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121/256)

  

31화.

만일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면, 여기서 유진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처럼 권력을 가진 자리의 주인으로 태어나지 못했고, 리한처럼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삶도 벅차고, 사소하고 뻔한 불행도 피하고 싶어 안달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래서 새삼 무력감을 느꼈다.

여기서 황제가 어떤 질문을 하고, 리한이 어떤 대답을 할까. 리한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수도 있고, 황제는 그것을 간파할 수도 있다. 만일 이 자리에서 황제가 ‘저 스타람 자식을 죽여’라고 즉흥적으로 결정한다고 해도 유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쟁이 싫어 아메탄에 갔다지?”

그가 곁에 있던 여자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네가 있어 아메탄에 전쟁이 나면 어쩌지?”

황제의 질문에 리한은 살짝 웃어 보였지만 그의 뒤에 있던 아메탄의 악단들과 이브조차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한 영향력은 스타람에 다 두고 왔습니다.”

황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네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당장 내 궁으로 데려갈 정도로 인상 깊은 무대였다. 다 두고 올 수 있을 리가. 그리고…… 그런 걸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또 한 번 정적이 흘렀다.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일 저녁 시간을 비워 두거라. 다음 무대를 보도록 하지. 연회의 흥이 끊기겠구나.”

* * *

유진은 다시는 자의적으로 연회든 무도회든 이런 종류의 행사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무엇보다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음악 소리와 고함 소리, 남자와 여자가 붙어먹는 소리, 음식을 먹는 소리, 술 취한 사람들의 주정…… 지금이라도 먼저 방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브가 대놓고 리한 옆에서 아양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메탄에서 오셨다고요.”

유진이 조용히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데 제국의 군복을 입은 군인 하나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브가 가르쳐 준 대로 군복의 팔에 있는 원의 개수를 세어 보았더니 네 개였다. 꽤 높은 지위의 남자였다.

“아까 무대에서는 못 봤는데…….”

“악단이 아니고, 행사 보조로 왔어요.”

유진은 이브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한을 흘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주로 이브가 말을 걸고 리한이 툴툴대며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모양새였다.

“데이브 카르테스라고 합니다. 아까부터 제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못 느끼셨나요?”

“네?”

“마치 인형같이 생기셔서, 처음 볼 때부터 눈을 뗄 수가 없더군요.”

“……네?”

유진은 살짝 당황했다. 처음 본 사람이 이렇게 뻔한 대사를 하며 다가오는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어색하게 하하, 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는데, 데이브는 그다지 머쓱해하지도 않고 ‘그럼, 나중에 뵙죠.’라고 부드럽게 말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유진!”

데이브가 떠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브가 테이블을 쿵 치며 말했다.

“그 반응은 뭐예요? 아무리 저 남자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그리고 저 정도면 꽤 잘생기지 않았어요?”

“어, 어?”

유진은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녀가 어물대며 대답했다. 아무리 매사에 달관한 그녀라고 해도 연회의 이상한 환락적인 분위기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니, 처, 처음 본 사이인데…….”

“에휴.”

이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진, 만약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봐요. 지금 서로 알아 가고 뭐 하고 그럴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본능적으로 마음에 들면 한번 해 보는 거라고요.”

“하긴 뭘 해?”

리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이브가 리한의 팔을 잡으며 꺄르르 웃었다.

“이 사람은 또 왜 이러실까. 그렇게 유명한 가수라면 이미 놀만큼 다 놀아 보고 즐길 만큼 다 즐긴 거 아니에요?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아메탄에서는 당연히 조심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안 그래도 돼요. 어쨌든 낯선 곳이고, 내일 재수 없으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죽어? 곧 아메탄으로 떠날 텐데.”

“내일 황제 폐하가 불렀잖아요.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라도 하면 바로 사형 처분 내려질지도 모르죠. 게다가 무사히 넘기고 아메탄으로 간다고 해도…… 이제 지원군도 없고 최소한의 호위 병사밖에 없는데 이 흉흉한 전쟁터에서 길이라도 잘못 들면 어떡해요? 어머, 유진 어디 가요?”

“화장실.”

유진은 잔을 비우고, 벌떡 일어서서 인파를 뚫고 걸어 나갔다. 향락적이고 끈적한 공기가 기분 나쁘게 감돌았다. 아메탄 왕국에서 많은 연회를 주관해 봤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전쟁터라는 특수 상황과 향락을 좋아하는 황제의 성향이 합쳐져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미 황제가 여자들 몇 명을 데리고 자리를 뜬 연회장에는 한스팀에서 보낸 여자들과 군인들이 여기저기 섞여서 뒹굴고 있었고, 대놓고 스트립쇼가 벌어지고 있는 자리도 있었다.

몇몇 남자들의 치근덕거림을 무시한 다음에야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고, 화장실에서도 많은 여자들이 토해 놓은 흔적들을 애써 피하며 구두 뒤꿈치를 들어야 했다. 말도 안 되게 화려했고, 볼거리도 많았고, 음식 자체도 굉장히 맛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일차원적인 욕망과 환락,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황궁이 아닌데도 이럴진대 황궁의 생활은 어떨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새삼 아메탄 왕국의 왕족들이 얼마나 검소하고 상식적인지 깨닫게 될 지경이었다.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나서서 다시 연회장에 들어온 그녀는 생각보다 공기가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안에 있을 땐 몰랐는데 물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가 막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녀의 어깨 위로 기분 나쁜 체온이 느껴졌다.

“아가씨, 아직도 이 밤의 파트너를 못 찾았나요?”

“네?”

유진이 깜짝 놀라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아까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데이브가 훨씬 더 취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대의 초록색 눈동자를 본 순간부터 헤어 나올 수 없었는데…….”

“……지랄, 진짜.”

유진은 그의 팔을 치우려고 짜증을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그의 팔을 찰싹 때리자 그가 씩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대놓고 자신의 팔을 둘렀다. 술 냄새가 훅 끼쳐 유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름이 뭐죠, 아메탄의 아가씨?”

“싸구려 멘트 치지 말고 놔.”

“생각보다 앙칼지네. 얘기 좀 하자니까…….”

“너, 나를 건드리면…….”

그녀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목을 내밀었다. 얼마 안 되는 마력을 끌어 모으자 외교국 징표가 희미하게 빛났다.

“아메탄 왕국과 제국의 외교적 문제로 번질 줄 알아.”

데이브가 움찔했다. 그는 아메탄의 외교국 징표를 처음 보았지만, 이미 군에 입대한 순간부터 공적인 명령이나 권한에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머릿속에 있는 온갖 정보를 동원해 외교국 징표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스타람까지 껴야겠군.”

유진은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체온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어느새 다가온 리한이 데이브의 팔을 붙잡아 가볍게 꺾었던 것이다. 억, 소리를 내는 데이브를 어렵지 않게 취한 사람들 사이로 던져 넣은 리한이 재빨리 말했다.

“가자, 유진.”

어안이 벙벙해진 유진은 리한이 내민 손을 무심결에 잡았다. 술에 취한 데이브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는 채 사람들 속에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가 유진을 끌고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그의 손이 큰 줄은 알았지만 그녀의 손을 그렇게 폭 감쌀 줄은 몰랐다.

“바람 좀 쐴까. 누군가 마약까지 하고 있는 것 같군. 공기가 안 좋아.”

“네.”

그가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테라스를 골라 문을 열었다. 유진은 난간에 등을 기대어 후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살짝 쌀쌀해 몸을 한 번 떨었더니 그녀의 어깨 위로 재킷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춥지 않아? 어깨는 다 드러내고.”

“역시, 별로…… 안 어울리죠?”

그녀가 그의 재킷을 걸치며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옷은 처음이라…….”

“……예뻐.”

그가 그녀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유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유진은 자기 자신이 상당히 철없게 느껴졌는데, 리한의 그 말에 어색하게 남의 옷을 걸쳐 입고 화장까지 한 것이 하나도 후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왔어요?”

“……한참을 안 오기에.”

리한은 유진의 옆에 서서 허리를 굽혀 난간 쪽으로 팔꿈치를 대고 기댔다. 그래서 유진은 그의 옆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일부러 왔어요?”

“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어둠 속을 향하고 있었다. 유진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턱을 괸 채 피식 웃었다.

“이브 말마따나, 내일 죽을 수도 있잖아.”

“…….”

“한 번 해 보겠다고 어떤 놈이 달려들면 어떡해.”

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난생처음 본 남녀들이 얽혀서 끈적한 분위기를 만드는 연회장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예 새로운 세상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2층에 올라올 때 커튼이 쳐져 있는 테라스가 대다수였던 것을 상기했다.

‘혹시나 나중에 무도회에 가게 되면 커튼이 쳐져 있는 테라스 문은 함부로 여는 게 아니에요. 서로 못 볼 꼴 볼 수 있으니까요.’

무도회나 연회에 다녀 본 적 없는 유진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리한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끌고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테라스로 왔다. 그 역시 테라스에 커튼을 친다는 그 의미를 알고 있을까. 지금 보이지 않지만 뚝뚝 떨어진 다른 테라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생각하니 그녀의 볼이 달아올랐다. 또, 리한 역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민망했다.

그 역시도 이런 자리에 정말 많이 와 봤겠구나. 그도 다른 여자와 이렇게 단둘이 테라스에서 커튼을 친 적이 있었을까?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