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110/256)

  

20화.

“이게…… 왜 여기에?”

공연을 끝내고 돌아온 리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진의 방 안에 쌓여 있던 타르안의 LP판과 공연 티켓, 각종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수사국 직원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언제부터죠?”

“아메니티에 올라온 이후부터입니다. 왕립마법대학 시절부터요.”

유진은 어차피 여기서 거짓말을 해 봤자 들통나면 더 큰일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천천히 진술했다.

“그냥 타르안을 좋아했고, 제가 대학 시절부터 타르안의 팬이었던 것은 제 친한 동기들 몇몇에게 물어보면 바로 나올 겁니다. 재무국의 린 아시에나 외교국의…….”

“구입 경로는?”

“…….”

“노엘 하이트 맞습니까?”

정확히 노엘의 이름이 나오자 유진은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네.”

지켜보던 체스트의 입에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체스트를 부축하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경로는 없고, 노엘이 중학교 동창이어서 그에게만 주문했습니다.”

“노엘 하이트에 대해서 더 아는 점은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최근 두 번, 노엘 하이트의 잡화점에 간 적이 있죠. 무슨 일이었습니까?”

“……리한의 림프를 사러 한 번, 리한의 물품들을 사러 한 번이었습니다. 생소한 물건들을 사려니 아는 사람에게 가고 싶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일주일 정도 전에 리한의 물품을 사러 갔을 때요. 그때…….”

유진은 자신을 끌어안았던 노엘의 팔이 생각나 한 번 몸을 떨었다. 아마 수사국에서는 그 포옹까지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다시는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한다고…….”

수사국 직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유진 유니트, 같은 산하기관 직원이라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심문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 노엘 하이트와의 접점이 그뿐입니까? 노엘 하이트는 저희가 다른 사건 때문에 추적하고 있는 거물 중 하나입니다.”

“……정말 모릅니다. 이게 다입니다.”

“그냥 대학 시절부터 중학교 동창인 노엘 하이트에게 타르안의 밀수품을 구입했을 뿐이라고요. 이 외에 아무런 특이 사항 없습니까?”

“예.”

정말로 사실이었기 때문에, 유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수사국 직원이 재차 말했다.

“만일 밀수품 검사 후, 단순한 타르안의 개인 수집품이라고 판단되면 단순한 벌금형으로 끝나겠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사안이 나오면 징계 사안입니다. 최소 정직 처분, 최대 징역까지요. 그런데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십니까?”

“예.”

“일단 밀수품은 모두 압수 수색 하겠습니다. 이상 없는 것이 밝혀지면 별다른 위험성이 보이지 않는 물품에 한해 돌려 드리겠지만, 거의 다 폐기처분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마음 편할 겁니다.”

그들은 리한의 방을 한 번 더 수색하고, 정말 별것 없다는 것을 밝히고 나서야 아쉬운 듯이 돌아섰다. 마력 검사까지 꼼꼼히 하여 수상한 마법의 흔적이나 마력 흐름이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수사국 직원들은 두 손 가득 타르안의 밀수품을 안고 나갔다.

* * *

그날 저녁 식사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유진은 체스트에게 하숙집에 밀수품을 들여서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사과했고 체스트는 그건 별로 문제가 안 되지만 앞으로 승진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냐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유진은 직속 사수인 아린스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고과를 잘 받을 것 같지 않아서, 그런 것들보다는 당장 벌금이 걱정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제가 어리석었죠.”

유진이 깨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런 말 하면 너무 없어 보이겠지만…… 노엘이 저는 당연히 보호해 줄 줄 알았거든요. 그 어떤 루트에서도 저는 추적 불가능하게 해 줄 거라고 했었어요. 산하기관 직원이니까 조금이라도 불이익 당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어요.”

리한은 그 때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고개 숙인 유진을 바라보았다.

“노엘 때문에 수사국에 불려 갈 수 있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렇지만 하숙집이 수색 당할 줄은 몰랐어요. 체스트, 정말…… 죄송합니다.”

“어휴, 정말 그 청년…… 어딜 보나 건실해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면 모르는구나. 밀수꾼이었다니…… 어휴…… 물론, 장사를 하다 보면 밀수에 손을 댈 수밖에 없어. 장사꾼의 딸인 나는 그걸 잘 알긴 하지만…….”

“……리한, 죄송해요. 그냥…… 말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타르안 팬이라고…….”

유진이 한숨을 쉬며 가까스로 말했지만 리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저녁 식사를 끝내고, 서둘러서 정리한 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침대에 걸터앉아 엉망인 방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옷장에는 옷이 겨우 다섯 벌. 제복을 입고 출퇴근했으므로 옷에 욕심을 내 본 적이 없었다. 그 돈으로 타르안 사진 한 장을 더 샀다. 이제 옷장은 물론이고 침대 밑과 책상 서랍도 텅텅 비어 있었다.

10년의 시간은 다 어떻게 된 것일까. 렌토에서 타르안의 공연을 본 뒤, 삶의 의미라고까지 생각했던 시간들이었다. 타르안이 해체된 것은 물론이고, 그 긴 시간 열심히 사 모은 밀수품들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장 친한 친구는 생사조차 모르고, 수사국에 쫓기는 것을 봐서 분명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게 뻔했다.

텅 빈 방이 마치 자신의 인생 성적표인 것 같아 유진은 우울했다. 별로 큰 방도 아닌데 유난히 허전했다. 유진이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리한?”

그가 와인 한 병과 머그컵을 가져와 그녀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림프를 풀러 자세를 잡고, 텅 빈 책상 의자에 앉았다.

“무슨 노래 듣고 싶어?”

“네?”

“이제 연기하지 말고. 팬이었다며.”

그녀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없었지만, 천연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편안하게 림프 줄을 한 번 튕겼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뭔데?”

“……2집의…….”

“아, 그때 그 노래? 렌토에서 들었다던? 저녁이니까 방음 마법 좀 쳐줘.”

리한의 긴 다리가 작은 유진의 책상 의자 앞으로 죽 삐져나왔다. 유진은 천천히 일어나 방음 마법을 치고, 홀린 듯이 머그컵에 와인을 따랐다. 원래 와인은 와인 잔에 따르는 것이 예법이지만, 스타람에서는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머그컵에 먹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왜 그동안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나 싶기도 했다.

사실 무기력도 우울도 나의 습관이야 그러니

나보고 기운 내라며 그 손을 내밀지 말아요

술이 달았다. 원래 후렴 부분은 음역대가 높은 호웰이 부르지만, 리한 역시 힘들이지 않고 울림 좋은 목소리로 편안하게 불렀다.

하지만 이런 나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야

내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결국엔 살아낼 거야

홀짝홀짝 술을 넘기다 보니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 컵을 다 마셔 버렸다. 유진은 머그컵에 다시 와인을 꼴꼴꼴 따르며 이 상황이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미래가 막막해서 시간이 무섭더라고

도망칠 기운조차 없으니 그저 버티고 있을게

노래를 부르거나 할 때 리한은 항상 무대용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이번 노래를 부르는 그의 얼굴에는 가사에 맞는 쓸쓸함이 가득했다. 유진은 와인을 넘기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빛에 빛나는 푸른 머리카락, 길쭉한 다리 위에 무심하게 올려진 림프, 길게 뻗은 손가락, 떡 벌어진 어깨와 깊은 눈매, 날카로운 콧날과 조각 같은 옆모습이 그림처럼 유진의 눈에 박혔다.

하지만 이런 나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야

내 두 발로 바닥을 디뎌 결국엔 살아낼 거야

노래가 끝나자 유진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머그컵에 남은 와인을 모두 마신 뒤 세 번째로 술을 따르는 그녀의 손이 거침없었다.

“……렌토에서 이 노래를 듣고…… 팬이 됐어요.”

유진이 리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아메탄에는 이런 내용의 노래도 잘 없고…… 잘생긴 남자들이 그렇게 그룹을 이루어서 춤을 추고…… 그런 것도 없어서…… 그냥 홀딱 반했거든요.”

“…….”

“당신이 아메탄에 왔을 때 내가 연차였던 건…… 타르안의 해체를 믿을 수 없어서…… 당신을 보러 간 거였어요. 정보가 잘못되어 다른 길로 가는 바람에 엇갈렸지만.”

“그럼 왜 그렇게 처음에 내게 적의를 보인 거지?”

“해체시킨 장본인이니까요…….”

“내 팬은 아니었나 봐?”

“……호웰 한니브의 팬이에요.”

“하.”

리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저는요, 사근사근한 사람이 좋아요. 말도 예쁘게 하고, 애교도 많은 사람이요. 그리고 제가 키가 작으니까 그쪽처럼 너무 키가 큰 사람도 싫어요.’

사근사근하고, 말도 예쁘게 하고, 공연 중에 애교도 많고, 가장 키가 작은 멤버가 호웰이었다. 리한은 잠시 말문이 막혀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물론…… 나머지 멤버도 좋아했어요. 그건 당연한 거죠.”

“아, 그래서…… 초록색 림프를 바로 사 왔구나?”

“……네.”

리한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초록색이었다. 그가 초록색 림프를 새삼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육류.”

“노래할 때의 버릇은?”

“오른쪽 발로만 장단을 맞추는 것.”

“내가 태어난 곳.”

“스타람 섬 북부, 아티올 산맥의 보육원.”

“……유진.”

“네.”

“왜 말 안 했어? 처음부터?”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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