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웃기지 마. 네가 유진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당장 유진의 곁에서 떨어지는 게 정상이야. 어떤 미친놈이 좋아하는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어? 유진은 아무것도 몰라. 그냥 산하기관의 성실한 직원이라고. 그냥 그렇게 살게 냅둬. 얼른 유진 곁에서 꺼지라고. 알아들어?”
노엘은 만일 체스트의 목에 칼을 대고 있지만 않았다면 리한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유진은 사색이 된 체스트의 얼굴을 보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기 때문에 리한과 노엘의 온도차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재빨리 대답했다.
“노엘, 제발 그만둬. 어쨌든 난 가야 하고, 리한은 내 곁에서 떨어질 이유가 없어. 아무리 너라도 이건 너무 행패야. 체스트한테도 민폐고, 리한에게도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리한이 제국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잖아.”
“유진…….”
노엘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10년이야, 유진. 10년 동안 널 사랑했어. 이렇게 거지같은 상황에 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노엘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이미 짐작하고 있던 말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눈에 광기마저 어린 노엘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으로 노엘을 본 날, 그의 떨리던 팔이 생생히 기억났다. 그녀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엘은 그녀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고, 혈연 하나 없는 아메니티에서 가족보다도 가까웠다.
“내가 내색 한번 하지 않은 이유가 뭔데…… 혹시나 내가 하는 불법적인 일들이 공무원인 네게 조금이라도 민폐가 될까 봐…… 내가 몸담고 있는 위험한 일들 때문에 네 손가락이라도 하나 다칠까 봐…… 그 멍청하고 비열한 이아크 같은 귀족 나부랭이가 네 곁에 있어도 너한테 한마디도 못했는데…….”
결국 유진의 눈에서 토도독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 속마음까지는 짐작하지 못한 그녀의 가슴이 미어졌다. 유진과 함께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번도 내색하지 않은 노엘의 마음이 안타까웠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전이되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그 전쟁 속으로 가겠다고…… 저 갑자기 굴러 들어온 자식 때문에……? 유진, 지금 저 자식이 타르안의 리더라서, 그래서 편드는 거야? 그 전에 저 자식은 순수하게 아메탄에 들어온 게 아니야.”
“그런 거랑 상관없어. 그리고 지원군과 함께 가니 당연히 안전할 거야. 돌아올 땐 호위병도 있고, 또 리한은 확실히 무예에 출중하기도 하고…… 노엘, 일단 제발 얼른 가.”
“당신.”
노엘이 핏발 선 눈으로 리한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담당자로서 마음에 든다고 하는 그 여자, 나한테는 목숨보다 더 소중해. 제발 놔줘. 차라리 잠적을 감추고 지하 세계로 들어오든가 다른 나라로 가든가 해. 부디…… 부디 유진을 놔줘.”
체스트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버리는 바람에, 유진은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엘, 제발 가! 체스트한테 너무 미안하단 말이야!”
유진이 결국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타르안 밀수 걸려서 하숙집까지 수색 당했는데…… 체스트 볼 면목이 없어…… 그리고…… 이런 끝나지 않을 얘기만 하다가 네가 잡히면 어떡해…… 벌써 신고라도 들어갔으면 어떡해…… 제발…… 제발 오래 살란 말이야…….”
유진의 말에 노엘이 잠시 주춤했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 그게 걸릴 리가 없는데…….”
그의 공격적인 시선이 리한에게 향했다. 리한이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그대로 받아치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하고 관계없어. 그리고…….”
그가 천천히 유진을 일으켰다. 리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담당자로서 마음에 드는 거 아니야. 정말로 좋은 거야.”
유진은 눈물을 닦다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네 마음에 뒤지지 않아.”
노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유진은 리한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체스트가 어떻게 될까 봐 도저히 진정이 안 되는데, 리한은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유진은 그가 얼마나 감정을 잘 가장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그대로 믿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차분한 어조, 상황을 달관하는 것 같은 눈빛, 묘한 자조적인 웃음까지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좋아하는 여자를 지킬 정도의 능력은 되니, 걱정하지 말고 떠나지 그래. 지금 여기서 네가 제일 위험해.”
* * *
다음 날, 유진이 터덜터덜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하자 부엌의 작은 식탁에서 조용히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체스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청했다. 유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죄송하다는 말만 연거푸 반복했다.
“……유진, 미안하다. 그런데 난 늙고 심약해서…… 사실 버겁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진은 실제로 고개를 들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 제국에 간다고 했지…… 돌아오면, 다른 하숙집을 구해 봐. 물론 리한도 마찬가지야.”
“……네.”
“수사국 직원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수배자가 갑자기 찾아와 위협하고…… 나는 그냥 평화롭게 늙고 싶을 뿐이야. 처음엔 그냥, 리한에게 스타람 섬 얘기를 듣는 게 좋았지만…… 이제는 다 싫다. 미안하다.”
“이해해요…… 죄송합니다.”
“널 좋아했어. 내가 말하지 않는데도 집에 마법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묵묵히 도와주고…… 싹싹하지는 않아도 믿음이 갔어. 물론…… 밀수품을 숨겨 둘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산하기관 직원을 데리고 있다는 건 나름 뿌듯한 일이기도 했단다.”
체스트의 말에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유진은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체스트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어젯밤, 노엘이 절절하게 사랑을 고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 와중에 파리하게 떨고 있던 체스트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 나이에, 청년이 목에 칼을 들이미는 것은 힘든 경험이었을 것이다.
“……오전에 수사국 직원들이 왔다 갔어.”
“또요?”
유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체스트가 한숨을 쉬었다.
“네 밀수품들이 돌아왔어. 물론 일부만. 노엘에 대한 얘기는 안 했으니 걱정 마.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란다. 다음번엔 정말로 신고할 거야.”
“……예.”
유진은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체스트 역시 마찬가지인지, 표정이 계속 좋지 않았다. 할 말은 다 끝난 것 같은데도 둘은 식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체스트가 무겁게 한숨을 쉬고 눈가를 훔쳤다.
“……미안해. 미안하다.”
“괜찮아요. 당연한 거예요.”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체스트, 기회가 된다면 다시 대학에 가고 싶어하셨잖아요. 그때 괜히 발목이 잡히면 안 되죠. 수배범 친구가 있는데다가 본인도 밀수 전력이 있는 하숙생하고, 공화주의자인지 첩자인지 의심을 계속 받고 있는 하숙생을 끼고 살라고 부탁하기엔…… 저도 염치가 없어서.”
“……아주 오래 전 얘기인데 기억하는구나.”
체스트가 민망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10년 전, 봉쇄령이 내리기 전에는 그녀도 왕립마법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선택 과목에 있던 전기공학을 가르쳤다. 그녀가 공연히 식탁보를 만지작거렸다.
“남들이 보면 욕하겠지…… 60이 넘은 노인네인데…… 아직도 꿈을 꾼다고…… 그것도 가망성 없는…… 참, 사람 욕심이라는 게, 나이가 먹으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속마음을 들킨 그녀가 당황스러워 말을 더듬는 모습을 바라보는 유진의 입가에 살짝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나이가 먹었는데 난…… 유진, 너만큼도 세상사에 달관하기 힘들구나. 마력이 없어 쩔쩔매다가 전기공학에 매달리던 어린애 마음 그대로야. 알고 있었겠지만 난 어린 나이에 유산을 모두 물려받아 상당히 부유했는데도, 혼자 스타람 섬으로 유학을 떠나고…… 그때도 난 내 자신이 부족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든…… 너를 보면서 내가 너 같은 학생을 가르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단다. 10년 전 생각도 많이 나고…….”
“…….”
“유진, 다 헤어지는 마당이지만…….”
유진은 고개를 들어 체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흰 곱슬머리가 단정하게 묶인 걸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그녀의 원래 머리 색깔이 궁금해졌다. 그동안 정작 유진은 체스트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다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는데, 타인과의 관계는 얼마나 일방적인지 새삼 느껴져서 마음이 아릿했다.
그녀는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몰랐을까. 노엘이 그녀를 오랫동안 사랑한다며 맴돌아 온 것도 최근에서야 알았고, 체스트가 그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줄도 몰랐다. 하지만 유진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아 후회조차 되지 않았다.
“너를 보면 늘 무언가에 달관한 사람 같아 보였어. 어쩔 땐 나보다도 노인 같았단다. 수사국이 들이닥쳐서 네 밀수품들을 다 가져가던 날…… 네가 빠르게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는 정말 놀라웠어. 다른 건 몰라도 산하기관 직원으로서 꼼꼼하기 그지없는 네가 밀수까지 할 정도면 정말 소중한 것들이라는 뜻인데…… 그렇다고 딱히 후회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전 후회는 안 해요.”
유진은 천천히 말했다.
“어차피 그때의 저도, 지금의 저도 부족한 사람이니까…… 그냥 결과를…… 받아들이는 거죠.”
“그게 보통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 할 거다.”
체스트가 유진의 한쪽 손을 잡았다.
“유진, 우리 모두 부족해. 난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 요즘 매일 밤 술을 마시던데, 술보다 조금 더 건전한 행복을 찾아봐.”
“……네.”
“후회를 안 한다는 건 조금 슬픈 말인 것 같구나.”
“…….”
“어차피 더 좋은 인생을 바라지조차 않는 것 같아서.”
“…….”
“후회할 일 하나 정도는 해 보는 게 어떻겠니. 늙은이의 주제넘은 말이지만.”
체스트의 진심이 느껴져서 유진은 가만히 그녀의 주름진 손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부모를 떠난 그녀는 나이 든 사람에게 이렇게 조언을 받아 본 적이 처음이었다. 유진은 체스트의 하숙집에 들어오고 난 뒤 처음으로, 이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편안했던가 생각했다. 늦은 밤 그녀가 늦게 온다고 골목길을 서성이던 노인의 실루엣이 생각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역시 불행은 예상 못 하는 곳에서 튀어나오고, 인생은 그녀에게 언제나 만만치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