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120/256)

  

30화.

“이 옷을 입어요, 유진. 혹시나 해서 챙겨 왔는데, 오늘 빌려줄게요.”

어쩌면 리한이 이브와 상호 합의 간에 오늘 밤을 함께 보낼 수도 있는 일이다. 유진은 자신의 생각이 항상 틀릴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살았다. 이브가 드레스로 가득 찬 가방 속에서 초록색 미니 드레스를 꺼냈다.

“음, 눈동자 색깔이랑 너무 잘 어울리겠는데.”

입어 보니 생각보다 노출이 심해서, 유진은 살짝 어색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짧은 치마를 살짝 내리다가, 이브의 드러난 가슴골을 보고 손짓을 멈췄다.

“구두가 좀…… 안 어울리기는 하는데, 제 구두는 안 맞으니 어쩔 수 없죠. 보석은 좀 빌려 드리기가 힘든데, 이해하시죠?”

“……어. 이것만 해도 고마워.”

유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긴장된 얼굴로 살짝 한숨을 쉬었다. 머리를 틀어 올린 바람에 어깨가 다 드러나고, 부드러운 초록색 실크 드레스가 무릎 위에서 하늘거렸다. 이브가 붉게 칠해 준 입술은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위에서 이상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으아, 예쁘다. 아메탄 망신은 안 시키겠네요.”

킬킬거리며 이브가 성의 없게 말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에게 어울리는 귀걸이를 하나하나 대 보고 있었다.

유진은 슬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잊지 마요. 외국에선 일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이런 ‘꾸미는 일’을 할 정도로…….

“내일 후기 공유하기예요!”

그녀는 이브가 리한을 유혹하려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안 그러면 전쟁판인 제국에 목숨까지 걸고 온 의미가 없지…… 그렇죠?”

당연한 거야. 좋아하는 가수가 다른 여자랑 잔다는 걸 상상하고 싶어하는 팬은 없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나를 꾸미고 있을까? 그게 무슨 연관이 있을까? 유진은 더 이상 이브에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것 같아 천천히 말했다.

“곧 출발이야. 한 번 마지막으로 합도 맞춰 봐야 하고. 옆방에도 스케줄 공지하고 올게.”

“네.”

유진은 방에서 나와, 바로 옆방의 문을 두드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제국에서 제공하는 무대 의상을 입은 리한이 나왔다.

“……어…….”

침이 바짝 말랐다. 항상 편안한 차림의 리한을 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차려입고 머리카락까지 매만진 리한은 또 다른 사람 같았다. 그가 살짝 놀란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이런 옷이 있었어?”

“비, 빌려줬어요. 이브가.”

리한이 짜증을 냈다.

“대체 걔는 여기 왜 온 거야? 음악을 하는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어. 벌써 다른 악단들은 연습하러 갔다고. 걔만 지금 준비한다고 출발 안 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없어요? 곧 출발한다고 공지하려고 왔는데.”

“미리 다 갔지. 나도 의상이 늦게 와서 좀 늦었을 뿐이야.”

리한은 어디다가 눈을 둬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유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귀가 붉어져 있었다. 그가 애꿎은 자신의 옷에 달린 장식을 매만지다가, 휑한 유진의 목을 보더니 말했다.

“……들어와 봐, 잠시.”

“네?”

“아무도 없으니까.”

유진은 조심스럽게 방 안에 들어갔다. 리한이 자신의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놀랍게도 반짝이는 목걸이였다.

“이리 와 봐.”

“이게…… 뭐예요?”

“다이아몬드야.”

“네?”

대체 이런 걸 왜 가지고 있냐는 유진의 표정에 리한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알고. 기본적으로 현금화할 수 있는 패물은 가지고 다녀야 비상시에 대비하지. 스타람을 떠날 때, 최대한 작고 가치 있는 걸 챙겼는데 바로 그게 보석들이더라고. 어떻게 될지 몰라 늘 가지고 다녀.”

“어…….”

유진은 새삼 자신이 국가 돈으로 지급하고 있는 하숙비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과연 아메탄은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게 맞을까? 체스트의 하숙집 같은 건 몇 채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비싼 거야.”

“그런데 왜…… 저한테…….”

“몰라.”

그는 성의 없게 대답하고,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뒤에 서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예쁘네.”

“하, 하.”

유진은 어색하게 웃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로 딱딱하게 말했다.

“그럼 곧 출발이에요. 어제 그곳에서 다 같이 만나요. 이브를 데리고 갈게요. 그리고…….”

“그리고?”

“축하 연회라고 하지만, 어쨌든 제국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기로 해요.”

“뭐?”

“괜히 풀어지거나, 일탈 같은 걸 하거나, 뭐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술도 최대한 마시지 말고.”

그 말에 리한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야, 술 좋아하는 건 너잖아? 매일 밤 와인 한 병씩 까면서.”

말문이 막힌 유진에게, 그가 살짝 민망해하며 덧붙였다.

“너야말로 괜히 풀어지거나, 술 많이 마시거나 그러지 마.”

“제가요?”

“안 하던 화장도 하고…… 너야말로 조심해. 내가 연회 한두 번 다녀 봐? 남자 놈들 조심해. 특히 전쟁터잖아. 군인들이 매너 좋게 다가와도 그놈들 속은 다 시꺼멓고…… 아니, 그냥 무대 끝나면 내 옆에 있어라. 담당자라서 무조건 내 옆에 있어야 한다고 해.”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리한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았기 때문에 약간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럼 가 볼게요. 이따 봐요.”

종종거리며 나가는 유진의 뒷모습에서 미니 드레스 뒤에 달린 초록색 리본이 한동안 리한의 시야에서 어지럽게 흩날렸다.

* * *

황제는 더 서쪽으로 원정을 나갔다가 가장 큰 성인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어차피 여기서도 마력을 회복할 만큼만 쉬었다가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화정 수립 명단에 이름을 올린 지역 하나를 더 치고 떠난다고 했다. 그 마력을 회복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승전을 거듭한 뒤 잠시 쉬어 가는 참에 아메탄 왕국의 지원군까지 받은 겸 열리는 연회였으므로 오랜만에 버려진 성에 활기가 돌았다.

유진은 난생처음으로 황제를 보았는데, 사실 유진은 황제를 직접 알현할 수준의 직위도 되지 않아 수많은 사람 속에 배경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아메탄 왕국의 지원군을 이끄는 사단장이 예를 올리는 것을 바라보고, 황제의 승리를 기원하는 연회에 리한 카드민의 공연을 준비했다는 말을 들으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황제는 50대의 남자로, 눈빛이 형형하여 야생 짐승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나른한 눈빛으로 지루한 듯이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사단장이 리한을 불러 인사시키고, 리한이 예법에 맞춰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는 리한 말고도 보고 들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주변 왕국에서의 축하 선물과 근처 지역의 영주들이 올리는 끝없는 인사…… 긴장한 유진조차 지루해질 때 즈음에 연회가 시작되었다.

행정국의 직원으로서 아메탄 왕궁에서 수없이 많은 행사를 진행해 봤지만, 유진은 황궁도 아닌데 느껴지는 중압감 때문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일단 황제의 자리가 굉장히 높아서 감히 우러를 수도 없는 배치를 해 놓은 것부터 아메탄과 달랐다. 왕이 친근하게 귀족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아예 그 누구도 황제에게 친근한 말 한마디조차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소 엄숙한 분위기에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첫 무대는 사막 국가 한스팀에서 보낸 여자 무희들이었는데, 10대 정도로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 잔뜩 나와 거의 헐벗은 옷차림으로 끈적한 무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거의 대다수가 군인인 연회장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한스팀 왕국은 여성의 지위가 비교할 수조차 없이 낮아. 매춘도 일상이고.”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저스틴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우리처럼 공연을 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럼요?”

“선물로 온 거지.”

“네?”

저스틴의 말뜻은 조금 후에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황제가 자연스럽게 무대에 있는 여자들 중 셋을 골랐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자들은 지위가 높은 군인들이 차례대로 차지했고, 유진의 눈에 낯 뜨거운 장면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유진, 여기는 전쟁터야.”

저스틴이 다음 무대를 준비하려고 일어서며 말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거든.”

리한의 무대가 바로 다음이었다. 리한은 무난한 군가를 일단 두 곡 불렀는데, 여자들이 섞이고 나니 순식간에 흥이 오른 군인들이 소리치듯 따라 불렀기 때문에 리한의 목소리는 금세 묻혀 버리고 말았다. 유진과 루티만이 초조하게 돌발 상황이 생길까 봐 무대 근처에서 굳은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정작 황제는 한스팀의 여자들을 희롱하다가 한 명이 마음에 안 든다고 때리기도 하며 리한의 무대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불렀는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토록 많이 연습하고, 또 그토록 긴장해 가며 먼 길을 왔는데 허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차라리 무관심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유진이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아메탄의 악단에게 할당된 마지막 무대인 리한의 춤이 시작되었다.

“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연습실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준비된 무대에서, 멋진 의상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추는 춤은 또 달랐다. 음악은 풍부했고, 이브가 치는 북소리처럼 심장이 뛰었다.

꿈같은 무대가 끝나고, 리한이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무대에서 퇴장하려는 리한에게 황제가 손짓을 했다. 유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스타람에서 왔다고?”

“예, 폐하.”

“아카날의 수족 아니었나?”

아카날이라면 스타람의 총통이었다. 수사국 직원이 언젠가 언급했던 이름이기도 했다. 리한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지금은 아닙니다.”

황제가 리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혼자 미친 듯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정적이 흘렀다. 유진은 자신의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숨을 쉬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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