게 보냈다. 얼마 전에 자원입대하여 아직 한 번도 전투를 겪어 본 적이 없다는 두팜은 유진의 눈에 철없는 소년 같아서 함께 대화하는 재미가 있었다.
“성년이 넘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됐다고요?”
유진을 산책시키면서, 두팜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키가 못 컸어요?”
“내가 무서운 얘기 하나 해 줄까.”
유진은 표정 변화 없이 팔짱을 끼고 대꾸했다.
“이거, 내 열다섯 살 때의 키야. 네 키도 그대로 멈출 수 있어.”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두팜이 호들갑을 피면서 자신의 퉁퉁한 배를 한 번 쳤다.
“살이 키로 갈 거란 말이에요!”
“누가 그래?”
유진은 사회성이 좋지 않아 다른 병사들과는 딱히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다른 병사들도 유진을 리한을 보좌했던 여자이지만 곧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큰 관심이 없었다. 리한은 그녀가 성에 오고 나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고, 그녀도 딱히 찾지 않았다.
“열심히 훈련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
“훈련은 열심히 해?”
“당연하죠. 소년병 훈련은 리한 장군님이 직접 하시거든요. 한 번도 전투에 참가해 본 적 없는 애들이 딱 개죽음당하기 좋다면서……. 얼마나 멋있는데요. 웃으면서 설명하시는데, 근데…… 그게 이상하게 좀 무섭긴 해요. 정말 이상하게 스산한 느낌이 들거든요. 웃으면 마음이 놓여야 하는데, 오히려 더 긴장된다니까요.”
“일찍 죽지는 않겠구나. 눈치는 좀 있네.”
유진은 피식 웃으며 대꾸하다가, 또다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휙 돌렸다. 부대 사찰을 나온 리한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는 것을 본 유진이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요.”
“어.”
“군의관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이제 일주일 정도만 약을 먹으면 완벽히 회복되실 거래요.”
“그래? 그 선생님은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안 하고 너한테 그런 얘기를 하지?”
“사실 저도 엿들었어요. 군의관 선생님이 사브르 부단장님께 말하는걸요.”
리한이 사라지자,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거처로 향했다. 그가 그녀를 찾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무슨 생각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섣불리 행동했다가 사브르가 정말로 자신의 팔을 잘라 버리고 리한을 이용하는 데 사용할까 봐 죽은 듯이 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불행하게도, 그녀는 이곳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대우받고 있을 뿐 사실은 약자였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