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저는 스타람 섬에서 사브르 부대장님이 이끄는 꽤나 훌륭한 지원군을 받았습니다. 사브르 부대장님은 실력에 비해 상당히 자신감이 없으셨는데…… 그게 리한 카드민, 당신 때문이라지요?”
사브르가 리한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리한은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아 이마를 짚었다. 사브르는 군대에 있을 때 리한의 바로 아래에 있었던 부관이었고, 리한이 떠난 뒤 리한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지원군을 이끌게 된 것이었다.
“원래 당신의 군대였고, 군인으로서 당신의 능력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출중하다고 들었습니다. 당신과 아카날이 왜 등을 졌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그 정도 값은 치르셔야겠습니다. 사브르에게 말을 들어 보니, 당신은 황제의 편에 서느니 우리의 편에 설 것이라던데요. 물론 당신의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을 저도 감명 깊게 읽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도, 도와주십시오.”
사브르가 이단의 말이 끝나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브르는 리한이 인정하는 골수 공화주의자였고, 제국의 혁명에 자신의 신념을 걸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는 당신만큼의 자질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초기, 당신의 이름은 군대의 사기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겁니다. 제국의 공화주의자들은 당신의 책 ‘나의 공화주의’를 모두 필독서처럼 읽은 사람들입니다. 아카날 총통님과 틀어졌어도, 당신이 공화주의자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있지 않습니까.”
“…….”
“혁명군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당신 같은 인재가 절실하지요.”
리한은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지만 결국 결론은 났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유진이 아니었다면 아메탄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다 지긋지긋하고 지친 나머지 아카날이 지정해 준 곳으로 떠났을 뿐이었다. 그 방황의 끝이 전쟁터라는 건 조금 맥 빠지는 일이긴 했지만, 아까 군의관은 그대로 두면 유진의 목숨까지 위험할 뻔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유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제 없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유진이 무사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유진에게는 말하지 마. 그냥 조용히 보내.”
그가 사브르에게 낮게 말했다.
“자책할지도 모르니까.”
사브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이제 이단을 보좌하고 있다고 해도, 리한은 그가 오랫동안 섬겨 오던 상관이었다. 어릴 때 만나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가 짧게 목례했다.
“혁명군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 * *
새로 생긴 산하기관, 기술국에는 어쩔 수 없이 왕립마법대학 출신 학생들이 아닌 스타람 문물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제 기술국장 체스트가 직접 왕립마법대학에서 ‘기술학’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고, 기술국을 지원하는 졸업생을 받아 운영하게 될 테지만 어쨌든 그 최초의 졸업생을 받기 전까지는 체스트의 재량대로 최소의 연구원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뭐든지 처음은 초라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메탄 왕국의 국익을 위해 연구하는, 산하기관의 설립 취지에 딱 맞는 기구가 될 겁니다.”
체스트는 기술국의 완공식 날, 기가 막힌 연설을 하면서 모두를 감동시켰다. 약제국과 의료국에 이어서, 아메탄 왕국의 국익을 신장시키고 국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청산유수처럼 말했던 것이다. 그 연설 속에 ‘스타람 전기공학을 베낀다’라는 말은 교묘하게 숨기고, 마력을 대체할 수 있는 동력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에는, 이런 보여 주기 식 행사에는 항상 냉소적인 표정으로 불량스럽게 앉아 성의 없게 임하는 루벤까지 일어나 박수를 쳤다.
“스승님, 이렇게 말씀을 잘하실 줄이야.”
루벤이 악수를 청하며 허허 웃었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다 나이 들어서 무슨…… 기반만 다지고 은퇴해야지요.”
민망해하는 체스트의 뒤에, 최소의 연구원 중 하나로 지정된 노엘이 호화로운 옷을 입고 웃고 있었다. 그는 전기공학이라고는 전혀 몰랐지만, 수배를 풀어 주고 연구원 신분을 받는다는 조건에 그동안 쌓아 두었던 스타람의 밀수품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기술국 직원들이 연구에 참고할 수 있는 다양한 스타람의 전기용품을 밀수해 오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루벤의 시선이 노엘에게 가닿았지만, 노엘은 예의바르게 목례를 하고 부드럽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언제 체스트에게 칼을 들이밀었냐는 듯 노엘이 천천히 체스트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수배령이 내렸던 것이 무색하게, 이제 그의 앞에 선 사람들은 힐끔힐끔 그를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뿌듯하게 웃으며 완공식에 참석한 귀족들과 산하기관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귀족이 아니어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그들과 똑같이 이곳에서 고개를 당당히 들 수 있다는 사실에 그의 눈이 번쩍거렸다.
이미 마력이 사라진 후에 몰래 팔았던 전기용품 등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그는 국가 차원에서 눈감아 준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 재빨리 땅과 저택을 매수했는데, 그 외에도 이 사건에서 한몫 거하게 챙긴 밀수꾼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밀수꾼들이 그동안 대놓고 영지를 매입하지 못한 것은 땅을 판 귀족들의 복수심에 자금의 출처를 추적 받아 빼앗긴 전례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유진…… 어서 돌아와.’
노엘은 체스트의 인사치레를 들으며, 시선을 멀리 둔 채 생각했다.
‘나는 이제 네 곁에 당당히 설 수 있으니까…….’
그 생각을 할 수 있기 위해,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제국에 간 유진만 돌아오면 된다. 그녀의 무심한 초록색 눈을 보며, 이제 어두운 지하실이나 잡화점 안이 아니라 아메니티 거리를 당당히 걷고 싶었다. 그녀가 늘 부담스러워하는 가족들의 빚도 다 갚아 주고, 체스트의 구석진 하숙집에서도 나올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그녀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지껄인 리한 카드민이었다. 유진의 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10년을 그녀 곁에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오래 본 친구였고, 독신주의자 선언을 한 유진의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수사국에서는 리한 카드민이 입국함과 동시에 바로 체포할 것이라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가 국경을 넘으며 이단 황태자가 들어왔고, 그로 인해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 확실하므로.
* * *
유진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며칠을 보냈다. 폭우 때문에 진군이 막혀 이동하지 않는 동안, 그녀는 눈을 뜨면 군의관이 약을 먹였고 또 그 약을 먹고 잠에 취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의식을 차릴 때마다 확실히 몸이 나아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들오들 떨리던 몸도 가라앉고, 온몸에 핀 열꽃도 가라앉았지만 일어날 기운은 도통 생기지 않던 어느 오후, 그녀는 움찔하며 깨어났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곁을 지키던 리한은 재빨리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리한의 호출에 군의관이 그녀의 상태를 본 뒤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열이 내리고 있군요.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회복기에 접어들었으니 조금만 더 지나면 많이 좋아질 겁니다.”
군의관이 준비해 온 약을 먹이고 나갔다. 리한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었다. 그녀가 간신히 눈을 깜빡이며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말하지 마, 내가 말할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유진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시력이 완벽히 돌아오지 않아 그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난…… 원래 혁명군을 맡은 사람이야. 가수로 유명세를 탔지만, 실제로는 아카날 총통이 데리고 있던 사병이었거든. 제국의 지원병을 이끌 사단장이었어.”
“…….”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을 쓰기도 했어. 난 그렇게 유명세를 얻고…… 제국에 지원군을 보낼 때 부대장을 맡을 계획이었어. 공화주의라는 것은 대중이 필요하고, 대중을 얻으려면 인기가 필요하거든. 그런데 어쩌다가 아메탄 왕국을 잠시 들린 것뿐이고…….”
유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제 다시 혁명군에 합류한 거야.”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고요 속에서 천천히 울렸다.
“넌 치료가 끝나면 아메탄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줄게.”
“……리한…….”
“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야. 내가 아메탄에 가기 전, 그 상황으로. 너는 그냥 행정국의 직원으로 돌아가고…… 하루하루 또 똑같이 살아. 하기 싫어도 네 일을 책임감 있게 잘 하고, 퇴근해서 창가의 달이나 바라보며 와인 한잔을 마시고, 또다시 출근해서 참조 문서를 뒤지고…… 월급을 받아서 집에 보내고. 안전하고, 평화롭고, 별일 없게.”
유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폐가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어 숨을 내뱉은 채 기침만 하고 말았다. 그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비실비실했던 몸이 이렇게 짜증나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그가 말하지 말라는 듯이 그녀의 볼을 손으로 쓸었다.
“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넌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약기운이 돌았다. 그녀는 까무룩 정신을 잃는 와중에,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것을 기억했다.
“승진같이 예상 가능 하고 사소한 좋은 일들이, 네 일상에 많이 생기길 바라.”
리한은 그 어느 날, 아직 서로가 어색하던 날,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던 왕립마법대학 뒷길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지금은…… 일상을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차죠.’
그녀는 그와 함께 터벅터벅 걸으면서 그런 말을 했었다. 모든 걸 달관한 것 같은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 와닿았던 것이다. 하긴, 그동안 유진이 했던 말 중 그가 잊었던 것이 있던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