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롸 (129/256)

  

39화.

그의 말이 유진에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오들오들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유진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한숨을 쉬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가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제발…….”

그러나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유진의 말을 비웃듯이 밤새 그녀의 열은 더 오르기만 했고, 그날 밤에는 환각이 보이기 시작하는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유진, 괜찮아? 유진! 정신 차려.”

“……노…… 노…… 노엘…….”

10년이라고 했다. 중학교에서 만나, 지금까지 가장 친한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오랫동안 유진을 사랑하며 곁에 머물렀다고, 조금이라도 해가 될까 봐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리한은 그녀가 중얼거리는 그 이름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미안…… 노엘…….”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녀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밤이 꼴딱 새도록 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대다수의 말들을 리한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노엘’이라는 이름은 그의 가슴에 크게 남았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한 남자, 그가 모르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모두 알고 있는 남자, 유진을 향한 감정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지르던 남자.

그는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는 유진을 밤새도록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았다. 리한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커다란 무력감에 고통스러웠다. 그녀를 위해 그 어떤 역경이라도 뚫고 갈 자신이 있었는데 정작 그가 싸워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정체 모를 병마였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진, 난 널 안전하게 아메탄에 다시 데려다주기로 그 자식에게 호언장담했어.”

리한은 그녀의 귀에 대고 닿지 않을 말들을 속삭였다.

“나 때문에 제국에 왔는데…….”

그녀의 달싹이는 입술에 리한이 자신의 입술을 대고 중얼거렸다.

“내게는 그 무엇보다 네가 소중해.”

그가 일어나 그녀를 둘러업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안은 채 말에 올라탄 리한은 망설이지 않고 고삐를 잡았다.

리한과 유진을 태운 말이 향하는 방향은 이단 황태자가 이끄는 반란군이 진을 치고 있는 언덕이었다.

* * *

수사국장 루카스는 굳은 얼굴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평정심을 찾으려는 듯 심호흡을 한참이나 했다.

“말이 됩니까? 기술국이라뇨. 말이 좋아 독자 기술이지, 스타람의 천한 문화를 가져온다는 것 아닙니까.”

“……와일스.”

“예.”

“넌 집에 스타람 물건 하나도 없냐?”

“……아내가…… 어디서 전등을 사 오긴 했더라고요.”

과장인 와일스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또 다시…… 마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배터리인가? 그게 나오면 나중에는 값이 더 폭등할 수 있다고요.”

“네가 이럴 정돈데 남들은 어떻겠냐. 사실은 귀족들도 무서운 거야. 마력이 없는 날들을 살아 봤으니 그게 얼마나 불편한지 체감한 거지. 마력 기반의 문화라는 것도…… 사실 제국을 따라 한 것이고 실체가 없긴 하잖아. 백번 양보해서 기술국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쳐. 내가 정말로 화나는 것은…….”

루카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사진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쯤 되면 이놈이 ‘킹’이겠지. 노엘 하이트.”

“……하.”

“밀수업계의 꼭대기에 있는 이 자식의 수배를 풀고 연구원으로 앉혀라…… 밀수품을 공급해서 따박따박 연구하는 데 쓰고…… 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결국 국가를 위한 밀수를 하라는 거잖아? 이 새끼 잡으려고 우리가 얼마나 그 개고생을 했는데…….”

와일스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 자식을 산하기관에서 보게 생긴 겁니까? 우리가 쫓던 범죄자 자식을요?”

“……이미 한탕 거하게 해 드셨으니, 얼씨구나 하고 나오겠지. 신나게 신분 세탁하고 계시는 다른 놈들하고 똑같이.”

루카스가 보고 있던 재무국의 보고서에서는, 이번 사태 때문에 그동안 밀수해 두었던 스타람 물품들이 굉장히 비싸게 여기저기 팔렸고, 스타람 섬과 밀수업자들이 90%에 가까운 이윤을 챙겼다고 적혀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대다수의 평민 집안은 돈과 명예를 둘 다 가지지 못합니다. 산하기관 월급이 아무리 많아도 어디까지나 평민 속에서지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애초부터 돈을 벌겠다고 뛰쳐나오면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하니 그저 평민일 뿐이고요. 그런데 이놈은 그러면…….”

와일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노엘의 사진을 구겼다.

“대단한 부를 쌓고 있음과 동시에 산하기관 연구원의 명예를 얻게 되는 겁니다. 이놈이 어디 몰락한 영지라도 샀다가는…….”

“작위가 없으니 귀족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영향력을 가진 집안이 탄생하는 거지.”

루카스가 낮게 말했다.

“이 모든 부작용을 감안할 정도로…… 기술국이 필요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말이지.”

“하아.”

“체제 전복은 무슨. 비겁한 놈들이 다 그렇지. 자신보다 조금 더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욕하면서 불공평함을 떠들고……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면 또 싹 입을 다물어.”

와일스는 동의한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가 짜증을 내며 다시 보고서를 내던졌다.

“이럴 때마다 정말 환멸이 들지. 불공평하다고,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을 입 다물게 하는 건 또 다른 권력이야. 그들이 그렇게 욕하던 권력을 먹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들이 욕했던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해. 밀수꾼들이 하나같이 귀족들의 영지를 매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오지. 누구보다도 귀족을 욕하던 사람이지만…….”

“결국 그냥 부러웠던 거겠죠. 그렇게 되고 싶어서 욕했던 거예요.”

와일스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우리같이, 주어진 환경에서 그냥 열심히 사는 평민들은 참 바보가 된 기분이네요.”

* * *

비가 쏟아져서 행군에 발이 묶인 반란군의 기지에 아침부터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한 남자가 다 죽어 가는 여자를 안고 들어와, 이단 황태자를 만나야겠다고 밑도 끝도 없이 주장했던 것이다. 보초를 서던 군인이 당연히 코웃음을 치며 민간인이니 죽이지는 않고 보내 주겠다고 대꾸했다가, 그의 칼등에 맞아 그대로 기절했다.

그는 유진을 업은 채로 그에게 달려드는 반란군의 군인들을 죽이지는 않으면서 약 올리듯 기절시켰다.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무리 달려들어도 쉽게 제압하지만, 정말 훈련을 받아 총이라도 가지고 있는 군인들을 상대하려면 어렵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소동이 벌어지자 직접 나와 본 부대장이 그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리한 카드민?”

“사브르? 당신이 여기 있는 걸 보면, 일이 잘 진행됐나 보군.”

리한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대장이 스타람의 중책을 맡은 군인이었고, 사실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단 황태자를 만날 필요도 없이 이야기가 쉽게 흘러가겠다 싶으면서도, 벌써 스타람의 군인이 제국의 반란군을 지휘할 정도로 연합이 공고해졌나 싶어 기시감이 들었다. 자신이 없어도 아카날의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 사브르의 자리에 자신이 서 있을 것이다. 각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그들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여기엔 대체 왜…… 일단 들어갑시다. 여기 오신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안 그래도 우리를 그렇게 버리고 가실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데리고 온 그 꼬마는…….”

“꼬마는 아니고 성인 여성인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하지. 군의관 하나만 빨리 불러 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리한은 유진을 업은 채로 당당하게 반란군 기지 안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7. 각자의 정의

유진이 눈을 뜨자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얼마 만에 정신이 드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렴풋하게 노엘의 꿈을 꾼 것 같았다. 노엘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곁에서 좋아했던 친구를 두고, 너무 짧은 시간에 리한에게 사랑을 느껴 버렸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역설적이게도, 노엘을 생각해 보면 리한에게 얼마나 자신이 마음을 빼앗겼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게 곁에 있다고 해서 그냥 생기는 건 아니니까 노엘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이 없었던 거겠지. 어지러워서 그대로 눈을 감았는데,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 가지가 겹쳤습니다. 이 지역 풍토병에 걸린 듯한데, 아주 오랜만에 보는 질환이군요. 극한 스트레스 상황에 체력적으로도 힘들어 면역력이 급감하면서 걸린 것 같습니다. 원래 몸이 튼튼하지 않은데다가 비까지 맞았으니 회복이 오래 걸릴 겁니다.”

“완전히 회복할 수는 있는 겁니까?”

리한의 목소리였다.

“풍토병이라는 게 워낙에 사람마다 제각각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약을 써가며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고, 절대 무리하면 안 됩니다. 그대로 두면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로 악화되었을 텐데 그래도 비교적 빠르게 치료에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군진지가 위생적으로 좋은 환경은 아니니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일단은 막사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막사? 군진지? 다시 잠이 들려던 유진은 불안한 단어 몇 개 때문에 희미한 의식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의사로 보이던 사람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두런두런 또다시 새로운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돌아오신 거라고 믿어도 됩니까? 리한, 이 전쟁은 우리에게 단순한 지원뿐만이 아니라 큰 의미가 있어요. 당신이 아쉬울 때가 참 많았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도, 원래라면 당신의 자리겠지요. 아시겠지만 저는 책사에 가깝지, 장군의 위치와는 안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떠나 버리고 너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냥, 이 여자가 회복되는 대로 다시 아메탄으로 떠나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야.”

“……이미 여기까지 오실 땐, 그렇게는 안 된다는 걸 각오하신 것 아닙니까.”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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