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왜 그래요…….”
그녀가 그의 눈을 억지로 피하며 중얼거렸다. 일어나 앉으니 세상이 더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어쨌든 당신은 수사국의 의심을 받는 사람이에요. 평범한 나를 유혹해서 멋대로 이용해 먹을 수도 있는, 매력이 넘치는 남자기도 하고요.”
“유진 유니트.”
“…….”
“네게는…… 그런 것 못해.”
“그만해요.”
“차라리 날 거절해. 그만해라, 이만 가자, 선을 넘지 마라, 이런 말 하지 말고, 리한 카드민이 남자로서 마음에 안 든다고 딱 잘라서 말해.”
유진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초점 잃은 눈을 보며 리한이 다시 말했다.
“……나는 널 좋아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선을 넘지 않으려고 무던히 생각을 지워 왔는데, 또 어떻게 보면 이 선에서 멀어지기 싫어 가슴 졸였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브와 비교되기 싫어 생전 입지 않던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받았던 그 순간부터, 유진은 자신도 그 선을 이미 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그립지 않아. 유명세도, 음악도, 미안하지만 타르안도, 스타람도, 아무것도 그리운 것이 없어. 그래서 실패한 생애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유진의 눈에 이상하게 눈물이 고였다. 문득 그녀가 밀수품을 뺏기고 텅 빈 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밤, 림프를 들고 찾아온 그가 떠올랐다. 그 어떤 화려한 무대보다도 그녀의 가슴 깊이 남은 싸구려 림프의 선율이 생각났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똑같은 순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네 덕분에 그리운 시절이 생겼어.”
유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리한이 그녀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런 말을 이런 곳에서 하는가.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말을 달리느라 바람에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이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황량한 주변 풍경에는 아무도 없고, 그래서 그리움을 말하는 그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네 친구와는 달라서…… 침묵은 여기까지가 한계야.”
“…….”
“유진, 차라리 지금 날 거절해. 그렇다면 난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이라도 할 테니까. 우리 이제부터 계속 단둘이 있어야 해. 지금 또 애매하게 넘어가면 난 계속 널 불편하게 할지도 몰라.”
“차라리…….”
유진은 주르륵 흐른 눈물을 닦고 중얼거렸다.
“차라리 대놓고 유혹을 하지 그랬어요. 당신처럼 잘생긴 남자가, 눈웃음치며 유혹하면 내가 산하기관 직원으로서의 사명감으로라도 참을 텐데…… 왜 이렇게 진심같이 얘기를 해요?”
“진심이니까.”
그가 속삭였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해 보였고, 이상하게 스산해 보이는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유진은 그의 눈에서 불안을 보았다.
“진심이라서 웃음 같은 건 안 나와.”
“…….”
“거절해 줘, 유진. 그냥 내가 싫다고.”
유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사실 몸이 좋지 않았다. 최대한 아픈 기색을 숨기고 있었지만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난 어떤 여자가 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어서…… 네가 직접 말해 주지 않으면 혼자 포기하기에는 어려워.”
어지러워서 그런가. 유진은 왜 지금 이 시기에 이상한 말들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후회할 일 하나 정도는 해 보는 게 어떻겠니. 늙은이의 주제넘은 말이지만.’
후회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수사국의 의심을 받고 있는 남자, 저스틴이 공화주의자가 분명하다고 장담한 남자, 그녀의 담당 업무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직까지도 그를 좋아하는 건지 타르안을 좋아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타르안을 해체시킨 장본인이라서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애증이 남아 있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마음에 들면 한번 해 보는 거라고요.’
이성적으로 안 된다고 분명히 생각하고 있는데 이렇게 망설이는 건, 결국 본능 때문인가. 노엘이 끌어안았을 때에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던 그녀의 심장이 이미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오는 길에 보았던 수많은 시체들을 떠올렸다. 이곳은 어쨌든 전쟁터고, 언제든 죽을 수 있었다. 말 좀 탔다고 몸 상태가 엉망진창인데, 만일 내일 죽는다고 하면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내가 키스해도 별거 아니야?’
그 어느 날, 그녀가 선을 넘지 말라고 했던 그 경고를 떠올리며,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 그 말을 들었을 때 선택하지 않았던 길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그 지점에 왔고 그녀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또다시 이 자리에 돌아올 것 같았다.
“유진.”
그가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네가 그렇게 말을 못하면…….”
“…….”
“나 좋을 대로 생각할 거야.”
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온몸의 피가 뜨겁게 돌았다.
“싫으면 피해, 유진.”
그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이제 가까이 있었다. 유진은 그의 파란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땅을 짚은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피하지 않으면…… 나는…….”
유진이 가만히 눈을 감자, 리한이 그대로 그녀를 꽉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떨리는 입술을 맞췄다. 입술이 맞닿을 때까지는 꽤 오래 걸렸지만, 그가 한 번 깊숙하게 혀를 밀어 넣기 시작하자 오랫동안 갈망했던 만큼 키스가 깊고 격렬해졌다. 어쩌면 이 순간이 서로 두려워 본능적으로 눈을 피하던 그 모든 나날들이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그들의 달뜬 숨이 섞이고, 리한의 풀린 눈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유진은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그가 살짝 웃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입을 맞춰 왔다.
유진은 숨이 막혀 캑캑댈 것 같았지만 그녀를 감싸 안는 거대한 체격이 좋아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오한이 드는 와중에 그의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런지 손끝까지 열기가 퍼져 나갔다.
“사랑해, 유진.”
그가 그녀의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너는…… 너는 내 구원이야.”
* * *
마력이 사라진 일주일간 아메니티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간단한 마력 아이템도 작동되지 않아서 기본적인 생활이 몹시 불편해졌고, 귀족들은 물론 산하기관 직원들의 업무도 모두 중지되었다. 다행인 것은 차차 마력이 돌아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는데, 일주일 뒤 결국 모두 회복된 마력을 느꼈을 때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동안 그 불안함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었다.
스타람의 밀수품인 ‘전등’이 암암리에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그 때였다. 문제는 ‘전등’의 불을 켜기 위해서는 훨씬 더 비싼 ‘배터리’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는데, ‘배터리’는 스타람에서도 아직 개발 중인 것이라고 했다. 아메탄 왕국에서는 전기를 쓸 수 있는 발전소가 없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른 채 마력이 사라진 일주일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은 ‘혹시 또 몰라’라는 불안감에 하나둘씩 고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스타람의 전기용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전기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밀수꾼들이 ‘배터리’든 ‘전기’든 추후로 가져올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고급 마력 아이템에 익숙한 귀족가일수록 더 심했다.
국가 차원에서, 제국의 2황자를 잠시 보호하고 있었다고 발표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다니엘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다시는 제국의 황족을 아메니티에 들이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일반 국민들이 알 리 없었다.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제 드디어 갑자기 고갈되는 시점이 왔다는 예측이 대다수였다.
“결정해.”
루벤은 잔뜩 굳은 동생이자 국왕,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원래 경어를 쓰는 것이 예법에 맞았으나, 다니엘은 둘만 있을 때에는 예전처럼 대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루벤은 그 말에 거절 한 번을 하지 않고 바로 말을 놓았다.
“밀수꾼들 배나 불려 줄 셈이야? 제대로 작동되지도 않는 물건들을 팔기도 한다는데. 제국은 자기들 일로 바쁘니 신경 꺼도 돼. 자기 아들이 공화주의 국가를 세우겠다고 저 난리를 치는 판에…….”
아메탄의 국왕 다니엘은 아직 젊었고, 게다가 확실한 기반도 없었다. 그래서 결정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제국과 스타람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오랫동안 왕위를 준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정책 결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루벤은 시원스럽게 말했다.
“이 기회에 스타람과 정식으로 교역을 시작해. 전기가 천박하다는 건 그저 관념일 뿐이니까. ‘킹’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언제든지 내가…….”
다니엘이 형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스타람과 교역하면, 달라질까?”
“…….”
“우리의 물건은 스타람 사람들에게 소용이 없어. 스타람 사람들이 만든 걸 정식으로 수입하기 시작한다면…… 결국은 또 족쇄가 될 거야. 일단 ‘전기’를 만들기 위해 기술자들을 초청하면 수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할 거고, 그들이 핵심 기술을 가르쳐 줄 리도 없겠지. 이 일의 배후에는 당연히 리한 카드민과 2황자, 그리고 스타람이 있을 거야. 자신들의 물건을 팔고, 우리는 돈을 일방적으로 지불하고, 그게 경제적 식민지와 뭐가 달라?”
다니엘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정작 왕자일 때 그의 편을 들어준 사람들 중 아무도 믿을 수 없었는데, 오히려 왕위를 놓고 경쟁했던 형 루벤만은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자신과 반대로 개혁적인 성향을 가져서 그런지, 그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조금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맨 처음 산하기관이 만들어질 때…… 반대가 몹시 거셌다고 들었어. 평민에게 국가의 일을 맡기고, 귀족과 준하는 대우를 해 준다는 걸 모두가 비웃었지.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근본도 없는 천한 규율이 생길 것이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산하기관이 창출하는 가치가 어마어마하잖아. 세상에 맞추어 산하기관도 변해야 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