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112/256)

  

22화.

“황제를 너무 쉽게 보는 거지. 난 이해가 안 돼.”

요즈음 행정국의 가장 큰 이야깃거리는 당연히 제국의 일이었다. 일단 행정국은 어차피 아메탄 왕가에 벌어진 일만 처리하면 되는 곳이었으니 제국의 전쟁은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아무리 제국에서 공화주의자들이 들고 일어섰다고 해도 아메탄 왕국은 조용했던 것이었다. 일단 국왕인 다니엘의 통치가 민심을 잃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고,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왕가의 권력과 무관했다. 공화주의자들이 비밀리에 생기고 있다고는 들었으나 일단은 아메탄 왕국이 제국과는 달리 평화로웠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키거나 할 구심점조차 없었다.

“저번에 그 산간 지방…… 황제의 손가락 하나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며. 그런 사람을 상대로 무슨 반란이야? 무고하게 죽은 그 사람들은 다 무슨 죄냐고.”

아린스가 점심을 먹으며 말했다. 행정국에 볼일을 보러 왔다가 함께 식사하게 된 약제국의 지트가 포크를 세우며 반론했다.

“거기서 잘 생각해 봐야지.”

지트와 아린스는 대학 동기였기 때문에 서로 스스럼없이 반말을 쓰며 대화했다. 유진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스프를 떠먹고 있었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 그건 반란군이 죽인 거야, 황제가 죽인 거야? 넌 반란군이 괜히 일어나서 거기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죽인 사람은 황제라고. 그리고 제국은 지금 민심이 들끓고 있대. 국민들이 죽든 말든 세율도 높이고 황궁 증축령도 내렸다던데.”

“아, 물론 황제가 포악하긴 하지. 그건 알아, 아는데.”

아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왜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느냔 말이야. 그냥 좀 살면 안 돼? 굳이 다 깨져 봐야 알아?”

“너, 우리 다니엘 전하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봐. 어디 무서워서 살겠냐? 당장 우리 세금을 확 올리고, 그 돈으로 여자들 끼고 노신다고 생각해 봐.”

“아니…… 마력 줄어드는 속도를 봐. 내가 보기에는 100년만 더 있으면 황제는 더 약해질 거야. 공화정은 그때 세워도 된다, 이거지. 그리고 난…… 사실 공화정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흠, 그건 그렇지.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다고? 완전 끔찍한데. 그냥 인기투표 아냐?”

“내 말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멍청하고, 더 알고 싶어하는 의지도 없어. 평민 출신인 우리는 더 잘 알잖아. 공부는커녕, 고전 한 권 읽을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야. 그 사람들한테 투표권을 준다고?”

“적어도 왕족은 정해진 교육이라도 의무로 받지. 귀족들의 견제도 받고 말이야.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투표 같은 걸 하면 분명 돈 많은 사람이 되지 않겠어? 그냥 밀 한 상자씩만 돌리면 끝 아냐?”

둘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대다수의 아메탄 국민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아린스와 지트는 깔깔대며 공화정이 세워질 경우 얼마나 국가가 파탄 날 것인지 떠들다가, 아무 말 없는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유진, 넌 어떻게 생각해? 너도 평민 출신이잖아. 네 고향 사람들한테 투표권 주는 건 어떨 것 같아? 투표로 대표를 뽑는다면!”

유진은 먹고 있던 빵을 오물오물 삼키며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민 출신과 귀족 출신은 산하기관 내에서도 어떻게든 편이 갈렸다. 아린스가 유진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밥은 같이 먹어 주었다. 산하기관에 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나마도 그 귀족들은 자신들끼리 모여 밥을 먹곤 했다. 유진은 가끔 그 무리에 끼어 있는 이아크를 마주칠 때면 점심시간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최종 재판 때 몇백 표 관리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던데 과로사 예약이겠네요. 현실적으로 자기들끼리 투표하고 말겠죠. 공화정의 정의가 전원 투표를 뜻하는 건 아니니까.”

“장사꾼만 좋겠네. 체제 바뀌면 신나는 건 장사꾼들이지, 뭐.”

지트의 한마디에, 유진은 먹던 빵이 걸려 콜록거리며 황급히 물을 삼켰다. 장사꾼이라는 말에 노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유진의 둥그런 눈을 보며 지트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약초의 매매도 약제국 관할 일이잖아. 각종 비리나 부정부패, 체제의 변화가 생기면 꼭 장사꾼이 껴. 그게 가끔 그 지역 약초 가격까지 영향을 줄 때가 있어. 나라에서 관리하는 풀에도 그만큼의 영향력이 있는데, 다른 물품들은 엄청날 거야.”

“……그럼…….”

유진은 물을 삼키고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장사꾼들은…… 다 공화주의자예요?”

“상식적으로, 그렇게 세상이 이분법적으로 돌아가겠냐?”

아린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행정국 사람들이 문서랑만 노는 샌님들이라고 소문이 나는 거야.”

말문이 막힌 유진이 우물우물하는데, 식당의 문이 벌컥 열리고 키탄이 들어왔다. 키탄의 눈이 누군가를 다급하게 찾더니, 유진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유진 유니트, 긴급 사안이야.”

“……네?”

유진의 표정이 굳었다. 점심시간에 과장이 식당까지 올 일이면 얼마나 심각한 일이라는 뜻인가. 지트와 아린스도 놀라서 키탄을 바라보았다.

“……왕궁에서 직접 온 명령이야.”

키탄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행정국에 왕궁이 직접 명령을 할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점점 더 짐작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황제 폐하가 지금 제국 서쪽 지방에 반란을 제압하러 직접 출정하신 건 알고 있지?”

“……몰랐는데요.”

“물론 제국군이 반란을 전국적으로 진압하고 있기는 한데…… 중심이 되는 곳은 황제 폐하가 직접 출정하시곤 해. 그건 당연한 거니까…….”

아린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대화에서 나온 북쪽 산간 지방을 폐허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연장선에 있는 말이었다. 키탄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그리고 미안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근데…… 황제 폐하가…… 직접 리한 카드민을 보고 싶다고 하셨대. 지원군을 보낼 때 함께 보내라고.”

“네?”

유진이 화들짝 놀라 물컵을 떨어트렸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반란군 진압을 지원할 의무가 있어. 심지어 서쪽은 가까우니, 당연히 지원군과 물자를 보낼 거야. 그런데 아마 황제 폐하께서 리한 카드민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나 봐. 서쪽 지방의 반란을 제압하고 축하 공연으로 리한 카드민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셨어. 리한이 굉장히 상징성 있는 인물이기는 하니까.”

“아…….”

“일단 우리는 거절할 수 없고, 지원군과 지원 물자 편에 리한 카드민을 함께 보내야 해. 그런데…….”

키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지만, 유진은 체념한 표정으로 떨어진 물컵을 주워 들었다. 키탄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변의 보호…… 때문에 제가 동행해야 하는 거죠?”

“유진, 담당자를…… 어떻게…… 남자로 지금이라도 바꿀…….”

“지금 남자로 바꾸면, 앞으로 이 업무는 자연스럽게 남자가 하게 돼요. 이랬다저랬다 할 수는 없고 제가 가는 게 맞겠죠.”

“하, 이 업무는 애초에 외교국에서 맡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군대도 함께 가니까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공연하고 오면 당연히 귀국하는 거고.”

“출장비나 잘 챙겨 주세요.”

유진은 포기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밀수품 때문에 엄청나게 청구될 벌금이나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통으로 가니까 위험수당도 넣어 주시고요. 당연히 최고 등급으로요.”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을 거야. 호위병들에 대해 내가 강력하게 주장할게.”

키탄은 자신이 담당자가 동행한다는 조항을 넣으라고 했지만, 내란 중인 제국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유진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유진은 옆에 앉아 있는 아린스를 의식하여 최대한 의연하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온갖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자신이 이 업무를 맡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뿌듯해할 아린스 앞에서 너무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무표정으로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유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린스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그러나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말투를 놀랍게도 적절히 조화시키며 말했다.

“제국에서는 공격 마법을 쓰면 안 돼. 황제에 대한 모독이거든. 알고 가라고.”

그 때 센스 있게 받아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지었던 것 때문에 유진은 하루 종일 짜증났다.

* * *

유진이 행정국에서 일을 하고 있던 평범한 오후, 리한은 의자에 앉아 림프의 줄을 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수사국 직원들 때문에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옆에서 막 장을 보고서 돌아온 체스트가 안절부절못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고 있었다.

“이, 이분들이…… 갑자기…….”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사국 직원 하나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리한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수사국 제복을 이미 외워서 상대의 신분을 알아차린 리한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망명객 주제에 받아들여야겠지요.”

리한이 림프를 침대 위에 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갑자기 공격을 받아도, 하숙집 수색을 시도 때도 없이 몇 번씩 당해도요.”

“수색이 아닙니다. 심문도 아니고요.”

수사국 직원이 가방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리한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뭡니까? 분명 스타람 물건인데…….”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체스트의 눈도 갑자기 커졌다. 리한이 물건을 받아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걸 여기서 보게 되다니. 스타람 물건 맞습니다.”

“아는 물건입니까?”

직원이 반색하며 물었다.

“이게 당최 어디에 쓰는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아, 스타람 출신에게 물어보자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물론 당신은 저희에게 협조할 의무가…….”

“뭐 대단한 거라고. 이건 전기다리미라는 거예요. 옷을 다릴 때 써요. 뜨거워지거든요. 근데 이런 고급 물건은 스타람에서 정말 잘사는 사람들이나 쓰는 건데…….”

“아.”

마력을 가하면 열이 나서 옷을 다릴 수 있는 기구인 다리미라면 아메탄에서도 사용하는 물품이었다. 다만 생긴 것이 다르고, 원리가 다를 뿐이었다. 체스트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이건…… 전기가 있어야 뜨거워지겠군요. 이게 아마 스위치라는 걸 거예요.”

그녀가 세상 신기한 물건을 본다는 듯 전기다리미를 받아 들고 중얼거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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