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뭐?”
“리한 카드민한테 한 번 안기기 위해 월급을 줄 수 있는 사람들도 많을걸요. 저도 호웰한테 한 번 안긴다고 하면 일 년 월급도 줄 수 있어요.”
“야!”
리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너는 무슨……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특별한 거예요?”
도리어 유진이 표정의 변화가 없는 채로 대꾸했다.
“그냥 팬 한 번 안아 줬다, 쳐요. 저보다 훨씬 예쁜 여자들도 많이 만났을 텐데 뭘.”
“그럼 왜 그렇게 심장이 뛰었어?”
“이성끼리 분위기 잡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유진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리한은 자신이 여덟 살 어렸을 때에도 이렇게 만사에 냉담했던가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진은 리한보다 나이도 한참 어렸고 게다가 외모 자체가 어려 보였기 때문에 귀여워하는 감정이 들었다가도, 그녀가 입만 열면 내뱉는 무심한 말들 때문에 가끔은 당황스러웠다.
“사람도 동물의 일종이니 가임기 청춘들이 신체적으로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설레는 거야 당연하겠죠.”
그녀가 이렇게 초탈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는 이미 첫사랑을 겪었고 그게 상당히 안 좋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아크와도 스킨십을 했었고, 손길 하나하나에 떨리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결국 헤어지고 나니 서로 악담만 하는 사이가 되었다. 유진은 이제 자신이 이아크를 정말로 좋아한 것이 맞는지도 헷갈렸다. 그저 서로 젊으니 이성적으로 끌렸던 것뿐이었겠지, 하고 결론을 낸 상태였다.
유진은 이성이나 사랑, 교제 등에 이미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노엘의 감정에 미안함이나 죄책감 등은 느끼면서도 응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는 들지 않았다. 리한의 경우에는 더 했는데, 리한을 향한 미묘한 감정에는 분명히 팬으로서의 감정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한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담당하는 행정적인 일 중 하나였고 그래서 더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그녀가 감정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이 나라에서 리한 카드민을 이성적으로 담당할 사람이 없었다.
“인간미가 없네.”
리한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웃었다. 유진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이제 리한의 수많은 웃음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웃음은 가짜다,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아까 유진을 놀리던 때와는 확실히 표정이 달랐다.
“안고 뒹구는 것이 별거 아니면…….”
그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중저음으로 속삭였다.
“……내가 키스해도 별거 아니야?”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처음 그를 만나고, 이 집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가 기선 제압을 하고 싶어, 먼저 자신이 왜 싫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기선 제압을 시도하면 튀어 나가는 성향이 있었다. 그때처럼 리한은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리한.”
그녀가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선은 넘지 마세요.”
“……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 우리는 제국에 가야 하고, 앞으로도 저는 당신을 담당해야 해요.”
그 말을 듣자, 리한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그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담당자로서 마음에 드는 거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노엘에게 발끈하여 말했던 그 때, 이미 입 밖에 낸 순간 자신은 유진을 여자로 보고 있다는 무의식이 발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말로 표현한 뒤의 마음은 증폭되는 법이다. 내가 미쳤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사랑을 자각하는 시점인 것이다.
‘정말로 좋은 거야.’
제국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로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 여자인데, 나는 이 여자를, 맨 처음 봤던 그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나?
‘좋아하는 여자를 지킬 정도의 능력은 되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
“지금 우리가 본능에 이끌려 몸을 섞기라도 한다면…….”
유진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리한은 그리고 유진이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8살이나 어려도 정신없이 끌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이후 아주 오랫동안 서로 난감해질 거예요.”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대학 교정에서 자신의 앞을 막아서던 그 조그만 몸이 믿음직스러웠을 때부터였을까. 일 처리 하나를 해도 깐깐하고 꼼꼼하게 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존경스러웠을 때부터였을까. 밤마다 찾아와 술을 홀짝이며 자신의 음악을 들어 주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담담하게 타르안의 밀수품들을 뺏기고 보이던 그 처연하면서도 무언가에 달관한 표정을 봤을 때부터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함께 넘어져 몸이 포개졌을 뿐인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을 때부터였을까.
“이제 가요. 옷 갈아입어야 하니까.”
“……그래.”
리한이 순순히 일어났다. 그가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덧붙였다.
“유진.”
“네?”
“사실 어제 그 자식이 나 때문에 널 위험한 곳에 데려간다고 난리쳤지만…….”
“당신 탓 아니에요. 노엘이 헛소리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널 절대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너한테 안 미안해.”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황명이고, 당연히 따르는…….”
“이곳이 비정상적으로 평화로운 거야. 이 시대에 혼란은 당연해.”
“…….”
“만일 아메탄 왕국도 혼란해진다면…… 혼란을 겪어 본 사람이 곁에 있는 게 낫겠지. 그래서 네 곁을 떠나야 할 이유도 모르겠어.”
유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더 물어야 할지, 묻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 없는 그녀를 두고 리한이 방문을 닫으며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유진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이 쿵 떨어졌던 그 느낌의 잔상이 남아 그녀는 침대에 오랫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누워 있었다. 잘생긴 남자가 그렇게 다가오면, 그것도 평상시에 팬으로서 좋아했던 가수에게 한 번 안기면, 누구나 이렇게 가슴이 뛸 거야…… 호웰에게 안겼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지금보다 더 현실감이 없겠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발로 침대를 쾅쾅 굴렀다.
리한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왜 ‘몸을 섞기라도 한다면’ 같은 멀리 간 얘기를 했을까. 가뜩이나 팬픽을 들켰는데 날 엄청 이상한 여자로 볼 거야. 하지만 그때 분위기는 너무 끈적했고, 리한의 눈빛에는 분명 욕구가 보였는데…… 내 눈빛도 그랬을까…….
노엘도, 이아크도, 체스트도, 곧 구해야 할 다른 거처도 생각나지 않는 밤이었다.
5. 제국의 연회
행정국의 업무 중에는 각종 행사 진행이 포함되기 때문에 유진은 일 자체에 큰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물론 제국의 서부 지역까지 이동하는 데에 잠자리 등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원래 지지리도 못사는 집안 출신이라 못 견딜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황제가 이미 휩쓸고 간 지역이라 걱정했던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다.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제국군이 진을 치고 있는 아르몬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유진의 일행은 정말로 별일 없었다. 유진은 리한과 함께 반주를 맡을 왕립 오케스트라단 5명과 함께 지원군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다.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유진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갔는데, 난생처음 보는 제국의 풍경이 생각보다 황량했기 때문이다.
“저는 지평선을 처음 봐요.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렌토도 바닷가고, 아메니티에는 건물이 많아 이런 평야를 본 적이 없어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진이 중얼거렸다.
“되게 외로운 기분이네요.”
“전쟁터의 모래밭을 보니까 그래.”
리한이 무심히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풀이 무성해지면 그런 기분 안 들 거야.”
“……그런가요.”
유진은 자신이 마차에서 내릴 차례를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제국은 직접 보니 아메탄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넓었다. 하필 한 번 황제가 다녀간 지역을 통과해 가며 이동하는 그들의 눈에 비친 풍광은 황량했다. 공기에 떠도는 마력이 거의 메말라 있었다. 그녀는 이토록 마력이 없는 곳은 처음이었다. 한 인간이 이렇게 마력을 모아 쓸 수 있다는 것이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반란군이 조금이라도 길게 머물렀다 싶으면 완전히 지역 자체를 박살 내는 것이 황제의 방식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이 일반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였고,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다른 지역에 대한 경고였다. 다만 한 번 황제가 거대한 마법을 사용한 이후에는 마력의 회복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무자비한 마법 공격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유진은 태생부터가 평민 중에서도 아무 별 볼 일 없는 몹시 가난한 집 출생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국군도 반란군도 아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땅에 살았던 주민들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먹고살기에 급급하고, 어려운 건 생각하기도 싫어하며 하루하루를 고되게 산다…… 마치 그녀의 가족들처럼. 그냥 반란군이 한번 점령했던 곳이라고 해서 한순간에 몰살당하기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서 까마귀가 울었다.
그들이 지낼 곳은 이미 사람은 다 몰살된 한 영주의 성이었는데, 유진과 리한을 포함한 악단 전체는 두 개의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유진은 악단에서 유일한 여자인 이브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고, 나머지 남자들과 리한은 바로 옆방을 배정받았다.
“으휴, 빨리 끝나고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제국이고 뭐고, 뭔가 너무 찝찝해요. 이 방에 살던 사람들도 다 죽었을 거 아니에요.”
이브가 악기를 보관할 곳을 찾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유진보다 네 살이나 어렸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왕궁 음악단에 속해 있었다고 했다. 전공은 타악기이며 그래서 그녀의 짐은 상당히 많았다. 커다란 북을 들고 그녀가 낑낑대자 유진이 도와주려고 다가가는데 이브가 살짝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