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111/256)

  

21화.

유진은 세 번째 머그컵을 단번에 비웠다. 술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만 작은 유진의 방에 울렸다. 그녀가 후, 하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별로 말할 필요가 없었어요. 담당자로 엮인 그 순간부터, 필요 없는 건 배제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좀 짜증나기도 했고요. 타르안은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냥 뒤섞인 감정들을 저조차도 마주하기 힘들었어요. 리한을 좋아하긴 하는데, 해체했으니 엄청 밉고, 일거리니까 짜증나고, 어쨌든요. 뭐, 그런 건 다 중요하지 않은 거니까요.”

정적이 잠시 흘렀다. 리한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무심하게 물었다.

“또 듣고 싶은 곡 없어?”

“……아.”

리한이 오른쪽 발을 까닥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진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어…… 저…… 안 괘씸하세요?”

“좀 괘씸해. 그래서 단단히 따지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니까 참는 거야. 나중에 한번 크게 놀릴 거니까 기억해 둬.”

“…….”

“오늘은…… 너한테 너무 가혹한 날인 것 같아서.”

유진은 둥그런 눈으로 리한을 바라보았다. 리한은 주눅 든 그녀의 얼굴을 보니 문득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의 기억 속 유진은 언제나 뚱한 표정이거나 뭔가를 포기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기가 팍 죽어 있는 얼굴은 처음이라, 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고 보면 그가 웃음을 참는 상대는 유진뿐이었다. 처음에 그녀가 타르안의 팬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보다는 앞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그녀의 민망함이 떠올라 이상하게 유쾌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의 시무룩한 모습을 왠지 보고 싶어 제 발로 그녀의 방에 찾아왔다. 비록 그 대가가 호웰의 팬이었다는 다소 씁쓸한 고백이었지만.

“팬서비스야.”

“……왜…… 잘해 주세요?”

“음.”

리한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림프에서 무의미한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그가 림프를 책상 위에 잠시 올려 두더니, 유진의 앞에 앉아 머그컵에 담겨 있던 와인을 단숨에 마셨다. 유진은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가까이 있는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훨씬 더 주량이 센데도, 이상하게 이미 술에 완전히 취했는지 심장이 뛰었다.

“네가…… 수사국 직원 앞에서 내 앞을 막아섰던 날 기억나?”

“……네.”

그의 속눈썹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 푸른 눈을 피하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왠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유진은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너무 오랜만이었어.”

“네?”

“그렇게 순수하게 나를 지켜 준다는 사람을 본 건.”

“순수한 거 아니에요. 일이라서 그런 것뿐인데.”

“정말 이상하지…… 수많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에도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두 손으로 침대 모서리를 꽉 움켜잡았다. 남자랑 가까이 있는 게 처음도 아닌데, 상대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대륙의 여자들을 홀린 적 있는 남자였다.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단단한 몸이 주는 존재감이 엄청났다. 유진 혼자 긴장하고 있는지, 그의 말투는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아주 오랜만에, 혼자라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

“……아…….”

“그냥 그 한순간이 기억에 남을 뿐인 거야. 그러니까 오늘 밤 혼자라는 생각이 안 들게 해 주고 싶었어. 내가 받은 대로.”

그가 머그컵에 남은 와인을 모두 따라 주고, 유진의 손에 쥐여 준 뒤 다시 책상 의자로 돌아가 림프를 집었다. 유진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눈을 깜빡이다가 힘겹게 물었다.

“어…… 저기요…….”

“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재차 말했다.

“꼭 진실만 대답한다고 약속해요.”

“……진실만?”

리한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럼 단 한 가지만. 다는 얘기 못 해. 우리가 서로 곤란해질 수 있거든, 하나만, 제일 궁금한 거 하나만 대답해 줄게.”

“감사합니다.”

유진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리한은 약간 긴장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일 그녀가 너무 난감한 질문을 하면 어쩌나, 하는 표정이 유진에게도 읽혔다. 그녀가 머그컵을 꼭 쥐고 말했다.

“호, 호웰은…….”

“어?”

“호웰은 어떻게 됐어요?”

“……뭐?”

“무사해요? 죽은 건 아니죠? 당신이 여기로 망명하고 사상범으로 끌려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어서…….”

“하이고…….”

“혹시나…… 다쳤을까 봐…….”

“그래서 맨 처음에 날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본 거야?”

리한이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유진의 표정이 하도 간절하여 결국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가 짜증난다는 듯 내뱉었다.

“멀쩡해.”

“네?”

“멀쩡하다고. 사상범은 무슨.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야. 이건 진실이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멤버들도?”

“그래. 다들 잘 살아 있어. 다섯 명 중 내가 제일 못 살고 있어. 됐어?”

“와.”

리한의 눈이 커졌는데, 유진이 활짝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리한은 유진이 그렇게 활짝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생각해 보니 유진이 웃는 것을 본 건, 체스트의 말에 예의상 미소를 지을 때뿐이었다. 왠지 모를 배신감 때문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다행이다. 아, 진짜 다행이에요.”

머그컵을 내려다보는 유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리한이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야, 내가 제일 못 산다고. 네 눈앞에 있는, 널 위로하려고 온 내가 제일 못 산다는데 너 그렇게 웃기야?”

“……히히.”

“히히?”

유진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반달 모양으로 초록색 눈이 휘고, 오밀조밀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자 정말 어린아이가 웃는 것처럼 귀여웠다. 리한은 순간 한 잔 마신 술이 올라오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 아직 제 꿈은 희망이 있는 거잖아요!”

“꿈?”

“저,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타르안의 공연을 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다섯 명 다 살아 있으면, 가능성이 0은 아니니까요!”

“…….”

“타르안 해체 이후, 유일하게 들은 좋은 소식이에요.”

취해서 그런 건지,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지 유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고마워요!”

“……나 참.”

그가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신청곡 없으면 내 맘대로 한다. 1집 타이틀곡인데, 이건 사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쓴 곡이야…….”

텅 빈 방, 순식간에 취해서 그런지 유진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리한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림프의 반주에 따라 울려 퍼지고, 그녀는 머그컵에 찰랑거리는 와인을 마시며 한껏 웃었다. 창문 밖에 초승달이 지고, 유진은 왠지 오늘 밤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잠시 노래를 멈추고 멜로디만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녀는 술에 취해 알딸딸한 기분으로 혼자서 왜 자신이 호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의 보컬 중 어느 부분이 매력적인지, 호웰에게 어떤 팬레터를 쓰고 있는지 혼자 중얼거렸다. 리한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살짝 한숨을 쉬고 자신이 노래를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유진의 중얼거림이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4. 마음의 선

대륙에서 제국의 영향력은 엄청났는데, 사실 제국의 힘은 황제에게서 온 것이었다. 제국은 옛날부터 그저 ‘제국’이었고, 이름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 자신감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왕족의 성을 따는 것은 왕국이나 공국이 하는 짓이고, ‘제국’은 그 자체로 유일하다는 주장이었다. 대륙의 마력을 갈무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핏줄이 있었으니 핏줄의 정통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 사람들은 공격 마법을 쓰지 못했는데, 제국 땅의 모든 마력이 황제의 것이었기 때문에 공격 마법을 쓴다는 것 자체가 황제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여 아예 금지 당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력 아이템에 대한 발전이 엄청나서 무역으로 인한 수입이 많았다.

황제가 거대한 마력을 독점할 수 있다는 뜻은, 어떤 땅으로부터 마력을 전부 뺏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스타람 섬이 바로 그 증거였다. 아주 오래 전이지만, 스타람 섬은 그 당시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마력을 온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스타람 섬 출생 사람들은 대륙에 오더라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본 대륙의 다른 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제국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황제의 능력은 핏줄을 타고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승이 확실히 되면 황족끼리의 다툼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황제만큼은 아니어도 황제의 직계 자식들은 일반인과 비견될 수 없는 마력을 쓸 수 있었지만, 황제를 죽이면 핏줄의 축복이 끊긴다는 오래된 신화에 따라 황자가 황제에게 반기를 든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아메탄 왕국 역시 제국에 충성했고, 황제의 힘인 마력에 대다수의 체제를 의존하고 있었다. 아메탄 왕족은 마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능력은 당연히 없었지만 황제에게 인정받았으므로 그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대륙 전체에 마력이 고갈되기 시작하며 이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지금 황제는 상당히 포악하여 폭정이 대단했고, 못살겠다며 튀어나오는 반란군들을 모두 제압하기에는 전체적인 마력이 부족했다. 반란은 3년이 지나도 진압되지 않았으며, 반란군은 공화정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를 죽이고 반란군이 새롭게 공화국을 세우면, 세습이 아닌 선거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