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127/256)

  

37화.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루벤은 다니엘의 생각을 읽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무릎을 쳤다.

“아, 그래. 산하기관이 있었지……. 그 생각을 못했군. 그러면…… 무조건 국가에 충성하게 만들 수 있지…….”

“사실 아셰가 해 준 얘기에서 힌트를 얻었어. 위기가 닥치면, 이브나 왕비를 내세워 개혁을 단행했던 카를 왕의 흉내를 내 보라던데.”

루벤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셰라면 그들의 또 다른 배다른 동생이었다.

“걘 그냥 갇혀 있는 애야. 너희 둘이 친했던 건 알지만 사사건건 말하는 건 형제라도 좋지 않아. 왕은 철저하게 외로운 지위니, 피가 섞였어도 완전히 믿지 마.”

“그럼 형은 믿어도 돼?”

다니엘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루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막 예상하지도 않은 왕위에 오른 다니엘은 루벤이 보기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아직은 꽤 무른 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수사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리한 카드민의 신변을 보호해 준 일은 분명히 인도적이고 자비로웠으나 루벤은 그런 일들이 꼭 나중에 뒤통수를 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뭐가 되었든 국익이 우선이야. 스타람이든 제국이든 남의 나라 좋은 일을 해 줄 여력이 없어. 형, 제국마저 공화주의가 휩쓰는 와중에 아메탄 왕국이라고 다를까? 국민들은 배가 고프면 다른 생각을 하게 돼. 어떻게든 국가가 필요하다는 인상을 줘야 해. 공화주의의 싹을 잘라 버리려면 다른 지도자를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루벤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다니엘은 말을 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전화위복으로 만들어야 해. 이럴 때일수록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체계적인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줘야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개방이 아니라 개혁이야. 스타람은 필요 없어. 그들의 기술이 필요할 뿐이지.”

“어쨌든 아메탄은 마력 기반 위주의 사회고…… 에이 씨, 젠장!”

루벤은 천천히 조언해 주는 착한 형의 노릇을 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자신의 분에 받쳐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래! 해! 빌어먹을 정도로 좋은 생각이야. 전기를 연구하는 산하기관을 만들자, 이거잖아? 스타람도 엿 먹이고, 제국의 그 공화주의자 놈도 엿 먹이고, 적재 적시에 개혁을 단행한 훌륭한 왕으로 역사에 남으면 되겠어. 그리고 난 적격자도 알아.”

“……적격자?”

루벤의 날카로운 푸른 눈이 잠시 번득였다.

“10년 전에는 왕립마법대학에서 전기공학도 선택 과목이었거든. 그때의 객원교수님과 종종 연락했지. 체스트 카티라고, 나이가 좀 많은데 아직 정정해.”

“형이…… 연락하는 교수님도 있어?”

다니엘의 미심쩍다는 표정에 루벤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야, 난 그러면 안 돼?”

다니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어.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게다가 교수님이 형한테 왜 연락을 해?”

“그럴 사람이 왜 아니야?”

“형의 대학 학점을 본 적 있는데.”

“……그거랑 이건 별개일 수도 있는 거야.”

“대체 어떻게?”

“내가 학점으로는 표현되지 않을 정도의 모범생이어서 자주 보고 싶은가 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동생의 단호한 말에 루벤은 짜증난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대며 못마땅한 표정을 잠시 지어 보였지만, 종내에는 씩 웃으며 낮게 말했다.

“동생아.”

“왜?”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 * *

자고 일어났을 때 유진은 몸 상태가 훨씬 더 악화된 것을 알았다.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니었고, 리한이 밤새 자신의 모든 옷을 덮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내색하지 않고 일단 일어나 씻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잠시 밖의 상황을 살펴보고 온다던 리한이 돌아왔다.

“저 밑에 반란군들이 벌떼같이 이동 중이더군. 우리와 반대 방향이긴 해.”

“그럼 아메탄 쪽에서 오는 거예요?”

“……엿들어 보니 이단 황태자의 군대들인 것 같아. 아예 이단 황태자를 임시 총독으로 해서 공화주의 정부를 공식적으로 세웠대. 얼마 전에 공화 혁명을 대대로 선포했잖아.”

“남의 나라 일이지만…… 참 시끄럽네요.”

유진은 창백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단 후드를 뒤집어썼다.

“아메탄은 평화로웠으면 좋겠는데…… 워낙에 약소국이라, 주변에 휘둘릴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러게.”

그가 유진을 훌쩍 안아 말에 태우고, 고삐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네 조국이니 언제나 안전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망명한 나라기도 하잖아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조용한 나라를 선택한 것뿐이야. 하지만 네가 있으니 앞으로 계속 아메탄에 살아야겠지.”

“계속……이요?”

“어.”

“…….”

“헤어질 생각하지 마.”

그가 유진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안 놔줄 거니까.”

유진은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담뿍 받을 때마다 아직은 마냥 좋다기보다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주목받는 것조차 싫어하는 조용한 사람인데 비해, 리한은 전 대륙에 영향력이 상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리한 카드민이라는 사람이 대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한, 근데…… 사실 더 대단한 여자들도 많잖아요? 나보다 예쁜 여자라든가, 나보다 권력이 더 센 여자라든가…… 리한은 마음만 먹으면 더 좋은 여자들 실컷 만날 텐데 왜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좋아요?”

“너 안 평범해.”

리한이 피식 웃고는 말의 옆구리를 찼다. 저녁 동안 실컷 쉰 말이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에 후드 속의 은색 머리가 휘날렸다.

“네가 딴생각할 때마다 천천히 말해 줄게.”

그럼에도 생각이 많은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그가 속삭였다.

“넌 무슨 생각해?”

“담당자가 특별 관리 대상과 다른 관계를 맺어도 되나, 안 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좋을까…….”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문서가 아닌 생각이 계속 돌고 도는 중이니 좀 기다려요.”

* * *

새로운 산하기관이 생긴다는 것은 10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다니엘은 처음에 귀족들의 반발을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기존 산하기관의 반발이 거셌는데, ‘기술국’이라는 새로운 기관이 자신들의 가치를 떨어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맞는 수준’이라며 무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마력이 사라졌던 그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국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어떠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안이었다. 원래 왕립마법대학과 연계되어 인재를 길러 낸다는 취지에 알맞게 왕립마법대학에서 ‘기술학’이라는 과목이 정식적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기술국장이자 기술학 교수를 겸임하게 될 최초의 직원은 10년 전 선택 과목이었던 ‘전기공학’을 가르쳤던 객원교수 체스트 카티가 되었다.

“아메탄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스타람처럼 또 다른 전기 기술을 발달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제게도 없고요.”

체스트는 다소 부담스러워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며 그 자리를 수락했으나,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말했다.

“연구 인력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다니엘은 왕가의 지원을 약속하며 필요한 것들을 말해 보라고 했는데, 체스트가 요구한 것은 합리적인 범위였지만 조금 난감한 종류였다.

“연구할 샘플…… 그러니까…… 조금 참고할 만한…… 스타람 물건들이 필요한데…….”

“아하, 베낄 만한 스타람 전기 물품들이 필요하단 말이지?”

신중하게 말을 아끼는 다니엘에 반해, 루벤은 키득거리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몰래…… 가져올 수 있을지…….”

“이미 다 몰래 들여오고 있는데, 뭘.”

루벤이 별 문제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불편한 진실을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루벤밖에 없었다.

“그 수많은 밀수품들 이용하면 되는 거 아냐. 수사국에 의뢰해서 다 대라고 해. 감투 하나 씌워 주고, 수배 풀어 주면 그놈들이야 다 협조하겠지. 그토록 신분 체제를 흔들고 싶어했는데, 다들 이참에 한탕 하도록 눈감아 줘.”

“아…….”

“체제 전복은 무슨. 그냥 지들이 잘살고 싶었던 거겠지. 하여간에 진심도 아닌 그럴싸한 명분 갖다 붙이는 건 위나 아래나…….”

루벤이 더 험한 소리를 하기 전에, 다니엘이 그의 말을 가로막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제부터 스타람에 아메탄의 돈은 한 푼도 들어가게 할 수 없습니다. 스타람 것들을 참조하니 시간이 더 빠르겠지요? 그리고 아메탄 왕가의 이름으로, 산하기관의 고유 기술인 것처럼 배포합니다. 약제국에서 발표하는 신약처럼 말이죠. 먼저 상도덕을 어긴 건 스타람이니, 우리도 역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 * *

말을 많이 달리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비가 쏟아졌다. 그들은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어쩔 수 없이 산 중턱에 있는 폐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꼭 짜다가 먼지가 쌓인 부엌살림과 저장 식품을 발견했다. 리한 역시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난 흔적이 역력한 집 안을 살펴보며 일단 유진이 쉴 침대부터 정돈했다.

그녀가 아궁이를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마력을 모아 불을 피웠다. 일렁이는 불빛을 보며 앉아 있는 그녀의 옆으로 리한이 다가왔다.

“……이런 아궁이, 엄청 오랜만이네요. 옛날에 우리 고향 집에서 쓰던 건데. 시골엔 마력 아이템이 비싸서 잘 못 쓰거든요.”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감싸며 리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몸이 왜 이렇게 차지? 왜 이렇게 덜덜 떨어?”

“비 맞아서 그렇죠, 뭐. 불 쬐면 괜찮아져요.”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지만, 리한은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몸에 둘렀다. 어린애가 뚱한 표정으로 이불 속에 폭 파묻힌 것 같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진은 불만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툴툴거렸다.

“이게 웃겨요?”

“그냥 널 보면 웃음이 나. 귀여워서.”

“원래 잘 웃잖아요.”

“달라.”

그가 그녀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하며 말했다.

“난 누군가의 호감을 얻는 게 직업이었어. 누가 날 좋아하게 하려고 습관적으로 웃는 거야. 호웰처럼 원래 애교가 많은 성격이 아니니까.”

“흠.”

“근데 널 보면 좋아서 웃는 거야.”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넌 호웰 얘기 나올 때나 웃지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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