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115/256)

  

25화.

유진은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당장 제국에 다녀와서 어떻게 이사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목록에 적어 올린 하숙집에 리한을 넣고, 자신은 2인실이어도 조금 더 싼 하숙집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조금 아쉬웠다. 이제는 밤마다 술을 마시며 리한의 림프 소리를 듣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호사였지,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 누가 매일 밤 리한의 연주를 안주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아메탄의 국왕마저 감동시키고, 이제는 제국의 황제 앞까지 공연하러 가는 사람인데 자신이 담당자라는 이유만으로 분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유진은 자신의 방문 앞에 아무렇게나 쌓여진 타르안의 물품들 상자를 보며 살짝 울컥했다.

“이제 들어왔……어?”

맞은편 방이 열리며 리한이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유진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까딱 고개를 숙였다.

“어제, 그 말 있잖아…… 음…….”

“아, 당연히 신경 안 써요.”

유진은 태연하게 말했다.

“노엘 보내려고 한 말이잖아요.”

“어…… 그렇지…….”

리한은 유진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조금 놀랐다. 사실 리한도 어제 자신이 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스스로를 납득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고민하던 차였다. 딱히 유진을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생각도 안 해 봤고, 사실 지금 그런 생각이 들 상황도 아니었다. 게다가 만일 정말로 유진을 좋아했다면 그런 상황에서 전혀 로맨틱하지 않게 아무렇게나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다만 뭔가 마음속에서 욱하고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을 뿐이다. 노엘이 자꾸 자신을 폭탄 취급하고 또 자신이 얼마나 유진을 사랑하는지 절절하게 고백하니까 지기 싫다는 오기가 순간적으로 차올랐다. 

물론 이런 일차원적인 반응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리한도 얼떨떨했다. 그동안 너무 정치적인 삶을 살아서 그런지 이런 유치한 감정이 낯설었다. 사실은 혼자서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자신이 순간적으로 미쳤었나 보다 자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그의 그 고민하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평소와 똑같아 보였다.

“그 정도 상황 추론력은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어. 오해 안 했으면 다행이고.”

유진은 램프에 불을 켜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정말로 리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하루 종일 노엘에 대한 생각만 해도 벅찼기 때문이다. 미안함과 걱정이 뒤섞여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리한 같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 리는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고민의 여지조차 없었다. 유진이 문 앞에 쌓여 있던 타르안의 물품들이 담긴 상자를 끙끙거리며 드는데, 리한이 번쩍 상자를 들어 주었다.

“방 안에 두면 돼?”

“……네.”

어마어마한 양을 뺏겼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온 건 달랑 두 상자였다. 리한이 두 상자를 쉽게 옮기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LP판을 보았다.

“이건 나도 오랜만에 보네.”

그가 상자 앞에 앉아 자신들의 앳된 얼굴이 커버되어 있는 LP판을 신기한 듯 집어 들었다.

“1집…… 거의 12년 전인데. 이땐 LP도 많이 안 찍었어.”

“노엘이 대학 입학 선물이라며 준 거예요.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고 했는데.”

“……좀 봐도 돼?”

“네.”

유진은 아무 생각 없이 블라우스의 리본을 풀어 옷걸이에 걸치고, 행정국 제복 재킷을 벗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원래 타르안 건데요, 뭐.”

리한은 상자 위쪽에 있던 LP판과 포스트, 공연 입장권 등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스타람에서 빠져 나올 때 타르안에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새삼 새로웠다. 그리고 이렇게 살뜰하게 모아 둔 걸 보니 정말 유진이 타르안의 대단한 팬이기는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호웰의 사진들이 많았는데 자신의 사진은 별로 없는 것을 보면서 또다시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그는 타르안에서 가장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누구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호웰의 팬이 있다는 사실도 머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유진이라고 생각하니 살짝 서운했다. 그가 LP판을 몇 개 꺼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책 몇 권을 꺼내 들었다. 상자 밑에는 잔뜩 책과 종이 뭉치들이 깔려 있었다. 그가 책 한 권의 제목을 확인했다.

[리한이 호웰을 품은 그 밤]

유진은 스타킹을 벗어 아무렇게나 방구석에 던져 넣다가, 문득 리한이 들고 있는 것들을 보고 하얗게 질려 벌떡 일어나 리한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요!”

“어? 뭐가?”

물론 유진보다 리한이 훨씬 더 빨랐다. 리한이 벌떡 일어나 책을 머리 위로 펼쳐 들었다. 유진이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었지만 닿을 리가 없었다. 리한이 씩 웃으며 천천히 책을 읽었다.

“‘리한은 호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다른 남자에게 눈길도 주지 마…… 호웰의 볼이 그의 붉은 머리만큼이나 붉어졌다. 리한의 큰 손이 어느새 그의 볼에 다가가…….’”

“하지 마요!”

유진은 거의 리한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울부짖었다. 방금 전, 체스트에게 후회할 일이라도 만들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토록 빠르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다고 구매한 2차 창작물들이 상자 밑에 깔려 있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픽의 주인공이 심지어 그것을 눈앞에서 읽고 있다니 유진의 볼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이게 소설이라는 건 확실해. 난 호웰을 보면서 한 번도 설레 본 적 없거든. 호웰도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네?”

“우리 중 호웰이 여자를 제일 좋아해. 무슨 파티에만 가면 난봉꾼같이 여자를 바꿔 가면서…….”

“아악, 그만! 그만! 아니야!”

유진이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호웰이 그럴 리 없어요!”

“그 자식 그거 애교도 순진한 척도 다 믿으면 안 돼. 얼굴만 귀엽게 생겼지, 사실은…….”

“아아아악!”

리한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유진이 소리를 지르다가 황급히 방음 마법을 펼쳤다. 리한이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으면서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리한은 호웰의 빨려 들어갈 것 같이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팔을 잡고 자신도 모르게 벽에 밀쳤다. 호웰의 뺨은 부드러웠고…….’”

“그만해요! 아, 진짜!”

유진이 펄쩍 펄쩍 뛰며 리한의 가슴을 쿵쿵 쳤다. 리한이 그녀의 두 손을 붙들고 장난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분명히…… 나, 한 번은 놀린다고 했어. 그게 오늘이야.”

“그, 그냥…… 이건 그냥…… 팬 문화…….”

“알아. 나도 들은 적 있어.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가 울먹울먹하는 유진의 초록색 눈을 바라보며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눈꼬리가 매력 있게 휘었다. 유진은 정말 부끄러운 와중에 그의 길게 늘어진 눈매를 보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가 웃는 것은 지겹도록 보았지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표정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자신의 두 손목을 잡아 고정시키고 있는 리한의 큰 손이 의식되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 짝이 호웰이라니.”

“……다른 버전도 있긴 해요.”

그가 한 손으로는 유진의 두 손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책을 펼친 채 어깨를 으쓱했다.

“‘호웰이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리한은 하체를 밀착시키며 입술을…….’ 아냐, 아냐. 호웰은 절대 이렇게 순종적인 스타일이 아닌데.”

“읽지 마요!”

유진이 끙끙대며 손목이 잡힌 채 버둥거렸다. 리한은 유진의 평정심을 잃은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운지 키득거렸다.

“‘입술을 닿고 혀를 밀어 넣자 호웰이 신음 소리를…….’”

“으아아악! 그만해요!”

민망하여 유진이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리한이 살짝 균형을 잃으면서, 그들은 바닥에 함께 넘어졌다. 그 와중에 리한은 유진이 다치지 않게 그녀를 안은 채 그의 등으로 굴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유진은 눈을 꽉 감았다. 유진의 두 손목을 잡고 있던 리한의 손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어…….”

생각보다 아프지 않고, 따뜻한 체온이 그녀를 감싸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녀의 밑에 리한이 아직도 키득거리는 상태로 깔려 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싼 그의 손이 느껴졌다. 그녀가 자유로운 두 손으로 리한이 아직도 보고 있는 책을 빼앗으려 했지만, 리한이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 위로 책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한 바퀴 구르고 말았다.

“아, 아야!”

“‘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호웰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유진, 이런 거 좋아해?”

“아, 안 읽어요! 그냥 모, 모은 거예요!”

“그러기에는…… 이거 너무 많이 읽은 티가 나는데? 게다가 이런 책이 한두 권이 아니던데…….”

“아니, 그건 그냥…….”

유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살을 맞대고 있는 것이 남사스러워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결국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의 이마가 바닥에 누워 있던 그의 가슴에 닿자, 순간적으로 리한도 움찔했다.

“……그냥, 뭐, 다 팬들도 상상이라는 건 알아요……. 멤버들을 좋아하다 보니까, 뭐 잘생긴 사람 옆에 잘생긴 사람 있고 그러면 좋으니까…… 아…… 말로 표현을 못하겠네…….”

그녀가 웅얼거리며 해명했다. 그녀의 작은 숨이 그의 가슴에 닿아, 리한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가 팔로 감고 있는 허리를 풀어 줘야 그녀가 일어날 텐데, 이상하게 팔을 놓고 싶지 않았다.

방에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맞닿은 서로의 가슴에서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을 서로 느꼈다. 긴장한 시간이 지나고, 유진이 천천히 그의 팔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리한은 그녀를 다시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에게 기시감을 느꼈다. 그 순간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앉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어쨌든, 진짜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니까 기분 상하지는 마세요. 호웰이랑 사랑하는 사이 아니라는 거 다 알아요.”

“……맞아. 난 이성애자야. 만일 동성애자라고 해도 호웰 같은 놈은 싫어.”

리한 역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평정심을 찾은 채 책을 정리해서 상자 밑에 깔고 있는 유진을 보며 리한은 약간 어색하게 말했다.

“미, 미안…….”

“뭘요?”

“아까, 장난치다가 네 몸에 손댄 거…….”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먼저 손댄 사람은 전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허리까지 안았는데…….”

“저 다치지 말라고 그런 거잖아요.”

유진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랑 안아 보는 게 처음도 아니고, 게다가 이렇게 잘생긴 남자한테 안겼는데 제가 사례라도 해야 할 판인데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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