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08/256)

  

18화.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아이돌이 해체되고, 그 해체의 주인공과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이 블랙코미디 같았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그의 연주를 오롯이 혼자만 듣고, 이렇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니 인생은 또 모를 일이었다.

기분이 이상한 것은 리한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만 두고 이렇게 노래도 하지 않는 즉흥 연주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유진은 혼자 홀짝홀짝 술까지 마시고 있었다. 정말로 한 사람을 위한 공연인데 청자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그를 배경 음악 정도로 삼고 있었다. 아카날의 눈에 들어 데뷔하기 이전, 아주 초라한 술집에서 멤버들과 함께 연주를 했던 기억이 났다.

어쨌든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같이 둘러앉아 마늘 까기 같은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하고, 내일이면 잊어버릴 멜로디를 함께 듣고,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린스라고, 제 직속 선배가 있는데…… 제가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뭐, 저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상관은 없지만…… 저번에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처음부터 선배보다 일찍 퇴근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나.”

유진은 술이 알딸딸하게 취하면 이런저런 말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리한이 알아듣든 말든 혼자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노엘에게 하던 직장 생활의 푸념이었는데 이제는 들어 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사실 우리랑 수사국은 상극이거든요. 수사국에서는 저희를 음, 문서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앉아만 있는 샌님이라고 한다는데……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행정국이 꼬투리를 잡는대요. 하지만 누군가는 어떤 일을 할 때, 좀 엄밀하게 따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일만 무작정 벌여 놓으면 수습은 누가 해요?”

평소에는 과묵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 짧은 그녀가 술에 취해 종알종알거리는 모습을 보니 리한은 속으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결국 대놓고 웃어 보았지만 유진은 제가 웃는 것도 개의치 않고 뚱하니 재미도 없는 말들을 이어 갈 뿐이었다. 그녀가 딱히 대화를 하고 싶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리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림프 줄을 튕겼지만, 사실은 둘 다 남몰래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 일상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 * *

“미쳤어, 진짜 미친 거야.”

“어쩌면 좋아…… 제국이 무너지면 우린 어떡해?”

“멍청아, 황제가 무너질 리 있겠니? 제국의 역사가 자그마치 천 년이야. 이런 일들쯤이야 수백 번 겪어 왔을 거라고.”

“그렇지만 마력이 이토록 없는 건 처음이잖아.”

유진이 출근을 했을 때 행정국은 평소답지 않게 시끄러웠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옆자리 직원에게 물어보니, 오늘 외교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제국의 반란군들이 공화정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지역 영주들의 명단을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곧 임시 총독의 발표도 있을 것이라는 추가 성명이 이어졌다.

“이쯤 되면 반란군 세력이 엄청나다고 봐야지. 명단이 아주 빼곡하더래. 거의 반반?”

“그래도 제국군을 이기지는 못할걸요.”

커피를 마시던 직원 중 하나도 빠르게 대화에 꼈다.

“어쨌든 대륙에서 가장 마법을 잘 쓰는 사람이 황제고, 또 그 밑에 체계적이고 엄청난 군사들…… 공화정은 필연적으로 내분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시간 싸움이라고 봅니다. 반란군이 이긴다고 쳐요. 어느 세월에 나라의 초석을 다진답니까?”

“소문 못 들었어? 지금 반란군 중심이…….”

옆자리 직원이 한 바퀴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속삭였다.

“……2황자라잖아! 황제 친아들! 곧 발표한다는 임시 총독이 누구겠어?”

“네?”

“스스로 황족의 힘을 끊어 버릴 거래. 당연히 1대 통령이 되겠지.”

“진짜예요? 2황자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일을 해요?”

“모르지, 그건.”

유진은 굳은 얼굴로 대화를 듣고 있다가, 어제 마무리 짓지 못 했던 보고서를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황자가 반란군의 중심이라는 건 며칠 전 수사국 직원에게 들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직원의 말에 따르면 그 뒤에는 또 스타람이 있다고 했다.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남의 일이라며 넘겨 버릴 수 없는 것은, 아메탄 왕국은 실질적으로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제국에서 지원군을 보내라 하면 보내야 하고, 그 결과 패배한다면 또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게다가 왕국 내의 체제 문제도 있었다. 만일 제국의 제정이 무너진다면, 왕국의 왕정은 무사할 것인가?

산하기관이라는 특별한 기구가 있어서 독자적인 국가의 체계를 갖췄다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사실 아메탄 왕국의 생활양식은 아주 소소하게라도 제국의 가치관과 많이 맞닿아 있었다. 예를 들어 스타람 섬의 문화를 무시한다거나, 영지를 가진 귀족과 평민들의 신분 차이라든가, 아메탄의 왕은 대대로 황제를 섬긴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랬다. 그런데 그 제국이 무너져 혼란이 찾아오면 아메탄 역시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인에게 알려진 정보는 여기까지지만, 사실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유진은 보고서의 같은 줄을 계속 읽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대충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키탄에게 결재를 받으러 가자, 키탄은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다는 듯이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 이 부분 말인데.”

“네?”

“담당자는 특별 관리 대상의 신변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 이게 왕명이었다고?”

“네. 수정 불가능합니다.”

“하…….”

키탄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미안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러면…… 미안하지만…… 신변이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 때, 담당자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 이 정도 조항도 넣을까?”

“신변이 위험하다는 판단……이 좀 애매하지 않나요?”

“어쩔 수 없지. 신변이 위험하다는 판단은 담당자의 재량에 따른다고 해.”

“…….”

“물론 엄청 짜증나는 단어기는 한데…… 알지, 알아.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키탄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꼴이 만만치가 않아. 리한 카드민이 그냥 혼자서 얌전히 내려온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뭔가 분명히 관련되어 있어. 수상한 점 못 느꼈어?”

“……신변 보호 말고는 딱히 별생각이 없어서요.”

“사실 왕족들은 이게 문제야. 난 안 갔지만 그 결혼식에서 무대가 엄청났다며? 자기 기분 따라서 한마디 툭, 던져 놓고 사실 지금 기억도 못하실걸? 그런데 우리는 그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해야 한단 말이지.”

“과장님, 왕족모독죄예요.”

“뒷말도 못하냐?”

“그럼 공화주의자…….”

“너, 내가 편하게 해 주니까 보이는 게 없나 보다? 어디서 그런 불경한 소리를…….”

키탄이 신경질적으로 보고서에 대고 펜을 툭툭, 쳤다. 유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제가 결혼식 축가를 맡겼다가 이 사달이 벌어졌으니 책임질게요. 동행…… 대신 시간외수당은 청구할 수 있는 거죠?”

“출장비까지 청구해도 돼.”

그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수상한 상대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된단 말이야. 하, 하여간에 피곤한 일이야. 애초에 받을 때부터 외교국에 넘겼어야 했는데…….”

* * *

수사국에서는 아메니티의 지도를 펼쳐 놓고 촘촘하게 그려진 밀수 경로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수사국 과장 중 한 명인 와일스는 신속하게 몇몇 지점을 짚어 내며 짧게 말했다.

“아카날 총통의 배포 한번 대단하군. 대륙을 한번 뒤집어 보겠다는 건가. 하긴, 제국의 반란을 들쑤시고 있는 게 스타람인데, 아메탄을 가만둘 리 없지. 이기적인 놈들…….”

아메탄은 대륙에서 약소국의 위치기는 하지만 많은 나라와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제국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워서 다른 나라들이 아메탄을 통해 제국의 문물을 전수받곤 했다. 게다가 아메탄에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왕이 아닌 왕족들은 외국인과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외국과의 주고받는 영향력이 큰 국가였다. 한 번 제국을 건드리기로 결심한 스타람 정부에서 아메탄 왕국을 그대로 둘 리 없었다.

“물론 제 나라를 뒤집어엎으려는 더 이기적인 놈들도 널렸지. 아직도 소재 파악 불능이야?”

“가티 에르멜, 돌피 히스튼이 끝입니다. 나머지는 모른다고 버티고 있어요. 점조직 형태라 추적이 어렵습니다. 노엘 하이트…… 제일 월척일 것 같은데, 얼마나 꽁꽁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고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킹’이라고 불리는 것 같더군요.”

“킹……? 웃긴 놈들이야. 체제 전복을 꿈꾸면서 호칭을 그 따위로 붙여?”

“밀수꾼들답게 비겁한 움직임이죠, 뭐. 제국의 반란군처럼 군사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자본으로 밑바닥을 움직이려고 하다니…… 그런데 사실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공화정이 목표일까요?”

“더 조사하면 나오겠지. 스타람 물건들을 잔뜩 밀수해서 뭐 어쩌겠다는 건지…… 노엘 하이트와 유진 유니트의 관계는?”

“중학교 동창입니다. 유진이 두어 번 노엘의 잡화점에 들렀는데, 리한 카드민의 악기와 물품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마 남자 물품을 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유진 유니트가 도움을 받은 듯합니다. 그 이후 접점은 없었습니다. 유진 유니트는 워낙에 모범적인 직원이라…….”

“모범적인 직원…… 주관적이군. 어쨌든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기 이 스무 곳, 이곳은 분명히 주요 지점이야. 급습해.”

“어…… 그런데…… 여기, 브라만거리 32번지는…….”

“맞아. 그 스타람 쥐새끼가 살고 있는 곳이지. 유진 유니트의 하숙집이기도 해.”

와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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