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119/256)

  

29화.

루티는 상당히 당황스러워했지만, 유진이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자 떨떠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리한이 충분히 연습하지 않은 곡인데 가사 실수라도 하면 행사를 준비한 모두가 경을 치지 않겠냐는 것이었고, 둘째는 리한은 아메탄에서 춤을 춰 본 적이 없는데, 제국에서 춤을 맨 처음 춘다는 건 ‘최초’라는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갈팡질팡하던 루티는 결국 리한의 짧은 춤을 보고 나서야 그럼 한번 해 보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문서로 좀 남길게요.”

유진은 종이를 꺼내서 익숙한 마법을 걸었다. 마력이 고갈되다시피 한 지역이라 아주 희미하게 서식이 빛나면서 새겨졌다.

“……언제 봐도 신기하네.”

“행정국 공식 문서는 모두 이 서식이에요. 하나라도 채우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서식에 걸린 마법 때문에 추후 수정도 안 돼요. 이렇게 타국의 다른 담당자의 서명을 첨부할 땐 위조 방지 마법까지 걸려 있답니다.”

리한이 중얼거리자, 그녀가 제국의 담당자인 루티를 의식하며 다소 장황하게 말했다. 말투 곳곳에 아메탄 왕국을 무시하는 것이 느껴지는 루티에게 아무리 약소국이어도 체계가 잘 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지금 산하기관 체제를 확실히 잡으신 이브나 왕비님께서 직접 고안한 아주 어려운 마법이에요. 굉장히 강력해서 고대 마법으로 분류해요. 지금은 마력도 부족하고 해서, 이런 비슷한 마법은 우리가 다시 걸 수 없거든요. 이렇게 문서 번호도 자동으로 매겨지니 다음번에 참조하기도 쉽고요, 위조가 불가능하고 보관이 영구적이니 나중에 아무도 다른 소리를 못하죠. 행정국은 문서로 움직이는 부서라.”

“족쇄야, 족쇄. 사람이 살다 보면 예외가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리한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정말로 신기한 건, 타국에서 이렇게 행정국 서식으로 작성된 문서는 완성된 순간 행정국 제 자리에 그대로 즉시 생성돼요. 제가 행정국까지 무사히 도달하지 못해도, 일단 행정국의 서식을 딴 문서는 남기는 거예요. 이브나 왕비님의 철저함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브나 그 사람이 사람보다 문서를 우선시했다는 건 알겠다.”

유진은 리한의 비꼬는 말을 무시한 채 펜을 들어 차곡차곡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관련, 제국 공연 순서 변동 및 수정. 사안, 기존 계획이었던 세 곡 중 국가를 빼면서 한 곡을 춤으로 대체. 기간, 연습 기간 하루 및 공연 일시…… 오늘이 며칠이죠? 금액은 해당 사항이 없고…… 루티, 여기 합의했다는 뜻으로 서명 한 번만 해 주세요.”

연습 시간은 그 다음 날 하루뿐이었다. 리한은 악단이 연주할 수 있는 곡에 맞춰 자신이 알아서 출 수 있다고 말했는데, 다만 타악기를 맡은 이브에게는 꽤나 자세하게 요구했다. 이브는 난생처음 쳐 보는 박자라며 짜증을 냈고, 리한은 왜 이 정도도 못하냐고 화를 내다시피 했다.

“아니, 반 박자만 엇박으로 들어가라는데 왜 그걸 못합니까?”

“아메탄에는 이런 박자의 곡이 없어요. 게다가 다른 악기들과도 안 맞잖아요.”

“이 곡에는 그 자체에 긴장감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타악기의 역할이 중요해요. 그냥 보조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요.”

유진이 느낀 것은, 생각보다 음악에 관련해서 리한이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체스트의 집에서 지낼 때 그 어떤 반찬 투정도 없었고 집안일도 많이 도맡아 해서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음악에 관해서는 굉장히 섬세했다.

“음악 전공한 거 맞아요? 이렇게 기본도 못하고…….”

“저기요!”

이브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 엄청 실례되는 소리 한 거 알아요? 어디서 천한 스타람 박자를 들고 와서…… 여기는 스타람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요!”

“……있잖아.”

리한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서늘하게 말했다.

“내가 정말 여기가 스타람이라고 생각했으면 넌 이미 해고됐어.”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유진은 훌쩍거리는 이브를 달래기까지 해야 했다. 유진은 자신이 지금까지 리한과 티격태격한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이브를 대하는 리한의 태도는 칼같이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는 이브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유진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두고 봐.”

“…….”

“내 밑에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헐떡대며 애원하게 해 줄 테니까.”

“……이브, 여전히 그 생각이야? 싫은 소리를 그렇게 듣는데?”

“싫은 소리를 들으니까 이런 생각이 더 드는 거죠!”

이브가 팽, 하고 코를 풀며 말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리한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헐떡대며 애원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찬물에 손을 씻었다.

‘팬픽이다, 팬픽의 한 장면이야…….’

“제발, 부탁이야, 나 미칠 것 같아, 날 가져 줘, 이런 소리가 나올 때까지 침대에서 괴롭힐 거예요. 정말 가만 안 두겠어.”

“천한 스타람 사람이라며.”

“그래도 섹시하긴 하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브가 유진의 팔을 철썩 때렸다. 생각보다 손이 매워서 유진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전 남자가 그렇게 춤을 출 수 있는 건지 처음 알았어요. 스타람에서는 가수들이 다 저런 춤을 추나 봐요? 너무 멋있던데요? 근육 움직이는 거 하며, 칼처럼 절제된 동작하며…… 몸 휘어지는 거랑 그 유혹하는 것 같은 눈빛…… 만일 아메탄 사교계에서 이런 춤을 췄으면 리한하고 자고 싶다는 여자가 더 줄을 섰을 거예요. 유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낸 거예요? 리한이 춤을 그렇게 잘 추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봉쇄령 내리기 전에 렌토 지역에서 공연을 본 적이 있거든.”

유진은 사람들에게 몇십 번은 더한 것 같은 말을 기계처럼 읊었다.

“타르안 멤버 다섯 명이 딱딱 맞춰 춤을 추는데 너무 멋있더라고. 그게 생각났을 뿐이야.”

물론 10년 만에 보는 리한의 춤은 훨씬 더 감회가 새로웠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리한의 춤을 보며, 처음으로 남자의 몸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고대 한스팀 왕국에서는 남자의 몸을 훨씬 더 아름답게 여겨 늘 남자를 조각하고 심지어 동성애도 흔했다던데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탄탄하고 강한 근육이 원초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흐르는 공기가 모두 그의 움직임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부드러웠고 동시에 강했다.

춤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거구나. 사람이 가진 몸으로 예술을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눈을 뗄 수 없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원시인들이 왜 춤을 하늘의 신에게 바쳤는지 알 것 같다고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눈을 뗄 수 없다는 그 흔한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춤이 끝났을 때에야 그녀는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건 아무래도 의심이 간다고 고개를 갸웃하던 루티도 마찬가지였다.

리한 본인은 음악과의 조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악단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춤이었다. 이브는 눈을 깜빡이며 유진의 손을 잡았다.

“유진, 내일 도와주기예요. 도와주면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 줄게요.”

“……뭘?”

“후기요! 유진이랑 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게, 엄청 자세히!”

“필요 없어.”

유진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난 안 도와줄 거야. 별로 안 그러고 싶으니까.”

“흐응, 그럼 방해는 하지 말아요.”

“…….”

“어쨌든 내일 제가 예쁘게 꾸며 드릴 테니, 유진은 유진 맘에 드는 남자랑 뜨거운 밤을 보내시라고요.”

이브는 자신만만하게 두 손을 허리에 짚었다.

* * *

거절할 수도 있었다. 유진이 단호하게 싫다고 했다면 이브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유진을 작정하고 꾸며 줄 리 없었다. 그러나 유진은 자신이 왜 거절하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채로 이브가 호들갑을 떨며 해 주는 화장을 받았다.

“이걸 챙겨 왔다고요?”

이브는 유진이 연회 때 입으려고 챙겨 온 검은색 원피스를 보고 혀를 찼다.

“5년 전에 유행했을 법한 디자인인데. 심지어 한스팀의 사막에서나 입는 소수 부족 전통 의상처럼 생겼는데요?”

“…….”

유진의 매끈한 은발 머리를 틀어 올려 주며, 이브가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이브의 구불거리는 금발 머리와 화려한 붉은색 드레스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예쁘장하게 생겼고, 귀족 출신이라서 그런지 자신을 많이 꾸며 본 티가 나는 것 같았다. 

리한을 ‘자빠트리겠다’고 아침부터 각오가 대단했는데, 그런 그녀를 보면서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유치하지만, 이브에 비해 지나치게 초라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은 리한이 이브와 하룻밤을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팬픽에서 수없이 읽어 왔던 문장들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대체 왜 그런 건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난 저놈이 공화주의자라는 데에 내 단장 자리를 걸 수도 있어.’

유진은 순간 고개를 툭 떨궜다. 자신이 리한에 대해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저 자식은 순수하게 아메탄에 들어온 게 아니야.’

어쩌면 노엘만큼도 모르고 있을 수 있는데.

‘카트린 백작부인 아시죠? 산하기관 감시 기간이 끝나면 별장을 하나 줄 테니 거기서 음악 하라고 했대요.’

우연히 담당하게 되었을 뿐,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또 저 멀리로, 손닿을 수 없는 세계로 리한은 떠나 버릴 수도 있다. 스타람의 무대가 아닌, 아메탄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사교계로. 아니라면 정말로 공화주의자라서, 어느 순간 아메탄을 엎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얼마나 오만한 태도로 리한을 담당하고 있었을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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