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07/256)

  

17화.

“여하튼 그 노엘이라는 애, 나는 마음에 든다. 건실해 보여. 한번 놀러 오라고 해. 내가 저녁도 해 주고, 어디 한번 우리 유진을 맡겨도 되는지 관찰 좀 해 보마.”

유진이 보기에 체스트는 꽤 순수하며 어느 정도는 소녀 같은 면모가 있었다. 유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렇게 건실한 청년이 사실은 상당히 악명 높은 밀수꾼이며 수사국까지 붙을 정도로 위험하게 산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체스트.”

“왜?”

“저 혼자 살 거예요. 독신으로, 평생.”

“뭐? 아니, 왜? 연애도 좀 해 보고…….”

“해 봤어요. 별거 없던데요.”

“아니, 언제? 너 하숙집 들어오고 남자 끌어들이는 꼴을 못 봤는데!”

“그냥, 해 봤어요. 그저 그랬어요.”

차마 대학 시절에 연애했다고 말하지 못한 유진의 긴 속눈썹이 그녀의 볼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찌 되었건 체스트는 교수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쓸쓸하다고 느낀 체스트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이었다.

“그건 상대에 따라 다른 거지!”

“…….”

“예를 들어 리한 같은 잘생기고, 유명한 멋진 남자랑 연애한다고 하면…….”

“쿨럭!”

갑자기 리한이 너무 크게 기침을 하는 바람에, 유진도 체스트도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유진이 거의 질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기요, 저도 뭐 딱히 댁이랑 연애하고 싶지 않거든요?”

“아니, 나는…….”

“저는요, 사근사근한 사람이 좋아요. 말도 예쁘게 하고, 애교도 많은 사람이요. 그리고 제가 키가 작으니까 그쪽처럼 너무 키가 큰 사람도 싫어요.”

유진이 마지막으로 남은 마늘을 집어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밀도 많고, 말도 없고, 남들의 호의나 경외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댁 같은 사람 안 좋아하니까 걱정 말아요.”

“아, 잘됐네.”

리한이 칼을 탁, 내려놓으며 질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 주변에 있던 여자들은 꼭 나를 좋아하더라고. 근데 이번엔 담당자랑 공과 사를 아주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엄청 다행이지. 타르안 팬들이 아메탄에도 꽤 많았는데, 내 담당자는 타르안 팬도 아니고 또 나도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니까 말이야.”

유진이 살짝 뜨끔하여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동안, 체스트가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어휴, 우리 집 두 하숙생들은 어쩜 이렇게 성격이 똑같을까.”

“아, 무슨 소리예요!”

유진과 리한이 둘 다 짜증을 내며 동시에 소리치자, 체스트는 다 까진 마늘을 들고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둘이 똑같이 유치해지는 것까지.”

* * *

리한은 림프를 들고 의미 없는 멜로디를 천천히 치며 창가에 뜬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랄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삶이었다. 게다가 마늘을 까는 일이라니…… 아주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해 본 이후로 아예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일이었다.

국왕의 한마디에 리한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산책을 나가거나 할 때 시선이 몰리곤 했지만 오랜 시간을 공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체스트의 오래된 집을 여기저기 수리하고, 부엌일을 돕고, 갑자기 예약이 폭주하고 있다는 왕립마법대학 연구홀 결혼식을 위해 노래를 연습하고, 너무 늦지 않게 잠들었다.

스타람에 있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상이었다. 밤에는 편히 잠들지 못했고, 언제나 생각은 멈추지 않았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언제나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를 항상 비밀리에 만나고, 또 어딘가의 비밀을 두려워했다. 그의 밑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는 웃음을 지우고 군복을 입었다. 

신념을 지킨다고 생각해 임무를 완수하고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돌아보니 혼란 속에서 이용만 당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지휘하기로 했었던 지원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타람을 떠나기 직전의 리한은 자신을 향해 경례하고 있는 군인들만 봐도 공황 상태에 빠질 것 같았다.

림프의 멜로디 변주가 시작되며 더 풍성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치는 멜로디였지만 상당히 훌륭한 음악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지붕을 수리하고 마늘을 까고, 정기적으로 일을 하고, 하숙집 주인에게 스타람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나 하며,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평범하게 산다.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도 없고, 또 죽을 만큼 사랑한다며 달려드는 사람들도 없었다. 비밀리에 엄격하게 진행되는 훈련도 없고, 함께 음모를 꾸미는 일도 없다. 팬들에게는 항상 감사했지만, 사실 멀어지고 나자 어느 정도의 해방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여기서 그에게 가까운 사람이라고는 하숙집 주인인 체스트와 담당자인 유진뿐이었지만 하나도 사람이 그립지 않았다.

처음에 대놓고 적의와 귀찮음을 표현하던 유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확실히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해졌다.

‘리한, 날 믿어, 안 믿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리한? 어쨌든 공화정의 이념엔 너도 찬성하는 거잖아.’

‘리한, 널 믿어도 돼?’

‘리한, 거짓말 아니야. 그냥 네게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얽히고 얽혔던 수많은 관계 중에서 유진만이 믿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건 상관없고, 그저 기준과 문서에 따라서만 움직인다고 했다. 그녀는 리한을 보면서 리한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웃기게도, 리한은 그런 그녀가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어깨에도 오지 못할 만큼 작은 키에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파리한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믿음이 갔다. 비록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서, 어쩌다 보니 티격태격하게 되었지만.

그런데 오늘 체스트가 노엘인가 하는 남자 얘기를 꺼낼 때에는 기분이 좀 이상했다. 유진이 언젠가 결혼을 해서 더 이상 이렇게 매일 얼굴을 보는 담당자가 아니게 된다면 확실히 허전할 것 같기도 했다. 유진이 자신은 독신으로 할 것이라고 못을 박을 때 리한은 은근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냥 지금의 삶이 너무 좋은 거겠지. 그래서 그냥 하나라도 이탈되는 게 싫은 거야.’

의미 없이 그의 손가락이 림프를 날아다녔다. 밤하늘이 푸르렀다. 등불이 밤바람에 흔들렸다. 전기가 없는 이곳에서 마력 또한 없는 그는 분명 삶이 불편했다. 스타람은 마법이 전혀 발달하지 않은 대신 전기가 있어서 전축으로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전등이 있었으며, 사용료가 비싸긴 했지만 전화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마력이 없는 그가 느끼기에는 원시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탄생 이후 지금 이 삶이 가장 편한 것은 역설적인 일이었다. 그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밤이 늦어서. 다른 집에 민폐예요.”

“아.”

그가 손을 멈췄다. 편한 차림의 유진이 눈을 깜빡였다. 림프를 치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익숙하게 손을 들었다.

“그만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방음 마법 쳐 줄게요. 30분은 갈 거예요.”

“……고마워.”

“듣기엔 좋았어요.”

리한은 방음 마법을 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손으로 열심히 사방의 벽에 마법을 쓰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귀여웠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조금만 애교가 있고 사근사근했더라면 남자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을 법한데……. 하긴, 연애는 해 봤다고 했지.

“……안 나가?”

“아, 나가야죠.”

마법을 다 치고도 서성이는 그녀를 보며 물었더니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더니,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조, 조금 듣고 가도 돼요?”

“어?”

“……멜로디가 좋아서.”

그녀가 방문에 기댄 채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여긴 전축이 없어서…… LP판 같은 것도 재생을 못해요. 나 같은 평민은 이렇게 고급 연주를 들을 기회가 얼마 없다고요.”

리한은 속으로 몰래 웃음을 참았다. 그토록 귀찮아하며 표정 관리가 안 될 때는 언제고, 심지어 리한이 남자로서 별로라고 짜증을 낸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이런 요구를 하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망설였을지 상상이 되어 이상하게 귀여웠던 것이다.

“아, 뭐 별거라고. 얼마든지.”

그가 익숙하게 림프를 들어 올리고 손가락을 튕기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LP판은 어떻게 알아? 여기 사람들 그런 건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스타람에서도 전축은 너무 비싸서 진짜 고위급 사람들 아니면 못 써.”

“……어…… 체스트한테 얼핏…… 들었어요.”

유진은 눈을 피하며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리한은 아무런 이상함도 못 느끼고 무심하게 덧붙였다.

“너도 말 놔도 돼. 같이 사는 사이에.”

“싫어요.”

유진이 단호하게 바로 대답했다.

“전 담당자니까요. 이게 편해요. 사무적인 관계.”

“……그러든가. 거참, 편리하네. 담당자가 이토록 거리를 두고 싶어하다니.”

“…….”

“옛날엔 나하고 가까워지려는 사람 천지였는데.”

“그건 옛날 얘기니까요.”

“한마디를 안 지네. 빈틈이 없어.”

“행정국 직원에게 최고의 칭찬인데요.”

리한은 유진에게서 고개를 돌려 둥근 달을 바라보며, 아까처럼 림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문에 기대어 앉아, 리한이 연주하는 림프 멜로디를 가만히 들었다. 부드럽고 섬세하면서도 어딘가 구슬픈 멜로디가 풍성하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유진에게 사실 오늘 하루는 쉽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노엘은 생사를 모르고, 게다가 그가 오랫동안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전 남자 친구에게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녀가 스타람 물품을 밀수한 건 사실이었고, 그 밀수 자체가 어느 거대한 음모에 이용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엘이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미래가 전혀 예상되지 않아 불안했다.

‘우리는 어떤 역사적인 흐름 앞에 서 있어. 우리가 그러고 싶지 않아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시간이 흐르고 있단 말이야.’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리한의 연주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부엌에 가서 싸구려 와인을 꺼내 와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술과 음악이 있으니 유진은 자기 자신이 대단한 호사를 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한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고 연주를 계속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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