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09/256)

  

19화.

“전하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물론 정황상 그냥 그놈의 무대에 감동을 받아서 즉흥적으로 신변 보호 명령을 내리고 잊어버리신 것 같은데…….”

“그때 노래를 기가 막히게 하기는 했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다 납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왕가의 행사에도 지금 계속 부른다면서요. 공화정에서 도망친 유명인……이면 뭐, 부를 만도 하지만. 사실 신변 보호 명령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 버림받은 왕정 옹호자들이 망명을 할 수 있는 유인이 되긴 할 겁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쳐도…… 2황자 일은…… 제국에서 우리가 신변 보호를 해 줬다는 걸 알게 되면 정말로 큰일인데…… 카이든, 혹시 아는 것 없어? 넌지시 말을 전해 들은 거라도?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야?”

“딱히 없습니다.”

“……리한 카드민, 이 자식하고 분명 연결이 되어 있는데…….”

그가 지도의 한 지점을 탁, 하고 짚으며 중얼거렸다.

“심증만 가득할 뿐이지 물증이 하나도 없네. 노엘 하이트와의 연결점은 없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노엘 하이트는 정말 주목할 만합니다.”

와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중학교 졸업 후 바로 밀수판에 뛰어들었고, 10대의 나이에 대담하게도 아메탄 왕국 전체를 대상으로 큰 사건을 꽤 많이 일으켰어요. 뒷골목 정보상에서부터 불한당들까지 노엘 하이트는 거물로 인정하더군요. 대다수의 꼬리들과 우리가 그를 ‘킹’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만큼. 숨겨진 재산도 대단하고, 알고 있는 정보의 양도 압도적이고, 이번 판에서는 스타람과의 거래를 미친 듯이 해낸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우리도 패를 하나 던져야지. 언제까지고 뒤꽁무니나 쫓아다닐 순 없는 일이야.”

그가 노엘 하이트의 사진을 테이블로 던지며 덧붙였다.

“전국에 수배령 내려. 자유로운 움직임이라도 막아야 해.”

* * *

토요일이었다. 유진은 오랜만에 오후 늦게까지 늦잠을 자고, 냉장고에 잊지 않고 마법을 걸어 두었다. 체스트가 마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마력을 공급하는 것은 유진의 몫이었다. 리한은 이미 나간 모양이었다. 그는 주말마다 갑자기 예약이 폭주하고 있는 왕립마법대학 연구홀에서 축가 무대를 해야 했다. 게다가 오늘은 축가 무대 이후에 왕녀의 생일 파티에서 노래를 한 곡 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어젯밤, 와인 한 병을 들고 리한의 방문에 기대어 리한의 림프 연주를 듣던 유진에게 리한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었다.

“국왕의 유일한 동생이면서 단 하나뿐인 왕녀라고 들었는데, 왜 조촐하게 생일 파티를 연다고 하지? 보통 무도회 정도는 열지 않나?”

“아.”

유진은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말하기엔 복잡하지만, 작년에 좀 왕족끼리 죽고 죽이면서 서로 난리쳤었어요. 원래 왕위가 다 피로 물든 자리니까 어쩔 수 없죠. 거기에 좀 얽혀 있어서, 무도회 열고 그러기엔 좀 찝찝해요.”

“……다 똑같군.”

“뭐가요?”

“권력의 자리는 다 똑같다고. 왕이든, 총통이든.”

“공화정도 그래요?”

“안 그럴 것 같나?”

“그럼 다 똑같은데, 왜 왕정 국가로 왔어요?”

“…….”

그 말에 리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은 와인병을 거의 다 비울 정도로 술을 마시고, 띵한 머리를 문에 기대며 물었다. 림프의 선율이 아름답게 방을 채웠다.

“저기, 리한.”

“왜?”

“초라하지 않아요?”

“뭐가?”

“수만 명의 팬 앞에서 공연하다가, 고작 결혼식의 축가를 부르고…… 왕녀의 생일 파티에서 노래하고…… 뭐 그런 것들.”

“……좋아.”

“네?”

“좋다고.”

리한은 달을 바라보면서 낮게 말했다.

“내가 아무런 영향력 없는 사람인 게 좋아.”

“어…….”

“물론…….”

그가 피식 웃었다.

“담당자가 내 연주를 고작 안주로만 삼을 때는 좀 서운하긴 하지.”

유진의 얼굴이 취기인지 아닌지 확 달아올랐다. 그가 유진을 보고 씩 웃었는데, 그동안의 웃음과는 다르게 이상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진은 그동안 계속 리한과 같이 살았지만, 그 순간의 리한만이 진짜로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렇게 술을 마시는 거야?”

“아.”

유진은 길게 늘어진 은발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 올리며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그냥…… 직장인의 유일한 스트레스 푸는 법이라서요. 술 마시면 밤에 잠도 잘 오고, 잡념도 사라지고, 또 리한의 연주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면 엄청 호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호사?”

“네. 왕녀님도 생일에만 들을 수 있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호사.”

“그런 말은 좀 웃으면서 하면 안 돼?”

“저는 진짜 좋을 때 아니면 안 웃어요. 누구랑은 다르게.”

“난 무대에서 안 웃으면 건방져 보여서 안 돼.”

“그래서 웃어도 웃는 것 같지가 않잖아요.”

유진은 툴툴거리며 빈 병을 들고 일어섰다. 사실 이렇게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다. 예전엔 방에 고이 모셔 둔 밀수품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고, 기준에 따라 정리해 놓고, 스타람에서 유통되는 팬픽 등을 읽고, 또 갖고 싶은 목록을 만들고 하느라 술을 마실 새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타르안이 해체되고 나서는 다섯 명이 있는 사진만 봐도 마음이 아픈데다가 노엘에게 물건을 받는 것도 멈춰서 딱히 밤에 혼자 할 취미 생활이 없었던 것이다.

출근 안 한다고 잔뜩 마셨더니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난 유진은 아직도 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부엌에서 천천히 물을 마셨다. 시계를 보니 벌써 조금만 있으면 리한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체스트가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내려오며 인자하게 웃었다.

“유진, 드디어 일어났구나. 간식 먹을래?”

“아뇨, 곧 리한이 올 텐데 저녁이나 같이 먹어요. 뭐 사 올까요?”

“아냐. 이미 장에 다녀왔단다. 그런데…….”

체스트가 우물쭈물하다가 다소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노엘 하이트? 그 청년…… 수배지에 붙어 있던데…….”

“네?”

“밀수범으로…… 어떻게 된 일이니? 사진 보니 그 청년 맞던데…… 어머!”

유진이 눈을 비비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컵을 내려놓고, 체스트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인 어조로 말하며 선반에서 치즈를 꺼낼 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수사국 직원 두 명이 들이닥쳤다.

“수사국입니다.”

“검문이 있겠습니다.”

“……네?”

깜짝 놀란 체스트가 손을 떨며 치즈를 떨어트렸다. 체스트는 수사국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이 갑자기 집에 들어오자 현실감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 수사국 직원들에 대한 말은 많이 들어 봤다. 여러 가지 비기를 쓰며, 산하기관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고, 국가의 범죄나 비밀을 다루고 있다는 사람들. 

유진이 차분하게 앞으로 나섰다.

“공문 주세요.”

그녀가 수사국 직원들의 앞에 서서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이 집에 사는 것, 알고 오셨지요? 당연히 공문 준비하셨을 거고요. 이미 두 사람뿐인 것 알고 계실 테니 급할 거 없잖아요.”

“여기 있습니다.”

유진은 수사국 직원이 내민 짧은 종이를 건네받았다.

[조사 항목: 스타람 섬 밀수품

관련: 봉쇄령 이후 스타람 섬 물품의 수입 금지에 대한 조항]

“……밀수품 이동 경로 중 주요 지점으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따라오세요.”

유진은 문서의 서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한숨을 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가 뒤를 돌아 벌벌 떨고 있는 체스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체스트, 죄송해요.”

“……유진?”

“죄송……해요. 사실…… 스타람 섬 물품을 좀…… 모았어요.”

“뭐?”

“기껏해야 벌금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것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법을 어겼으니 대가는 치러야겠죠, 뭐.”

수사국 직원들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자 당황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당연히 리한 카드민의 방을 수색하려고 마음먹었던 그들은 유진을 따라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 옷장이 전부인 그녀의 방은 깔끔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녀가 한숨을 쉬며 책상 서랍을 열자 서랍 가득히 타르안의 사진들이 나왔다.

“……이런.”

침대 밑에는 LP판을 비롯한 타르안의 앨범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으며, 옷장 속에 옷은 몇 벌 되지 않고 온갖 타르안 관련 물품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게 뭡니까?”

수사국 직원 중 하나가 혀를 내두르며 LP판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유진이 다 포기한 말투로 천천히 말했다.

“스타람에서는…… 전축이라는 기계가 있어서 이 판이 있으면 노래를 어디서든 재생할 수 있대요.”

“여기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걸 산 겁니까?”

“타르안의 것이니까요.”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건 아니죠.”

“……세상에.”

수사국 직원들이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도 안 나온다는 듯 망연히 투덜거렸다.

“어지간히 밀수품 단속을 했지만, 타르안의 밀수품이 이렇게 많은 건 또 처음 봅니다. 아니, 산하기관 직원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생각도 없었어요? 나 참…….”

“월급 남은 거 다 털었으니까요.”

유진은 따박따박 대답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수사국 직원들이 그 모든 물건들을 압수용 상자에 담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는 울컥하는 마음을 억지로 눌러 담았다. 물건 하나하나 모두 어렵게 구했고, 정리 방식까지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혹시 모르니 더 수색하겠습니다.”

“……네. 근데 정말 더 이상은 없어요.”

순식간에 유진의 작은 방에는 커다란 상자 속에 타르안의 수집품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체스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입가에 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어?”

유진은 이미 최악의 날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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