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래서 유진이 회의실에서 리한을 마주쳤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이브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던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룸메이트가 그를 ‘자빠트리겠다’는데, 그리고 그 역시 여자를 원할지도 모른다는데, 유진은 회의 자료를 분주하게 정리하며 평정심을 찾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내가 키스해도 별거 아니야?’
그때의 그 눈빛, 끈적이던 공기, 두근거리던 심장을 생각하면 아직도 숨이 막혔다. 무대에서 대놓고 그 많은 여심을 훔치는 게 직업인 사람이었는데, 여자 하나 꼬드기는 거야 일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은 어쨌든 유진의 보호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대단한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훨씬 더 고귀하게 살 수도 있는 몸이었다.
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을까. 좀 좋은 악기를 사 달라고 해도 국가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며 동네 잡화점에서 싸구려 림프를 사다 준 것이 생각났다. 카트린 백작부인이라면 아메탄에서 가장 좋은 림프를 사다 줄 수도 있었다. 아메니티의 조그만 하숙집이 아니라, 대저택에서 하인을 부리면서 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회의 시작하죠. 제국 군악단장 루티라고 합니다. 곡 구성부터 살펴볼까요.”
아무것도 없이 망명한 사람이었다고 왜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까. 리한 카드민 자체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는데. 유진은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 루티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억지로 리한에게서 시선을 뗐다.
“일단 국가는 뺍시다. 국가를 외국인한테 부르게 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죠.”
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대 동선이나 협연할 수 있는 악단 등을 차례차례 의논하고 제국의 예법과 인사말까지 모두 합의하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국가를 빼고 나서 비는 한 곡에 대해서 의견이 충돌했다. 루티가 건넨 악보를 받아 든 리한의 얼굴이 굳었다.
“……못합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유진은 찬찬히 가사를 읽어 보고 불안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루티가 눈썹 한쪽을 올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왜죠?”
리한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대놓고 황제를 찬양하며 황제의 뜻에 반하는 자는 없어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리한의 다문 입을 보고 루티가 탁자를 한 번 치며 말했다.
“공화정이 싫어 망명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황제 폐하의 치하에서 평화를 누리고 싶어 온 주제에,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노래는 왜 못 부릅니까?”
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의 폭정이 도를 넘었다는 건 예전부터 있었던 말이었다. 오죽하면 반란군이 이렇게까지 득세하고, 아메탄에서는 황제의 첩실로 보내지느니 범죄자가 되기를 택한 왕녀도 나왔다. 실제로 초토화된 제국 땅을 보고 있자면 유진도 황제 폐하를 찬양하는 노래에 울컥 거부감이 들었다.
“……다른 곡도 한번 보죠.”
“아뇨.”
루티가 팔짱을 끼며 짜증을 냈다.
“제대로 대답하세요. 왜 이 곡을 못 부른다는 겁니까?”
“잠시만요.”
유진이 끼어들었다.
“저희 벌써 두 시간째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하지요.”
루티는 한숨을 과장되게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루티의 눈이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유진은 그 눈빛에서 ‘알아서 설득시켜라’라는 뜻을 읽었다. 루티는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떴고, 리한은 갑갑하니 뒤뜰에서 잠시 저녁 바람을 쐬겠다며 나갔다. 유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별로 좁지 않은 간의 회의실에 유진과 아메탄의 음악 단장, 저스틴만 남았다. 저스틴이 수염을 쓸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저 스타람 놈, 수상하단 말이야.”
“……네?”
“난 저놈이 공화주의자라는 데에 내 단장 자리를 걸 수도 있어.”
유진은 저스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스틴이 킬킬거리며 물을 마셨다.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디까지 타협할지 궁금했거든. 결국 황제 찬양은 죽어도 못하는군. 저놈이 곡 선택한 걸 잘 보면, 추상적으로 평화를 원하는 내용이거나 용기를 북돋우는 가사들뿐이야. 음악적 색깔은 못 속여. 자기표현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물론 음악적 능력은 인정해. 내가 본 누구보다도 감각이 뛰어나. 타고난 거지. 그렇지만, 저 꼴이면……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군.”
유진은 착잡한 표정으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공화주의자 놈이라면 그냥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대신, 우리는 선을 확실히 그어 두자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뭐, 그런 건 상관없고요.”
“산하기관 아가씨, 왜 그런 게 상관이 없어?”
그녀는 고개를 들고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런 걸 판단하는 건 제 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월급 받는 일 아니면 안 해요. 그리고 일단 저는 신변 보호를 명령받았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저스틴을 혼자 두고, 유진은 벌떡 일어섰다.
“리한과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살아서 돌아가긴 해야 하니까.”
“……정 못하겠으면 자살하라고 해. 공화주의자 놈들은 자살도 잘 하더만.”
“저는 신변 보호의 의무가…….”
“유진, 공화주의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공화주의는 한번 발 담그면 자기가 진리라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나 자신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공화주의인데 그 달콤한 생각을 누가 포기하나?”
“…….”
“황제가 괜히 공화주의자들 다녀간 곳을 다 씨도 안 마르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야. 저놈은 심지어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화정 국가에서 온 놈이라고. 누군 태어났을 때부터 왕족이고, 누군 평민이고, 이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저스틴이 기지개를 펴며 씩 웃어 보였다.
“담당자가 그 정도는 알고 있으라고.”
* * *
리한은 뒤뜰에 앉아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이 터벅터벅 걸었다. 벤치를 돌아 그의 앞에 섰다. 리한이 길쭉하게 뻗은 다리 위에 올려놓은 팔에 턱을 기대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 다 무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정적이 흘렀다. 유진의 은발에 노을이 비쳐 붉게 물들었다. 그의 푸른색 눈에 가득 찬 유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리한.”
“……설득하러 왔어?”
“…….”
“그 노래 안 부르면, 안 된다고?”
유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한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왜 안 부르는지…… 물어보러 왔어?”
그녀는 천천히 그의 앞에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리한.”
“…….”
“안 해도 돼요. 리한에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거든요. 문서에 적혀 있어요.”
“……유진.”
리한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문서는 힘이 없어.”
“문서는 힘이 없지만, 그래도 막막한 시점에 길이 되어 주죠. 갈등의 상황에 근거가 되어 주고요. 이런 애매한 시점에 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당신의 신변 보호가 나의 의무로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의 부드러운 말에 리한이 한숨을 쉬었다.
“유진, 너한테 신변 보호를 요청할 만큼 나는 약하지 않아. 막말로 지금 여기서 나 혼자 탈출한다고 해도 무사히 잘 빠져나갈 자신이 있어. 널 난감하게 하지 않으려고 참는 거야. 가끔, 아니 사실은 언제나, 너는 너무 융통성이 없어. 왕명을 받은 자리에 내가 있었잖아. 너한테 이 정도의 책임감을 요구하는 말은 아니었어. 주스 병 하나도 마력 없이 못 따는 네가 대체 누굴 지킨다는 거야?”
“융통성과 근무 태만은 한 끗 차이예요.”
유진이 길게 뻗은 은발 머리를 넘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리한의 모든 말들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그녀가 리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노래, 부르기 싫어요?”
“……어.”
대답을 하는 리한의 눈매가 그 어느 때보다 순하게 보여서 유진은 순간 가슴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남동생 하나가 생각났던 것이다.
“정말 못 부르겠어.”
“그럼 하지 마요.”
“뭐?”
“괜히 하라고 밀어붙였다가, 정작 공연 때 실수가 나오거나 표정 관리 못 하면 그게 더 큰일이에요.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죠.”
“유진, 이게…… 안 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리한은 안 한다고 대답한 건 자신이면서, 유진이 너무 단호하게 말하자 당황하여 횡설수설했다. 리한의 말을 끊으며 유진이 살짝 웃었다.
“못하겠다면서요.”
오랜만에 보는 유진의 미소였다. 그녀의 등 뒤로 지는 노을 때문에 리한은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내가 안 하게 해 줄게요.”
살짝만 무릎을 굽혀도 그의 앉은키와 비슷한 그 작은 여자가, 바람만 세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이 가녀린 여자가, 한참 어린 여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이 작은 여자가 제국만큼 커 보여서 리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다.
“타르안의 무대에 대해서는 아메탄에서 내가 제일 잘 알걸요. 스타람에서 무대 장면을 묘사한 팬픽만 몇백 편을 읽었고, 무대 사진만 몇백 장을 봤어요.”
그녀가 그의 어깨에 작은 두 손을 올리고, 생기 넘치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춤추죠.”
“……뭐?”
“망명 이후로 춤은 안 췄잖아요. 하지만 사실 타르안 무대의 꽃은 춤 아니에요? 춤 잘 추잖아요. 스타람 외에는 그런 공연을 위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없어요.”
리한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항상 남에게 보이는 것을 신경 쓰던 그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감정이었다. 대답할 말을 잃은 것도 처음이었다.
어째서 이 여자는 항상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는 행동만 할까. 쫓아와서 짜증을 낼 줄 알았던 그녀는 환한 미소로 그를 다독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팬이었던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