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125/256)

  

35화.

“그래, 그래. 혹시 말 탈 줄 알아?”

“……아뇨.”

그녀가 머쓱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배울 자신도 없어요. 전 몸 쓰는 건 다 못해요.”

“예상하긴 했어.”

그가 호위 병사단에게 말해 말 한 필과 갑옷, 활과 검까지 받아 오는 것을 유진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생각해 보니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둘이 이동한다고 했던 건, 그가 제국을 떠나오기 전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유진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했던 말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그녀의 파리한 손목에 감춰진 외교국 징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이게 나를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나…… 저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결국 리한에게 목숨까지 맡기는 걸까……. 생각이 복잡한 와중에 리한이 그녀에게 망토를 둘러 주었다.

“여길 밟고 올라타. 처음엔 좀 무서울 거야.”

유진은 난생처음 말에 올라탔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뒤로 리한이 훌쩍 뛰어올라 단단히 고삐를 잡았다.

“실컷 달리면 길어야 나흘 안에는 아메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올 땐 짐도 많았고, 또 마차로 왔으니까. 고생스러워도 빠르게 가자.”

“네.”

제국군에게 출입증을 보여 주고, 나갈 수는 있게 해 주겠지만 다시 들어올 수 없다는 으름장을 듣고, 철저히 몸수색을 당한 후에야 그들은 반란군이 진을 치고 있는 쪽의 반대편인 험준한 산지로 연결된 성 밖으로 몰래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새삼 유진은 자신의 목숨이 리한에게 달렸고, 이 귀환 길에서 자신은 리한에게 방해가 되었으면 방해가 되었지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말을 타는 순간부터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 * *

리젠은 눈을 뜨고 나서 한동안 캄캄한 어둠 때문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약제국에서 혼자 야근을 하다가 잠들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왜, 왜 이렇게 캄캄해?”

그녀는 어둠에 좀처럼 눈이 적응되지 않자, 램프를 켜려고 손을 들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그녀가 퍼뜩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램프에서 손을 치우고, 바로 불을 피워 보려고 했지만 그만큼의 마력도 없었다. 의식하고 보니 공기 중에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창문에 들어오는 달빛뿐이었다. 그녀가 후다닥 달려가 창문에 매달리고 나서, 충격에 휩싸여 말도 안 나오는 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아메탄의 불빛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특히나 왕궁은 항상 마법으로 밝혀 낸 빛의 꽃들이 떠다니며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특징인데, 아무런 빛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주 간단한 마법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리젠!”

약제국의 문이 벌컥 열리고 그녀의 남편, 카이든이 뛰어 들어왔다.

“다행이다, 여기 있었구나.”

그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리젠이 얼떨떨해서 물었다.

“뭐야? 왜 이래? 언제부터 이랬어? 마력이 하나도 안 느껴져. 무슨 일 있어?”

수사국 출신의 남편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그녀의 질문이 쏟아졌다. 카이든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게 다야. 아메니티에 마력이 사라졌어.”

“뭐? 대체 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야.”

“마력이 이렇게 갑자기 사라진다는 게 말이 돼? 아무리 마력이 고갈 중이라지만, 어차피 우리는 공기에 떠도는 마력 중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해. 그런데 지금…… 정말 하나도 없어. 이렇게 하루아침에 완벽하게 사라질 수는 없어. 제국의 황제가 여기 있지 않은 이상…… 여기가 스타람도 아니고…….”

달빛에 비친 카이든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가 한숨을 쉬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황자는 있었어.”

“응?”

“제국의 황자는 아메니티에 들어왔었다고. 바로 지금까지. 일반인에게는 절대 알리지 않은 비밀이지만…….”

카이든이 검은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제국의 2황자, 이단이 얼마 전 리한 카드민과 함께 몰래 입국했어. 바로 보호 요청을 했지. 전하는 그 보호 요청을 비밀리에 받아들이고, 그는 오늘 제국으로 다시 떠났어.”

“2황자가 여기 왜 와?”

“……반란군의 우두머리거든. 곧 임시 총독으로 발표가 날거야.”

리젠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제국으로 다시 떠나고 난 뒤, 반란군과 합류하여 지금 공화정 임시 정부를 완성했어. 그리고 떠나면서 아메니티의 마력을 모두 앗아 갔지. 황제의 핏줄이니 마력을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대체 왜?”

“우리도 몰라. 지금 다니엘 전하는 몹시 자책하고 있어. 그대로 제국에 넘겨 버렸어야 했다고…… 어떻게 보면 우린 배신을 당한 것이고, 전략의 일부라면 넘어간 거지. 마력이 이렇게 완벽히 사라지면 당연히 아메니티는 혼란에 빠질 테니까.”

“……그래도 황제의 핏줄이 앗아 간 마력이면, 시간이 지나고 돌아올 수도 있는 거잖아. 스타람 섬처럼 아예 저주를 내리지 않는 이상…….”

“가능성일 뿐이지.”

그가 무력한 듯 창문 밖의 커다란 달을 바라보았다.

“당장 마력이 없으니 내가 수사국 직원인지도 모르겠어. 약제국까지 올 때 그냥 두 다리로 뛰어올 수밖에 없었거든. 마력이 고갈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인위적으로 뚝 끊기게 될 줄은 몰랐어. 우리는 아직…… 모두가 마력이 없는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

* * *

생각보다 말을 타는 것은 체력을 많이 요구하는 일이었다. 유진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는데, 그 와중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군인들의 시체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맨 처음 시체를 보았을 때 유진은 마치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이 배 속에서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제국까지 오는 길에는 계속 마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끔찍한 풍경을 보지 못했다. 폐허가 된 마을에 토막 난 시체가 나뒹굴었고, 짐승들이 몰려들어 그 시체를 뜯고 있었다.

“유진, 그래도 먹어야 돼. 먹어.”

숲속 연못에서, 리한이 말에게 물을 먹이며 유진에게 건빵을 건넸다. 유진은 물만 조금 마시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체를 많이 봐서 그런지,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아니면 말을 타는 것이 힘든 건지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떨렸다. 리한이 주위를 둘러보고 베리류의 열매 하나를 따서 그녀의 입에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유진이 한숨을 쉬며 받아먹었다.

리한은 이 속도로는 나흘은커녕 엿새도 넘게 걸리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유진의 체력이 형편없음을 감안할 때 어쩔 수 없다고 이미 체념한 상태였다. 유진이 힘없이 나무에 몸을 기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는 자신이 나무에 기대어 앉고 망토를 바닥에 깐 뒤 자신의 무릎에 대고 유진을 눕혔다.

“……자꾸 머리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서…… 게다가 시체를 보니 속도 안 좋고…….”

“말을 처음 타는 데에다가 험한 길을 달려서 그래. 좀 쉬었다 가.”

“……죄송합니다.”

새 소리만 울릴 뿐 정적이 흘렀다. 리한은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무릎 위에 흐트러진 그녀의 은발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유진.”

“네.”

“누구나 나를…… 아메탄 왕국에 해가 되는 사람이라고 의심하는데, 넌 아니야?”

“그냥 생각 안 하는 거예요.”

그녀가 눈을 감은 채 힘없이 말했다. 성의 없는 대답에 리한의 말문이 막혔을 무렵, 유진이 대뜸 물었다.

“이브의 일…… 알고 있었어요? 리한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거?”

“당연히 몰랐지. 그렇지만 놀랍지는 않았어.”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악기 다루는 실력이 그저 그랬거든. 조금만 변주를 시켜도 잘 못하고.”

“……저는 몰랐어요. 전혀. 같은 방을 쓰고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도.”

유진이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뻔히 알 만한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이라…… 조금의 의심도 안 했고, 심지어 휘둘리기까지 했어요.”

“……작정하고 속인 건데, 뭐.”

“저는 뭐…… 늘 그랬어요. 대학 시절 사귀었던 전 남자 친구가, 제 평민 신분을 싫어했다는 것도 사귀는 내내 몰랐었거든요.”

“…….”

“노엘이 그렇게 오랫동안 저를 좋아해 왔다는 것도 상상조차 못했고…….”

그녀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일부러 뭔가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도 엉망진창으로 생각해 버리는데, 뭘 또 기를 쓰고 의심하려고 하겠어요. 그냥 제 자리에서, 제 책임에 있는 일들만 묵묵히 제대로 해 나가는 것만 해도 버거워요. 일하는 건 싫지만, 그래도 문서를 다루는 행정국의 업무가 제게 적성에 맞는 이유기도 하고요. 사람의 생각은 너무나 변덕스러운데, 문서는 믿을 수 있으니까. 나 자신은 슬쩍슬쩍 규칙을 어겨 왔지만, 문서는 숨길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투명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행동을 해도 근거가 있으니 후회할 일이 없고, 그래서 마음이 놓여요.”

묶인 말이 푸르릉, 하고 한 번 울었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아메탄 왕국의 해가 되는 인물이었다면 수사국 사람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긴 해요.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전투가 일어나자마자 냅다 아메탄으로 출발하자고 결정한 것 같기도 하고.”

“…….”

“당신과 황제 폐하와의 대면이…… 나도 불안했으니까.”

말하다 보니 머리가 더 어지럽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게 되었다. 유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무력해요. 문서 밖의 상황에서 당신을 구해 줄 수 없어요.”

“…….”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던 유진이 고개를 슥 돌려서 리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믿지는 않아도 믿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어…….”

리한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대체 왜 날 구해 주고, 믿고 싶은 거지?”

유진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편두통을 무시한 채 차분하게 말했다.

“출발할까요? 저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요.”

“말 돌리지 마.”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너 알고 있잖아.”

“…….”

“내 마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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