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안쪽의 가장 크고 화려한 침대에 짐을 풀었다.
“괜찮아요. 사실 남한테 악기를 맡기는 건 좀 안심이 안 되어서요.”
이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장 안쪽의 크고 화려한 침대에 짐을 풀었다. 대다수의 왕궁 음악단 사람들은 몰락 귀족 출신들이다.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해 음악을 배웠는데 생계는 이어 가야 하는 가난한 귀족들이 많이 왕궁 음악단에 들어갔다. 어쨌든 왕궁 음악단은 왕족과 관련된 행사만 진행하니 일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겉보기에 화려하므로 다른 귀족들과 혼약을 맺기도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하기관 직원은 귀족과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원칙이고, 그래서 나이순으로 유진이 이브에게 반말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브는 당연히 자신이 유진보다 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럴 수 있지. 알았어.”
유진은 깔끔하게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고 출입문 쪽의 먼지 쌓인 침대를 조심스럽게 털었다. 이제 한 시간쯤 뒤에 제국의 관계자를 만나서 최종 회의를 해야 했다. 이틀 후에 황제가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들었고, 그럼 황제를 맞이하는 첫 저녁 연회 때 무대에 서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녀가 가방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회의는 저녁때쯤 끝날 거고, 밤에 전달해 줄게. 이곳 마력이 너무 딸려서 방음 마법이 잘 안 될 것 같아. 합주는 내일부터 시작해야겠어.”
“아메탄에서 이미 많이 맞춰 봤는데요, 뭐. 회의는 그럼 누가 들어가요?”
“나, 리한, 저스틴 단장님, 그리고 제국의 누군가.”
“흐음.”
이브는 악기를 정성스럽게 정리해 놓고 본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를 매만지며 그녀가 쫑알거렸다.
“원래 제국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이렇게 황량한 곳이라면 별로 기대도 안 돼요. 아, 이왕 제국 출장이라면 수도로 갔어야 드레스도 좀 사고 최신 유행 동향도 좀 살펴볼 텐데.”
유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회의 목록을 정리했다. 유진이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이브는 발로 침대를 퉁퉁 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제일 좋은 옷을 잔뜩 가져오긴 했어요. 화장품도 열심히 챙겼고요. 혹시 알아요? 제국의 귀족들이나 장군들의 눈에 들지. 유진은 그런 생각 안 해 봤어요? 아직 미혼이라면서요.”
“…….”
“저는 제가 유진 나이에 시집을 못 가 있으면 너무 우울할 것 같은데…….”
“저기.”
유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요샌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아.”
“그건 팔자 좋은 여자들이나 하는 거고요.”
이브가 손사래를 쳤다.
“저처럼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가문은 가진 여자들은…… 이 명예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결혼밖에 없잖아요. 저도 차라리 유진처럼 평민으로 태어나서 아무것도 지킬 게 없다면 좋겠어요. 그럼 좀 더 자유로울 텐데.”
‘진짜다.’
유진은 표정의 변화 없이 생각했다.
‘얘는 진짜야.’
하지만 차라리 이브가 이아크 같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아크는 자신이 몰락 귀족이고 신분 상승을 바란다는 점을 은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적어도 이브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점이 유진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말이에요…… 리한 카드민…… 나는 이번에 스타람 사람을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생겨서 놀랐어요.”
“스타람 사람이라서 잘생긴 건 아니겠지.”
“웃는 게 엄청 치명적이던데요? 괜히 사교계에 말이 도는 게 아니었어.”
“……사교계?”
“왕가의 행사에 요즈음 자주 불려 다녔잖아요? 전하가 워낙에 마음에 들어하시니…… 귀족 부인들이 그렇게 탐을 내고 있대요.”
종이를 달려가고 있던 유진의 펜이 멈췄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엄청 유명한 소문이 있는데…… 카트린 백작부인 아시죠? 산하기관 감시 기간이 끝나면 별장을 하나 줄 테니 거기서 음악 하라고 했대요. 말이 좋아 음악이지, 결국 대놓고 정부 제의인 거나 마찬가지죠, 뭐.”
“…….”
유진은 귀족들의 소문에는 당연히 어두운 편이었다. 리한도 그녀에게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리한은 당연히 왕족 행사에 다니면서 사교계에 익숙해졌을 것이고, 원래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딱히 그 화려함에 위화감도 없었을 것이 뻔했다. 갑자기 유진은 리한이 멀게 느껴졌고, 그게 조금 서운했다. 담당자로서 자신이 리한의 삶 대다수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유티나 자작과 바람둥이 니트리 후작부인도 리한과 하룻밤 보내기 내기를 했다던데, 대체 왜 귀족 여자들이 천한 스타람 남자 가지고 난리들인가 했더니 과연 그럴 만한 것 같아요.”
“……그래?”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거지만, 음악적으로도 천재적이고…… 성격은 과묵한데 웃음은 상냥하고, 이상한 기품도 느껴져요. 풍채가 좋아서 그런가, 행동이 여유로워서 그런가. 그런데 눈빛은 뭔가 허무해 보이고, 그래서 그 공허감을 내가 채워 주고 싶은 욕망이 드는 거죠.”
유진은 다시 펜을 들고 다음 문장을 생각했지만, 이브의 다음 질문에 또다시 펜이 멈추고야 말았다.
“근데,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랑 자주 부딪히면 이성적인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아요? 심지어…… 엄청 섹시하잖아요! 한 번도 좋아진 적 없었어요?”
‘……내가 키스해도 별거 아니야?’
이 와중에 왜 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그때 리한의 눈빛, 낮은 목소리, 다가오던 얼굴, 팔에 선 힘줄 등이 연쇄적으로 떠올라 심장이 또 쿵 떨어졌다. 유진은 종이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팔자 좋은 여자들이나 하는 거고.”
실제로 그녀가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나처럼 돈 없고 빽 없는 평민으로 태어나 아무것도 지킬 게 없는 사람들은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 난 독신주의자거든.”
“어머?”
이브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이는 좀 들었지만, 이렇게 귀엽고 예쁘장한데 왜…….”
“귀엽고 예쁘장하면 독신주의 하면 안 돼?”
만일 그녀가 이아크와 사귀었던 전력이 없었다면 이 대화만으로도 이브를 상당히 싫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진은 어차피 귀족 출신들에 대한 이해가 이아크로 인해 아주 충분한 상태였으므로 가식적인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웃어 주기까지 했다.
“아…… 그러면요…….”
이브는 살짝 망설이더니 말했다.
“저 리한이랑 좀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돼요?”
“……뭐? 왜?”
“아까 뭘 들으셨어요? 사교계에서 리한 카드민이 난리라니까요!”
유진은 눈을 깜빡거렸다. 연결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먼저…… 음…… 외국에 나와 있다는 이런 특별한 기회에…… 한 번 자빠트리기라도 하면 저는 영애들 사이에서 꽤나 부러움 좀 받을걸요?”
이브가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유진은 재빨리 자신이 몰락 귀족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제국의 신분 높은 남자들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소망과, 잘생긴 음악가랑 한 번 자 보고 싶다는 욕망이 공존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잘 보면 엉덩이도 섹시하고, 체력도 좋을 것 같고, 크기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그만.”
유진은 그를 매일 보면서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끊었다.
“난 담당자로서 리한의 신변을 보호할 의무가…….”
“외국에서는 원래 좀 일탈도 하고 그러는 거죠. 리한도 유진에게 피해가 갈까 봐 너무 권력자들은 피했겠지만, 여기서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여자가 고플 수도 있죠.”
이브가 가슴을 모아 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유진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본 이브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러니까 산하기관 직원들이 세상 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듣지. 유진, 무도회 한 번도 안 가 봤죠? 아닌가, 행정국 소속이니 행사 보조로 참석해 봤나?”
“물론 행사 개최는 행정국에서 담당하긴 하지만, 참석은 안 하지. 그냥 불편한 옷 차려입고 의미 없는 춤을 추는 곳이잖아. 그런 델 내가 왜 가?”
“하, 그 불편한 옷을 차려입고 왜 의미 없는 춤을 추겠어요?”
유진은 네 살 어린 이브가 더 이상 어린애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주눅이 드는 기분도 들었다. 물론 그녀도 이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리한을 대상으로 이런 ‘자빠트리는’ 대화를 한다는 것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대충 슬쩍슬쩍 스치다가 불꽃 튀면 그대로…… 힛, 연회장에 왜 그렇게 테라스가 많고 정원 불빛은 왜 그렇게 다 꺼 놓겠어요? 혹시나 나중에 무도회에 가게 되면 커튼이 쳐져 있는 테라스 문은 함부로 여는 게 아니에요. 서로 못 볼 꼴 볼 수 있으니까요. 아셨죠?”
생각해 보면 리한이 주인공인 팬픽도 잔뜩 읽었는데 이렇게 당황스러운 이유는 뭘까……. 유진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이브의 이어지는 말에도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도 별거 있겠어요? 이틀 후에 있는 연회도 똑같겠지. 그러고 보니 유진도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되겠네요. 옷은 좀 가져오셨어요?”
“……옷?”
그녀가 유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보았다.
“저보다 키가 좀 작긴 하지만…… 혹시 몰라 가져온 미니 드레스 입으면 괜찮을 것 같고…… 뭐, 볼륨은 보정 속옷이 알아서 해 줄 테고…… 피부 톤이 맞으니 화장품도 어느 정도 같이 써도 될 것 같고…….”
“잠시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연회 참석 하셔야죠. 설마 대충 입고 가려는 건 아니죠?”
“난 춤추러 가는 것도 아니고, 행사 보조 담당자로 가는 건데 옷이 무슨 상관이야?”
“독신주의자라면서요. 그렇다고 평생 남자 맛을 모르고 살 거예요?”
이브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유진은 지금 내가 네 살 어린 애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건가 잠시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데 와서 일탈하는 거라니까요. 몸 좋은 군인들도 많은데 언니도 잘 해 봐요. 내가 기가 막히게 꾸며 줄게.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리한 좀 어떻게 해 볼 수 있게 도와줘요. 둘만 있는 자리만 만들어 주면 제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 볼게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