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132/256)

  

42화.

‘앞으로 닥쳐올 좋은 일들은 승진이라든가 하는 예상 가능 하고 사소한 것들인데, 나쁜 일들은 가늠조차 안 되니…….’

그녀에게 리한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던 나쁜 일이었을까. 그는 마음속으로, 어쩌면 자신이 타르안의 멤버였기 때문에 팬의 입장인 그녀가 거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흔들리는 그녀를 끝까지 밀어붙인 건 리한이었고, 그는 그녀가 감정에 무디고 사랑에 회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떠나면 또 유진은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리한 역시 유진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상 혁명군이 자신을 놓아줄 리 없으니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 그는 이미 의식을 잃고 잠에 빠져든 유진의 손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미안해, 네 앞에 나타나서…… 그런데 고마워.”

굵은 비가 막사를 때리는 소리만 울렸다.

“네가 내 담당자라서…….”

유진의 살짝 벌린 입으로 얕은 숨이 힘겹게 이어졌다. 리한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듯 살았던 내 인생에, 너만이 내겐 평안이었어.”

자신을 귀찮아하고, 자신에게 화도 내고, 잘 웃어 주지도 않고, 한마디도 지지 않고. 심지어 호웰 같은 호색한을 훨씬 더 좋아하는 여자였지만.

“너는 내 평생 유일한 그리움이 될 거야.”

* * *

다음에 유진이 눈을 떴을 때에는 리한이 곁에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시중을 들러 온 소년병에게 물어 리한이 지금 선발대를 이끌고 출정했다는 것과, 자신은 후방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번 더 군의관이 처방해 준 약을 먹고 며칠을 푹 쉰 결과, 그녀는 이제 거동이 자유로울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열흘?”

그녀는 하루에 두 번, 그녀의 상태를 보고 약을 챙겨 주러 오는 소년병을 보며 반문했다.

“내가 열흘씩이나 정신을 못 차렸다고?”

“네.”

그녀의 수발을 맡은 소년병의 이름은 두팜이었는데, 유진은 그를 보면 항상 고향에 있는 막내 동생이 떠올랐다. 유진보다 한 뼘밖에 키가 크지 않은 그는 이제 열다섯이라고 했다. 서부 지역의 사투리를 썼고, 몸이 퉁퉁했으며 웃을 땐 눈이 사라질 정도로 작아졌다.

“리한은 언제 출정했어?”

“닷새 정도 됐죠. 이제 유진 님이 거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동이 가능하고, 이틀 정도 되면 합류할 수 있을 거예요. 선발대가 대승을 거뒀다고 하거든요.”

유진은 그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속한 후발대가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내색하지 않고 약을 먹었다. 천천히 약을 먹는 동안 다음 질문을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리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갑자기 ‘난 사실 혁명군이었어. 넌 돌아가.’라는 말을 믿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리한 장군님을 뵐 수 있다니 신나요. 너무 멋있어요.”

그러나 유진이 신중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이, 두팜은 통통한 손으로 약사발을 받아 내며 조잘댔다.

“아메탄 왕국에 있을 때 리한 장군님의 부하였다면서요! 좋겠다…… 저도 리한 장군님의 측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하?”

“네. 스케줄을 잡고 그에 필요한 이런저런 절차를 밟아 주는 사람이었다고…… 역시 리한 장군님은 아랫사람을 끔찍하게 여기시는 분이신가 봐요. 이렇게 고급 막사에 제일 높은 군의관 선생님도 붙여 주시고…….”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하라니…… 흠.”

유진은 기지개를 켜며 찝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소년에게 아메탄 왕국의 산하기관 체계를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여기에 있는 반란군들의 시선이 왜 자신에게 호의적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한 카드민이 돌아오니까, 좋아?”

“그럼요! 제가 혁명군에 입대한 계기가 된 분이신데요.”

소년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저희 부모님은 황궁의 확장 건축 공사에 불려 가서 돌아가셨어요. 그때도 전 되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게, 연이은 흉년으로 우리 가족은 밀죽만 먹고 살았거든요…….”

유진은 신나서 얘기하는 두팜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고향 생각이 났다. 그녀도 아주 어렸을 때,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으면 어죽으로 몇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높으신 분들은 뭐가 그렇게 더 하고 싶은 건지, 그나마 있던 부모님도 부역으로 끌려가고…… 그나마도 없는 마력으로 생활하기도 힘든데 저 멀리 황궁에는 불꽃놀이가 터진다고 하고…… 그런데 야학에 갔다가 리한 카드민이 쓴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을 봤어요.”

“너, 공화주의자구나.”

“혁명군이라면 당연하지요.”

두팜이 자랑스럽다는 듯 자신의 어깨를 탕탕 쳤다.

“이렇게 맘대로 황궁을 증축하거나 하는 황제보다는 더 현명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해요. 왜 황가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해야 하나요? 스타람 섬에는 그래서 왕이 없대요.”

“하지만 아메탄 왕국에…….”

“작전상 아메탄 왕국에 잠시 망명한 척하셨지만,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셨죠. 저도 망명한다고 하실 때 정말 많이 실망했지만, 모두 작전이었던 거예요! 리한 카드민 장군님은 스타람 섬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온 분이세요.”

“……구원……? 리한은 가수인데?”

“가수로 유명한 분이시지만, 사실 오랫동안 비밀리에 훈련을 받아 온 군인이라는 건 혁명군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잖아요. 지난번에 훈련받을 때 봤는데, 저는 그런 무예를 가진 분은 처음 봤어요! 사브르 부대장님하고 비교가 안 되던데요. 게다가 리한 장군님이 오시고 저처럼 혁명군에 자원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어요.”

“그래?”

“리한 카드민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니까요.”

두팜은 리한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고, 그를 보좌했다는 유진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유진은 대화를 하면서, 리한이 원정을 떠나기 전 두팜에게 유진을 잘 부탁한다고 직접 말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두팜.”

“네!”

“음…… 심심해서 그런데…… 혹시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이미 국가가 금지하는 타르안의 사진을 밀수한 적 있는 사람이다. 이미 불법을 저질렀던 몸이고, 그러니 조금 더 어겨도 나쁠 것 없지. 딱 봐도 금지된 책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긴…… 일단 아메탄은 아니니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두팜에게, 그녀가 양심의 가책을 뒤로하고 물었다.

“그……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 읽어 볼 수 있을까?”

* * *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유진 유니트 양의 몸이 괜찮으시다면 내일은 행군을 해 볼까 합니다.”

“네.”

그날 밤, 부대장인 사브르가 그녀를 보러 왔다. 유진은 일부러 그가 올 때까지 읽고 있던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을 덮은 채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리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말이 안 되는 점이 많아 속아 넘어갈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혁명군에 합류하려고 했다면 지금까지 기회가 너무 많았고, 굳이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수동적인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유진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던 그때의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녀를 반란군 기지에 던져 놓고 출정을 해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유진은 이런저런 사실들을 모아 진실에 닿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영리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이 잘 되었다면 이미 수사국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리한이 시킨 대로 혼자 아메탄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요. 제가 혼자 말을 못 타니, 그것만 고려해 주시면 됩니다.”

“네. 그것은 이미 리한 장군님이 일러두었습니다.”

“리한은 무사한가요?”

“무사한 것뿐만이 아니지요. 공화국 수립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히코르트 영지를 단숨에 함락했는데요. 천연의 요새라고 불리는 곳이라 이단 임시 총독님도 걱정이 많았는데 리한 장군님이 이때 합류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일부터 그쪽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다행이군요. 저는 옛날부터 타르안을 좋아했지만…… 리한이 군인인 건 몰랐어요. 이런 책을 쓴 것도 몰랐고요.”

그녀가 ‘나의 공화주의’를 가리키며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유진은 자신의 웃음이 어색하지 않기를 빌며 다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무…… 감명 깊던데요. 제가 체술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있었더라면 입대하고 싶을 만큼요. 공화정을 제가 잘 몰랐나 봐요. 왜 아메탄에서 금지하고 있는 책인지 알겠어요.”

“그렇죠. 정말 수작입니다. 물론 이미 유명한 가수였던 타르안의 리더, 리한 카드민이 썼기 때문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지만요. 실제로 스타람의 공화정 수립에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리한의 지지로 아카날이 선거에 당선되었으니까요.”

사브르는 뿌듯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군의관이 전달하라고 했다는 약사발을 전했다. 그녀는 바로 마시지 않고 그대로 들고 있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부대장님은 후방에 남으셨어요? 그렇게 중요한 전투라면 가셔야 하는 것 아닌지…….”

“제가 있으면 상하 관계가 좀 꼬여서요. 원래 부대장 자리가 리한 장군님 자리이고, 저는 원래 스타람에서는 장군님의 부관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없는 게 리한 장군님이 군대를 이끄시기에 편할 겁니다.”

“왜 제대로 개편하지 않고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지만 사브르는 그 이상은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이 웃음으로 넘겼다.

“얼른 약 드십시오. 식습니다.”

“……제가 안 먹으면요?”

“네?”

사브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진이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안 먹고, 몸이 더 나빠지고, 차도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아니, 무, 무, 무슨 소리십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좀 안 되는 것 같아서요.”

그녀가 뚱한 표정으로, 마치 그녀의 상관인 키탄 과장에게 보고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아메탄 왕국 산하기관의 이제 막 말단을 벗어난 직원일 뿐이에요. 그런데 저 하나 때문에 부대장님까지 남아 후발대가 출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좀 이상하잖아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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