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128/256)

  

38화.

“그럼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유진이 생각났다는 듯 끼어들었다. 언젠가 리한이 했던 말이 기억났던 것이다.

‘귀여운 외모인 건 사실이지만 애교라고는 하나도 없고…… 엘리트라지만 너무 딱딱하고…… 잘 웃지도 않고…….’

“애교도 없고 잘 웃지도 않는데 내가 왜 좋아진 거예요?”

“어?”

“스타람에 있을 때, 온갖 여자 다 만나 봤을 거 아니에요.”

리한은 한숨을 푹 쉬었다.

“……유명인이라 오히려 더 못 만났어. 호웰 같은 놈이야 워낙 여자를 좋아하니까 난봉꾼처럼 살았지만, 난…….”

“거짓말…….”

“네 또래 여자들이 호웰 곁에 드글드글했어. 우리 멤버 중에는 사근사근하고 잘 받아 주니까. 난 리더로서의 책임감도 있고 해서 구설수에 안 오르려고 했고, 또…….”

“…….”

유진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자신 때문이 아니고 호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챈 그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됐다. 그냥 너무 바빴어. 대학 시절에 한가롭게 연애한 너랑은 다르게.”

“별 의미 없어요. 이젠 남보다도 못한 사이인걸.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지, 뭐. 한때 서로 좋아했다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 말에 리한이 문득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멀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대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고 균형을 잃은 그녀가 기우뚱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위로 엎어진 그가 속삭였다.

“나중에 나도 그렇게 기억할 거야?”

“……네?”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할 거냐고.”

“어어…… 미래는…… 음…… 알 수 없고…….”

“대답 잘 해.”

그가 불길에 이미 마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며 말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 상상도 못하겠지만…….”

유진은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불빛이 일렁거렸고,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담요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냥 여기서 널 가둬 놓고, 평생을 둘이서 살고 싶어…… 세상이 어찌 되든 말든, 반란군이든 제국군이든 이곳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네 친구와 전 남자 친구가 있는 아메탄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고……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알량한 타르안의 이름에라도 기대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주고, 림프를 쳐 줄 테니까.”

“…….”

“……이런 내 이기심과 욕망이 널 불행하게 할까 봐…… 얼마나 두려운지도 넌 몰라. 내가 너에게 얼마나 폐가 되는 사람인지도 가늠이 가지 않아서. 나는 길을 잃은 끔찍한 기분을 알아. 너는 모르겠지만 내 방황의 끝이 너라는 건 네게 위험한 일이거든.”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새삼 이곳에 둘만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아메탄 왕국에 왔을까. 정말로 방황 중인 걸까. 왜 이토록 많은 것을 가진 남자가 쓴 곡들은 모두 결핍과 극복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녀가 가까스로 담요 밖으로 손을 빼서 그의 뺨에 천천히 댔다.

“리한, 당신과 꼭 행복하겠다, 당신이 내 인생을 구원할 거다, 이런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인 게 아니에요. 물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쩔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체중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계속해서 들던 오한이 멈춘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고, 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그래서 아주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음, 그 때가 되면 어깨 한번 으쓱하고 당당히 합리화할 거예요. 그 땐 어쩔 수 없었다고.”

“유진…….”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며 중얼거렸다. 그의 입술이 닿자 그녀의 척추를 타고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나는 네 나이 때, 너처럼 현명하지 못했어.”

“…….”

“내 길이 맞다고 생각하고, 내가 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어. 돌아보니 잘못된 길에 너무 멀리 와 있었는데…… 어떻게 할지 몰라 길을 잃고 방황하며 헤매고 있을 때…… 네가 내겐 등불 같았어.”

“저는 그저 제 할 일을 한 건데…….”

“돌아보니 그게 정의더라고.”

그가 그녀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대단한 신념을 앞세우며 설치는 것보다,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원칙에 따라 일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

“…….”

“유진, 기다릴게.”

그녀는 자신의 뜨거운 이마에 닿는 그의 차가운 입술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반신반의하며 날 받아들인 거 알아…… 너도 나만큼 나를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게. 아니, 평생 시큰둥해도 좋아. 내가 어쨌든 곁에 있을 테니까.”

유진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일단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고 아무래도 담당 대상과 이런 관계가 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그를 피할 수는 없었고, 또 그를 보면 심장이 반응할 정도로 설렜지만, 유진은 그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독신주의자였고, 리한을 볼 때 정말로 아직까지 타르안의 영향이 없는지 헷갈렸다.

일단은 아메탄에 무사히 돌아가고, 일상을 되찾은 다음 그 이후에 찬찬히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이 리한에 대해 많은 부분을 모른다는 것, 묻게 되면 서로가 난감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 깊숙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를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그녀 역시 마음에 걸리는 면들이 많았다.

“……돌아가면 어떻게 할까요?”

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단 체스트의 집은 나가야 하는데…….”

“둘이 살자.”

리한이 속삭였다.

“행정국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유진은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목이 메어 중얼거렸다.

“……리한, 수사국은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끊임없이 의심받고 심문에 응해야 해요. 사실, 당신은…… 생활비를 받는 1년의 기간이 끝나면 먼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사는 게 나아요.”

“상관없어. 다리미 같은 것도 물어보러 오던데 뭐든 다 말해 주지, 뭐.”

리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유진이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담당자가…… 단둘이, 같이 살아도 되는지, 애매해서…….”

“밤마다 림프를 쳐 줄게.”

그가 그녀의 볼을 가만히 감싸며 천천히 속삭였다.

“널 위해 노래도 만들어 줄게. 이제 사랑 노래도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형편없이 유치했던 축가 가사 말고.”

“……어…….”

“난 술을 잘 안 마시지만, 그래도 네 술은 좋은 걸로 사다 줄게.”

유진은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유혹하는 거예요?”

“눈치가 빠르네. 효과가 있을까?”

그가 나른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유진은 이런 건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어떤 여자가, 리한 카드민이 이런 표정으로 달콤하게 속삭이는데 고개를 저을 수 있단 말인가. 타르안이고 뭐고, 담당자고 뭐고 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가 말하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는 옛 기억이 그녀에게 너무 소중했다.

“같이 살자, 유진.”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유진은 얕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이게 사랑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더 이상 헷갈릴 여지가 있을까? 그와 함께 살고 싶고, 그를 어떻게 해서든 지켜 주고 싶고, 그의 유혹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리한.”

그동안 억지로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미뤄 왔던 자신의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으며, 그녀는 그의 손에 자신의 작은 손을 포갰다.

“얼른 나을게요.”

유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야 하루라도 더 빨리 가지요.”

장작불이 타는 소리와, 일렁이는 불빛에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까지 모든 것을 기억에 담고 싶었다.

“돌아가면, 수사국의 모든 심문에 동석할 거예요. 걱정 마요. 조금만 불합리한 짓을 해도 내가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그녀의 결연한 말에 리한이 결국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작고 약한 여자가 자신에게 해 준 모든 일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만일 유진이 그의 담당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수사국의 의심이 지긋지긋해 아메탄을 진작 떠났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또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들어가서 좀 쉬어. 저녁은 내가 할 테니까.”

리한이 몸을 일으키고 그녀를 번쩍 들어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다시 담요를 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같이 해요.”

“아니, 들어가.”

그가 그녀의 눈에 다시 한 번 입 맞추며 말했다.

“아픈 애 데리고, 또 다른 선을 넘을 것 같으니까.”

* * *

그날 밤, 리한은 잠을 자지 않고 혹시 모를 밖의 전투를 대비하여 창가에 앉아 있다가 유진이 끙끙대는 소리에 놀라서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에 다가갔다. 그는 허겁지겁 유진의 후드를 벗겼고, 땀에 젖은 은발 머리와 펄펄 끓는 이마를 발견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알고 있는 응급 처치를 모두 해 보았으나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억지로 먹인 약초조차 게워 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상태가 빠르게 악화된 것이다. 몸이 안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심각한지 몰랐던 리한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유진은 조금 있으면 나아진다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점점 더 상태가 나빠지는 것이 두 눈에 보일 정도였다.

리한은 조금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비를 맞아서 몸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피부에 열꽃이 피는 것을 봐서 단순한 감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의사에게 보이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으나 민간인들은 모두 학살당한 폐허와 같은 전쟁터에 의사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새벽녘에 멀리까지 나가 보아도 보이는 것은 반란군들의 군대뿐이었다.

“유진.”

“…….”

의식이 없는 유진이 추워하는 것 같자, 리한은 자신의 체온을 나눠 주기 위해 그녀의 옆에 누워 그녀를 꼭 안았다. 작은 유진의 몸이 폭 파묻혔다.

“……아프지 마.”

“…….”

“너무 무서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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