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130/256)

  

40화.

“리한, 저는…… 당신이 결국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저 필부로 살기에는 지금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조용히 살기에는 당신이 너무 유명하지요. 황제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지배하는 세상이 당신이 말하던 정의로운 세상입니까?”

“…….”

“이단 임시 총독님이 오늘 저녁에 독대를 원하십니다. 그 때 모시러 오겠습니다.”

또 다시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혼자 남은 리한이 그녀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다시 의식을 잃을 뻔했지만, 유진은 끙끙대며 간신히 눈을 떴다.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리한이 벌떡 일어섰다.

“유진, 괜찮아?”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 도와주었다. 간신히 기대어 앉자 리한이 약초 물을 조금씩 수저로 떠서 입에 넣어 주었고, 유진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끝까지 다 먹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어지러운 가운데 시야가 돌아왔다.

“……여긴 어딘가요? 반란군의……?”

“사실…… 여기에서는 혁명군이 제대로 된 명칭이야. 당분간 여기서 생활할 테니 앞으로 호칭에 유의해.”

“…….”

유진이 가만히 그를 보았다. 그가 반란군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란군의 막사에 올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와 유진에게 할당된 것 같이 보이는 막사는 심지어 상당히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맞았구나. 유진의 머릿속으로 여러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입국 자체가 수상하다던 수사국의 이름 모를 직원들, 그가 위험하다고 경고하던 노엘, 공화주의자가 분명하다고 장담하던 저스틴 단장, 수사국 독단으로라도 없애 버려야 하는 존재라고 언급했던 이브…… 그 사람들이 모두 맞았고, 유진은 이번에도 틀린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를 해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문서적 타당성이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융통성 없는 공무원’ 소리를 듣더라도 그녀는 다시 돌아가도 그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왕명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문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이런 시기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운 없는 목소리 끝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약해 빠진 자신의 몸이 새삼 한심해 죽을 것 같았다. 화를 내려고 해도 기운이 없었고, 당장 박차고 일어서려고 해도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리한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진…….”

“…….”

그녀는 콜록대다가 숨을 헐떡이며 다시 누웠다. 그를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일단 너는 쉬어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해.”

리한이 먹인 약초 물에 수면 작용이 있는지, 다시 마법처럼 잠이 오기 시작했다. 유진은 엿들은 대화를 복기하다가 자신이 잠이 드는지도 모르는 채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 * *

리한이 그동안 유진에게 자신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유진이 자신에게 묻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아메탄 왕국의 산하기관 직원이었고,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떤 사안을 알면 상급자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유진의 성격상 모르면 몰랐지 일단 알고 나서는 업무 처리의 늪에 빠질 것을 알기 때문에 리한은 유진에게 ‘이 사실은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갈등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가 어떻게 되었든, 어쨌든 아메탄 왕국에서 죽은 듯이 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메탄 왕국에 왔지만, 유진과 함께 살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눈에 담게 되면서 이대로 평생 살고 싶다는 소망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너무 어릴 때부터 몰아치듯 살아왔고, 그래서 그는 젊은 나이에 일찍 지쳤다. 그러나 사브르의 말처럼, 그렇게 조용히 살기에는 그가 너무 유명했다. 존재만으로도 제국에 불려 가고, 또 그렇게 해서 유진을 이 전쟁터 한복판에 데려올 만큼.

리한은 어떻게든 유진을 지킬 자신이 있었지만, 유진이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스타람 섬에 있을 때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군인이었고, 훌륭한 가수면서 글도 잘 쓰고 춤도 잘 췄지만, 의학적 지식은 없었다. 태생 때문에 마법만 못 썼지 꽤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지만 정작 예상하지도 못한 것에 무력감을 느껴 버렸다.

유진이 약에 취해 누워 있을 때, 리한은 공화국의 임시 총독이자 현 황제의 둘째 아들, 이단과 독대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 자리가 마음에 놓이지 않은 사브르까지 합석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젊은 총독, 이단은 붉다기보다는 핏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는데 눈매가 며칠 전에 본 황제와 지독하게도 닮았다고 리한은 생각했다. 이단은 사브르와 리한과 함께 독한 술을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소탈하게 말했다.

“장기말끼리 마주하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리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미를 표했고, 사브르는 ‘장기말’이라는 표현에 어쩔 줄 모르며 난색을 표했다. 이단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지만, 광기가 어려 있었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라 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섬뜩해졌다. 마약에 취해 있던 황제와는 달리 그의 눈매는 또렷했지만 그래서 더 분명한 공격성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메탄 왕국에 그렇게 요란하게 망명하셨으면서, 우리에게 온 이유가 뭐지요?”

“제국 연회에 참석하고 아메탄 왕국에 돌아가는 길인데, 제 담당자가 아파서 의학적 도움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한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이단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황제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다가?”

“……총독님이 제 도움을 받은 건 확실하니까.”

리한이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제가 아메탄에 망명할 때, 인파 속에 섞여 아메탄 왕국에 들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하.”

이단은 술을 한 잔 더 따르며 씩 웃었다.

“어차피 우리는 아메니티의 돈이 필요했던 아카날 총통과 ‘킹’의 장기말 역할을 했을 뿐이죠. 우리끼리 서로 받은 명령을 공유해 봅시다. 아메탄에 망명한 것 자체가 아카날 총통의 뜻 아닙니까?”

안절부절못하는 사브르를 뒤에 두고 이단이 거침없이 말했다. 리한 역시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버리고 떠날 거라면, 최대한 시끄럽게, 남들의 이목을 끌면서 아메탄에 망명하라는 것이 아카날의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 그 땐 이유를 몰랐는데, 사실은 총독님을 아메탄 왕국에 몰래 들어오게 하려고 그랬던 거군요.”

“그렇죠.”

이단이 여유 있게 대답했다.

“이젠 모두 끝난 일이니, 저의 역할도 설명해 볼까요. 자신들의 마력을 빼앗고 발까지 묶어 놓은 제국을 무너뜨리는 건 스타람의 가장 큰 숙원이었고, 당연히 우리 공화주의 세력에게 도움을 준다는 제안을 했지요. 거기엔 여기 있는 사브르처럼 공화주의자들의 이상도 포함되겠지만.”

“…….”

“스타람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지원은 물론 여기 있는 사브르의 병사들처럼 군대들도 있지만…… 당연히 자본도 포함 되는 것이고…… 그 자본의 지원을 대가로 제게 아카날은 아메니티의 마력을 잠시 빼앗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혀 몰랐던 사실에 리한의 눈이 커졌다.

“옛날의 황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스타람 섬의 마력을 다 뺏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난 마력을 빼앗을 수 있는 피를 타고난 건 맞지만, 그만한 능력은 안 돼요. 아메탄의 고대 마법이 걸려 있는 왕궁에서 상당한 작업을 해야 했고, 그러려면 아메니티에 직접 잠입해야 했죠. 황제에게 쫓기면서 국경을 넘는 건 너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당신 같은 유명인 때문에 군중들이 난리가 나면, 그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건 할 만했어요.”

리한은 애초부터 스타람을 떠난다는 생각은 했으나, 목적지를 아메탄 왕국으로 정해 둔 것은 아니었다. 아메탄 왕국은 아카날이 떠남을 묵인해 주는 대신 지정해 준 곳인데, 어떤 계획의 일부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큰일일 줄은 몰랐다.

“아카날 총통은 아메탄 밀수업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킹’과 이 모든 일을 꾸몄습니다. 스타람은 전쟁 비용을 벌어야 했고, 그 자본을 아메탄에서 끌어다 쓰려고 했던 것이죠. 스타람에는 흔한 전기 물품을 밀수를 통해 비싼 값에 판다…… 그러려면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했고, 그래서 날 끌어들인 겁니다.”

“아카날답군요.”

그가 단숨에 잔을 비워 버리며 중얼거렸다.

“제국인들에게 마력을 뺏겼다고 분노할 땐 언제고, 아메탄 왕국 같은 제 3국에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다니.”

“뭐, 사람은 다…….”

이단이 싱긋 웃었다.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저도 스타람의 지원이 필요해서 아메탄 왕족들을 속이고 뒤통수를 쳤죠. 황제에게 쫓기고 있으니 잠시 보호해 달라, 제국이 무너지면 보상하겠다, 뭐 이런 말들로. 지금 뒤통수를 맞은 걸 알아챈 아메탄 왕족들이 또 다른 수를 쓰고 있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건 또 제가 알 바는 아니겠지요.”

리한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난 딱히 당신에게 도움을 받은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치면 아카날 총통이 당신을 없애지 않고 순순히 보내 준 건 내 덕이기도 하지요. 저희는 그냥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고, 상호간 아무런 빚이 없습니다.”

“제게 받고 싶은 것이 있으시군요.”

이단의 말에 리한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들에게 바로 제공된 안락한 막사와 유능한 군의관을 볼 때부터 각오한 일이기는 했다.

“제 담당자를 여기 두고 치료해 주는 대신, 제게 무엇을 받고 싶으십니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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