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124/256)

  

34화.

리한은 문구 하나하나에 기 싸움을 하는 유진과 루티의 대화를 귓등으로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귀국해도 괜찮다는 문서를 받아 내야 한다는 유진이나, 그 문서에 쉽게 사인해 주지 않는 루티나 리한의 눈엔 똑같이 보였다. 유진은 다시 받은 종이에 기어코 마법으로 희미한 행정국의 서식을 불러와 또박또박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관련, 제국 특별 공연. 사안, 전투를 포함한 위험 요소 등이 판단되면 악단과 호위병은 약속된 공연이 끝난 이후 조기 귀국할 수 있다. 기간, 오늘 날짜가 뭐였죠?”

문서를 만지는 사람들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 국가를 막론하고 저렇게 집착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그가 복도에 지나다니는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살기에 민첩하게 주저앉았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단검이 휙 지나가 벽에 꽂혔다. 첫 번째 공격은 기습이었어도 두 번째 공격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격자를 발견하고 손에 든 두 번째 단검을 발로 찼다.

“젠장!”

공격자가 재빨리 빙글 돌아 손끝 사이에서 침을 던졌고, 리한은 급한 대로 바닥에 나뒹굴던 그림 액자를 방패 삼아 막아 낸 후 그대로 공격자에게 내리꽂았다. 결국 행정식 서식을 완벽하게 지킨 데다가 루티까지 사인한 문서를 들고 방문을 나오던 유진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브!”

머리를 높게 묶은 이브가 살기 어린 눈으로 리한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리한은 날렵하게 피하며 굴러다니던 대걸레 막대를 집어 그녀의 허리를 세게 쳤다. 휘청이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유진, 물러서!”

리한은 악력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은 뒤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팔을 잡아 그대로 그녀의 입에 물렸다.

“스타람이지?”

이브는 숨이 막혀 컥컥댔다. 리한이 그녀의 숨통을 강하게 조이며 살벌하게 한 번 더 물었다.

“아카날이 보냈어?”

그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리한이 한 번 더 벽에 대고 그녀의 몸을 쾅, 하고 쳤다.

“제국 공연도…… 아카날이 배후에 있나?”

유진이 조심스럽게 리한의 뒤에 서서 이브를 바라보다가, 놀란 듯이 입에 손을 갖다 댔다.

“리, 리한…….”

“왜?”

유진은 그녀의 손목에서 옅게 빛나는 수사국 징표를 확인했다.

“수사국 사람이에요…….”

* * *

이브는 원래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명령받은 대로 리한을 처치하려고 했다. 전투 중에 몰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지원군은 그 어떤 반란군도 마주치지 않았고, 너무나 평화롭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반란군은 애초부터 마력을 다 소모하고 온 황제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애초부터 그들은 임시 총독의 발표를 위해 황제의 발을 묶어 놓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 수가 많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성에 도착하자, 이브는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리한을 유혹하여 단둘이 있는 자리를 만든다는 작전이었고, 몸이 달아오른 철없는 귀족 아가씨를 연기하는 것까지는 훌륭하게 잘 해냈다. 

그러나 이브의 눈에 유진은 생각보다 방해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리한을 며칠간 관찰하면서 느낀 것인데, 그와 유진은 항상 서로를 시야에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진만큼은 완벽히 속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한이 묘하게 유진을 신경 쓰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유진을 다른 남자와 붙여 두면 홧김에 자신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했다.

그러나 결국 둘만의 자리를 만들 수는 없었고, 황제가 내일 리한을 단둘이 만나자고 제안을 했을 때 그녀의 마음은 급해졌다. 수사국장님이 직접 내린 명령은, 리한이 황제에게 가서 헛소리를 하기 전에 처치하라는 것이었다. 리한은 반란군을 도운 것이 확실한데, 거기에 아메탄 왕국 또한 관여되었다는 것까지 말해 버리면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이라고 했다.

이브는 기습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진과 리한을 찾느라 한참 다른 곳을 헤매다가 뒤늦게 미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유진의 내일 아침에 떠난다는 결정을 듣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내일 저녁에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어떻게든 영원히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 거의 없으니 수사국의 비기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리한이 생각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체술이 뛰어났다.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반응 속도였다.

유진에게 수사국의 징표를 보여 준 것은, 같은 산하기관 직원으로서 대화를 청한 것이었다. 징표를 보자마자 유진은 리한에게 그녀를 풀어 줄 것을 요구했고, 그 혼란 속에서 둘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왕명입니까?”

“아닙니다. 수사국 독단입니다.”

유진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남자를 ‘자빠트린다’느니, 귀족들 사이에서 리한과 누가 먼저 자는지 내기했다느니, 시집갈 나이가 어떻다느니 떠들던 철없고 발랑 까진 귀족 아가씨는 온데간데없고, 차분한 표정으로 필요한 말만 간략하게 하는 전형적인 수사국 직원이 서 있었다. 

리한과의 대치로 인해 몸 상태가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허리를 붙잡은 채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수상한 점이 많은 외국인이라,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 전 사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아메탄 왕국에 약점이 될 만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신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송하지만 수사국의 명령에 협조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유진은 전혀 다른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 없어 외모는 바꾸지 못했을지라도 어차피 이브라는 이름도 가명이고, 신분이며 나이 등등 모두 다 거짓일 것이다.

“행정국장님의 직권 명령도 없었고, 제게는 신변을 보호하라는 왕명이 우선이어서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유진 유니트의 협력을 배제한 것입니다. 다만…….”

이브가 미련이 남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보셨겠지만 리한 카드민은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노래를 절대 못 부른다고 우기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아무리 제가 마력이 없다고 해도 수사국 사람인데, 순식간에 제압당했지요. 이건 수사국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고,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

“그리고 하나 더. 지금까지 며칠간 제가 정체를 숨겼는데, 기습할 당시에 제 얼굴을 보고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이런 기습이나 암살을 대비하는 데에 익숙해 보였어요. 그냥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는 가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살려 놔서 좋을 것이 하등 없습니다. 게다가 전적이…… 아카날 총통을 대놓고 지지했고, 공화주의에 대한 책도 쓴 사람이에요.”

“이브.”

그녀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리한이 수상하다는 얘기는, 그를 담당한 다음 날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소리예요. 그러나 내게 온 문서나 명령이 없어요. 저한테는 ‘특별 관리 대상 외국인’을 담당할 것과, 그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왕명만이 명확하거든요. 정말로 제게 도움을 바라거든 공문을 주세요. 공문만 주시면 저는 제 방도 자진해서 수사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랍니다.”

“…….”

“제게 어떤 행동을 원하신다면 근거가 되는 서류를 들고 와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니까요. 전 제 자신도 못 믿는 사람이라, 사람의 판단은 못 믿어요.”

유진이 그녀에게 서류를 하나 건넸다. 아까 루티에게서 받아 낸 공증서였다. 전투 발생 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판단되면 원할 때 조기 귀국해도 된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다 같이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 공증서를 가지고, 내일 아침 악단과 호위단을 챙겨서 아메탄으로 떠나요. 남의 전쟁에서 개죽음당할 수는 없으니. 리한의 말로는 성을 포위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별로 많지 않대요.”

말을 하고 나니 유진은 점차 더 리한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밖의 상황이 짐작도 안 되는데, 리한은 그 수가 적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총이라는 이상한 무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리한과 다른 사람들을 섞을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 혼자 책임지고 끝내야 했다.

“다 같이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리한과 나는 따로 들어갈게요. 이 사달이 났는데, 당신이 리한의 목숨을 다시는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산하기관 직원이, 그것도 수사국 사람이 하나 있으니 나머지 사람들을 맡기는 데에 부담이 없군요.”

“둘이 간다고요? 유진, 위험해요. 호위단과 함께 움직여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전쟁터예요. 그리고 공증서도 나한테 준다면서요.”

“어차피 이 공증서는 행정국 서식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지금 제 자리에 그대로 생성되었을 거예요. 당신에게 줘도 사후 처리에는 상관없고…….”

유진은 한숨을 쉬며 손목을 들었다. 외교국의 징표를 살짝 빛내 보인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 쓸 줄은 몰랐는데…… 일단 이게 있으면 제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절 건드리면 이제 외교적 문제가 되니까요.”

* * *

새벽녘이 되자 공격이 좀 잦아들었다. 리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제국군이 이렇게 총에 무력할 줄은 몰랐군. 얼마 안 되는 인원인데 이렇게 쩔쩔맨다면 꽤 오래 걸릴 거야. 물론 마력이 좀 회복되면 황제가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규모긴 해.”

“……저희, 성을 나갈 수는 있을까요?”

“수가 얼마 안 되니 당연히 나갈 수야 있겠지. 나가서가 문제야. 밖은 그대로 전쟁터니까.”

그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말했다.

“유진, 그냥 너도 저 수사국 직원과 함께 가라고 하고 싶지만…… 그게 네게 더 안전한 선택인지 알 수가 없어.”

“저는 어쨌든 당신과 동행해야 해요.”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의 신변 보호 외에도, 위험할 때 동행하는 것도 저의 역할이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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