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123/256)

  

33화.

“음…….”

“밀수꾼들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이 안 돼.”

“며칠 전, 수사국 직원들이 밀수품이라고 하며 전기용품을 하나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집에 하숙하고 있던 리한에게 물어보니 다리미라고 하더군요. 그런 일상적인 물건이 한번 들어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지금이야 스타람 문화가 천하다고 멸시받아도…… 마력의 고갈 앞에 사실 결과는 명확하지 않나요.”

체스트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 자본의 신분 대체는 스타람에서 이미 벌어진 현상이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전기를 못 쓰지만…… 시간문제겠지요. 리한도 보냈는데, 전기 기술자 하나 못 보낼 이유가 뭡니까?”

“교역을 주장한 내가 민망할 판이야. 밀수로 판을 짜다니 겁도 없어.”

“……아메탄 왕국이 전기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천시한다고 해도……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제국의 반란군보다 더 급속도일지도 몰라요.”

루벤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체스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왕자님, 제 부족한 생각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일단 상대를 알아야 합니다. 뭘 알아야 대처를 하지요. 새로운 왕이 우유부단하게 아무 결정도 못 내리는 사이에 세상은 변하는 법입니다.”

“다니엘은 제국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일단 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아메탄은 지금 평화롭고, 당장 상황을 바꿀 유인이 없거든. 그래도…….”

그가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문가의 의견은 잘 알겠어. 일반인들에게 더 보급할 거라, 이거지…….”

체스트의 둥근 얼굴을 바라보며, 루벤이 덧붙였다.

“리한 카드민이라는 놈, 혹시 전기 기술자는 아냐?”

“아, 절대 아닙니다.”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혹시 몰라서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군요. 다만 간단한 집안일을 시켰을 때 칼 쓰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네. 가수라기보다는, 음, 무슨 군인 같던데…….”

체스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신중하게 말했다. 루벤은 신중하게 그의 오랜 스승을 바라보며 예를 갖추고 일어섰으나, 그녀의 집을 나서자마자 굳은 얼굴로 단정히 빗어 넘겨 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웃음기와 공손함이 사라진 그가 천천히 아메니티의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 * *

리한은 재빠르게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테라스의 사람들이 모두 다 뛰쳐나왔는데, 옷차림이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유진의 손을 붙잡고 1층 계단을 향해 뛰다가, 유진의 뜀박질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예 들쳐 안았다.

“악!”

유진은 작게 비명을 지르고 리한의 목에 두 손을 걸어 매달렸다. 1층 연회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굉음은 계속 해서 들리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군인들은 술에 취한 채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연회장 구석에서 만난 저스틴은 허둥지둥하며 소리쳤다.

“기습이래!”

“네?”

“반란군이야! 이 지역 반란군은 모두 소탕된 줄 알았는데…… 쥐새끼 같은 놈들이 어느새 와서 매복하고 있었다는군. 지금 성벽을 부수고 있다네. 전투가 시작됐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이 굉음들은 다 뭐지?”

“……총소리인 것 같군요.”

리한이 침착하게 말했지만 총이라는 무기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머지 악단 일행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유진을 천천히 내려 주었다. 그 와중에도 귀를 찌르는 것 같은 탕,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들어 보는 소리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저희는 군인이 아니므로 싸울 필요가 없지요. 지금 어차피 도망도 못 갑니다. 황제는 마법을 쓸…… 수 없나요?”

“이 지역 마력은 이미 고갈됐어. 그래도 황제의 제국군이 지키고 있는데 성이 함락되기는 어려울 걸세. 황제가 오기까지 기다린 걸 보면, 어차피 장기전을 각오하고 기습한 걸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제의 발을 묶으려고 한 것 같기도 해.”

“그렇다면 일단 우리는…… 방으로 돌아갑시다. 괜히 군인들 사이에 있다가 전투에 불려 나갈 수도 있어요. 남의 나라 전쟁에서 그럴 필요는 없죠.”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떠나는 걸로 해요.”

“뭐?”

“저희는 지원군도 아니고, 그냥 행사 지원으로 왔을 뿐이에요. 우리 악단과, 호위단만 챙겨서 떠나요. 애초에 약속했던 공연도 끝냈고, 목숨까지 걸면서 전쟁터에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전투가 언제 끝날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행사 담당자로 온 것은 유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결정을 직접 하는 것이 맞았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냉정하게 말했다.

“명령받은 것만큼만 일하자고요. 모두 짐을 싸고,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면 즉시 이동합니다. 저스틴, 악단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세요. 저는 호위단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호위단장이 어디 있는 줄 알고!”

저스틴이 발끈했지만 리한이 말을 막았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어쩌면 지금이 유일한 여유 시간일 수도 있어. 전투란 건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저스틴은 황망한 표정이었지만, 유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가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살 수는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혼란 속에서는 혼란을 겪어 본 자가 도움이 된다고 했던가. 그녀는 막연히, 이제는 리한에게 도움을 받을 일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뜀박질조차 느려서 그의 발목을 잡았던 그녀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 * *

방에 돌아갔는데도 이브는 없었다. 유진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채로 편한 옷과 신발을 갈아 신었다. 비명 소리, 멀리서 들리는 군가, 성벽을 쿵쿵 부수는 소리, 화살을 쏘는 소리, 탕탕거리는 불안한 소리들이 무섭게 공기 중에 떠다녔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지만, 일행 중 유일한 산하기관 직원으로서 침착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디 가.”

방문을 나서자 역시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리한이 그녀를 막아섰다.

“루티한테, 우리는 먼저 가겠다고 말하려고요. 어쨌든 우리는 민간인이고, 전쟁에 참여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호위단장님께도 말씀드리고…….”

“내가 갔다 올게. 다른 사람들하고, 여기 있어.”

“제가 책임 담당자예요. 제가 가는 게 맞아요. 게다가 문서를 받아야 해요.”

“그럼 같이 가. 혼자 못 보내.”

“……그러든가요.”

리한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유진은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성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목적지 없이 뛰어다녔다. 저 멀리서 횃불이 일렁거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이 서로 죽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몸이 벌벌 떨렸다. 다 각오하고 온 일인데도 두려웠다.

“유진, 무서워?”

“네.”

그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리한이 그녀의 손을 더 꼭 잡고 물었다.

“그냥 도망칠까?”

“네?”

“너 하나 데리고…… 아메탄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아. 보니까 수도 별로 없어. 성을 포위할 만큼의 인력도 안 돼. 저 따위 전술이라면 성을 함락하려고 온 군대는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난장판인 거죠? 저 소리들은 뭐고요?”

“총이라는 거야……. 스타람의 무기라, 아메탄 국민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가 도망치자고 한마디만 한다면…….”

“……안 돼요.”

“왜?”

“일 처리를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럼 모두 저희 책임이 돼요. 상호 협의된 방문이었으니 떠나는 것도 어쨌든 제국 측의 허락이…….”

“아니, 어차피 내일 아침에 떠날 건데 대체 무슨 허락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냥 도망가 버리면…… 너무 안 좋은 전례가 돼요.”

“뭐?”

리한은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정식 공문을 요구할 수는 없고, 제국 측에서 보내 줬다는 공증서 정도는 받아야죠. 그래야 예상과 다른 일정에 첨부할 수 있는 문서가 생기는 거니까. 안 그러면 예외 상황이라는 증명을 못하잖아요.”

“유진, 전투가 일어났고 넌 이렇게 떨고 있어. 근데 지금 무슨 문서 타령이야?”

“말도 안 하고 떠난다는 건 절대 안 돼요. 어쨌든 아메탄을 대표하는 공공적인 일이니까. 나중에 그때 떠난 것에 대한 근거를 요구하면 누가 책임지는데요?”

“우리는 전투 인력이 아니야. 무슨 책임이 있다고? 결국엔 종이 쪼가리밖에 더 돼?”

“어쨌든 국가와 국가 간의 일이고, 처음 세웠던 계획과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사실 제 잘못이에요. 전투가 벌어질 시, 판단에 따라 귀국할 수 있다는 조항을 애초에 넣었어야 했는데…….”

리한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저는…… 대학 시절 이성 교제를 금지한다는 학칙도 어기고, 나라가 금지하는 밀수품도 구매한,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은 직원이에요. 하지만 제 자신은 대충 살더라도, 문서는 대충 처리할 수 없어요. 기록이 남는 거라고요. 나중에 애매한 상황이 생겨서 갈팡질팡할 때 누군가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도 있단 말이에요. 말했잖아요. 문서는 헤매는 사람들의 길이고, 근거라고요.”

유진이 완고하자 리한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고, 유진은 활짝 열린 루티의 방문 앞에서 루티를 만날 수 있었다. 복도는 난장판이었다. 유진이 루티에게 떠나겠다는 말을 하며 악단의 공증서를 요구하는 동안, 리한은 날카로운 눈으로 문 앞을 지켰다.

“저는 이런 간이 공증서에 서명할 권한이 없어요.”

“그래도 해 주세요. 저희는 민간인이니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일정도 공연 이후에는 없었잖아요.”

“그럼 문구를 좀 바꿔요…… ‘위험하다고 판단되면’이라는 조건을 달죠.”

“종이를 다시 주세요. 그리고 그 조건에 ‘전투를 포함한’이라는 말을 넣을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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