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유진은 손목을 한 번 더 들이밀며 짜증을 냈다. 이아크는 유진의 대학 선배였다. 한눈에 반했다며 쫓아다닐 땐 언제고 산하기관에 들어가자마자 유진을 찼다. 유진을 차면서 이아크는 두 가지 이유를 댔는데, 첫 번째는 유진이 너무 가난한 평민 집안 출신이라 자신의 발목이 잡힐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유진이 평생 독신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나름 합리적이었는데, 실제로 지금 유진은 월급의 대다수를 끝도 없이 고향에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유진의 취향이 너무 천박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큰맘 먹고 타르안을 좋아하며 밀수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지 한 달 만에 들은 말이었다. 유진이 조금 억울했던 건, 타르안을 좋아하는 평민들은 은근히 많았고 동기들 몇몇과는 실제로 밀수한 사진이나 팬픽 등을 돌려보며 꺅꺅댔기 때문이다. 결국 ‘취향이 천박하다’라는 건 귀족의 기준이었고 이아크는 그 기준에 맞춰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유진이 생각하기에 작위만 남은 이아크가 그렇게 고위 귀족처럼 취향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스웠다. 마력이 없는 땅에서 태어나 마법도 못 쓰는 미개한 국가의 사람을 무시한다는 이상한 풍조인데, 실제로 유진의 마법 실력이 이아크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유진이 조금 분통 터졌던 것은, 이성 교제를 금지한다는 학칙을 무시하고 몰래 연애한 것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답답하니 노엘에게만 얘기했는데, 노엘은 그게 꽤 충격적이었는지 가끔 이아크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놈 얘기 나오니까 말 돌리네. 아직도 친한가 봐?”
“……갑자기 노엘 얘기는 왜 나와?”
“내가 그때는 자존심이 상해서 말을 못 했는데.”
그가 천천히 서랍을 열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참 기분 더러웠어.”
“뭐가?”
그녀가 목소리를 죽인 채 반문했다.
“가난한 집 평민이라고, 취향 천박하다고 차인 나보다 더 더러웠겠어?”
“아마도? 난 1년 내내 그놈 때문에 짜증났으니까.”
“…….”
“친구? 웃기고 있네. 그 자식은 남자 친구가 있어도 네 주위를 맴돌고, 넌 주기적으로 그놈 만나러 가고, 참 옆에서 보기에 기도 안 찼지.”
“무슨 소리야? 걔가 물건을 파니 어쩔 수 없이…….”
“그놈이 널 보는 눈빛을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봤다면 그 소리가 나오진 않을걸.”
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며칠 전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던 노엘의 두 팔이 떠올라 말문이 막혀 버렸던 것이다. 10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때 노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모든 것이 수사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 포옹이고, 위험한 일에 몸을 담아 그냥 자기 혼자 긴장한 것이라고 억지로 넘겨 왔는데…….
“좋아한다고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주변에서 껄떡대는 꼴도 보기 싫고, 꼬박꼬박 만나 주는 너도 짜증나고……. 하여간 예쁘장한 애들은 얼굴값 한다는 걸 그때 알았지 뭐야. 너 결국 그 자식이랑 안 만나지?”
“헛소리야. 우린 그냥 친구…….”
“웃기지 마. 우리 만날 때부터 그 자식이 종종 널 상처 입히면 가만 안 두겠다는 둥 내게 시비를 걸어왔는데. 너한테 말 안 한 모양이지?”
“……그럼 왜 진작 말 안 했어? 사귈 땐 그런 말 한마디도 한 적 없잖아.”
“내가 귀족 출신인데, 그깟 평민 출신 밀수꾼을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어? 근데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니 알겠더라고. 넌 어차피 그 자식하고 만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그가 유진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외교국의 징표를 세게 꾹 눌렀다. 작은 빛이 나며 징표가 유진의 손목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너도 똑같아. 너도 밀수꾼하고는 안 만나고 싶은 거잖아? 그러니까 그 자식이 그렇게 주변에 맴돌아도 눈길 한번을 안 주지. 그래 놓고 헤어지고 나서 날 속물 취급하는 꼴이 좀 우습긴 했어.”
“그래서 나를…… 너랑 똑같은 사람 취급하면 네 마음이 편해?”
그녀의 손목에 빛이 모두 스며들고, 살짝 시원하던 느낌이 모두 사라지자 유진이 신경질적으로 손목을 빼내며 짜증을 냈다.
“네가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니까 나도 그렇게 보이나 본데…….”
“저기.”
유진과 이아크가 서로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할 말이 많은 건 알겠는데, 나도 좀 바빠서.”
“……리젠?”
며칠 전 결혼식의 주인공이자 유진의 대학 동기, 리젠이 싱긋 웃으며 밝게 말했다.
“외교국 징표 받으러 왔어요. 증빙서류는 여기 있고요. 최대한 빨리 부탁드려요.”
유진은 천천히 자리를 비켰고, 이아크는 살짝 민망해하며 리젠의 서류를 받았다. 리젠은 자연스럽게 유진이 앉았던 이아크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을 넘겼다.
“아, 요새 약초 밀수 업무까지 맡고 있는데, 결국 그러다 보니 외교부 협업이 필요할 수밖에 없겠더라고. 자꾸 타 부서 징표만 늘어.”
그녀가 발랄하게 말했다. 약제국에 몸을 담고 있는 그녀는 이미 수사국 협업 업무를 맡고 있다는 증거인 수사국 징표까지 다른 쪽 손목에 새겨 두고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난 가 볼게.”
리젠과 유진은 학창 시절에 딱히 친하지 않았다. 유진은 항상 발랄하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 리젠이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번엔 그녀가 적시에 나타나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설명 듣고 가.”
이아크가 뚱하니 중얼거렸다. 유진이 차갑게 대꾸했다.
“다 알아.”
“그래도 내 일이야.”
그가 툴툴거리며 말을 빠르게 이었다.
“외교국 징표는 외교국과의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애매한 일은 다 떠넘긴다는 뜻이지, 뭐.”
“타국에서 아메탄 산하기관의 공공 임무를 수행 중인 인물임을 보증하며, 신변의 위협을 받을 시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음을 상대에게 알릴 수 있으니 알맞게 활용하길 바라. 이 징표를 통해 정해진 마법을 걸면 타국에서 너의 위험을 아메탄 왕국으로 알릴 수 있지만, 알다시피 바로 선전포고이니 서로 피곤해지는 일이니까 되도록 하지 말고. 주재원으로 나가는 자국민의 보호 때문에 형식적으로 문서화한 거지, 정말로 너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겠지?”
유진은 아무 대답도 안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뒤를 돌았다. 어차피 행정국 말단인 유진이 외국에 나갈 일은 없었으니, 그냥 일만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권한이 늘어난다는 것은 일이 많아지고 책임지는 범위도 넓어진다는 의미였다.
한숨 쉬고 뒤돌아서 나가는 길에 이아크의 시선이 느껴졌다. 1년 남짓한 연애였고, 서로 좋은 기억도 많았고, 학칙을 어길 정도로 좋아했던 그녀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또 소중했던 관계가 결국 증오와 비꼼으로 남는다는 건 역설적이었다. 가까웠기 때문에 서로의 가장 약하고 추악한 부분을 알고, 또 그 부분을 헤집으며 헤어졌기에 남보다도 못했다.
‘어차피 다 망해 버린 귀족 작위 붙들고 있어서 뭐하게? 이제 산하기관 가니까 가문 괜찮은 귀족 여자랑 만나서 신분 세탁 좀 하시려고?’
생각해 보니 유진도 가만히 헤어져 주지는 않았다. 나름 그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은 잔뜩 하고 뒤돌아선 기억이 선명했다. 게다가 노엘……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지만…….
나도 좋은 여자 친구는 아니었구나. 행정국으로 돌아가는 유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시는 외교국에 올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 * *
유진이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하숙집에 돌아갔을 때, 체스트와 리한은 마늘을 까고 있었다. 유진은 옷을 갈아입고 묵묵히 둘 사이에 앉아 마늘 까는 기구를 찾아 들었다.
“어?”
리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진이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슥슥 마늘을 까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약간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로 하니까 오래 걸리죠.”
유진의 당연하다는 말에 체스트가 멋쩍게 웃었다.
“저건 마력이 필요한 아이템이야…… 우리는 잘 못 써. 칼로 해야 하지.”
“체스트도 조금 쓸 수 있지 않아요?”
“조금…… 근데 난 답답해서 차라리 칼이 낫더라고.”
체스트가 한숨을 쉬었다.
“젊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샌 정말로 마력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구나.”
“저도 어렸을 때보다 훨씬 힘들어요.”
유진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마력이 정말 너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요새 그래서 마력 아이템이 생각보다 안 팔린다고 노엘이 말한 적 있어요.”
“노엘? 그 젊은 친구 말이냐?”
체스트의 눈이 반달로 휘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한 번 오고 안 오지?”
“걔가 여길 왜 와요?”
“뭐…… 유진, 일만 하지 말고 연애도 좀 하고 그래라. 좋을 때잖아.”
체스트의 말에 유진이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체스트는 저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난 결혼을 못한 거고. 누가 마력 아이템도 제대로 못 쓰고, 없어진 학문이나 공부하는 예쁘지도 않은 여자랑 결혼하겠니? 하지만 넌 얘기가 다르지.”
“…….”
“못 이기는 척 넘어가. 멀끔하게 잘생겼고, 잡화점 주인이면 먹고살 걱정도 없을 텐데. 내가 거상의 딸이었다는 걸 잊지 마라. 상인들이 은근히 돈이 참 많아. 괜히 귀족 나부랭이한테 가서 속 썩지 말고…….”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걔는 저 여자로 안 봐요.”
“그럴 리가.”
체스트가 어깨로 유진을 툭 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우리 유진 유니트 정도면 남자들이 좋아할 만하지. 예쁘장하고, 얼굴은 귀엽고, 산하기관 직원이니 보장된 엘리트에…….”
“……듣기 민망해요.”
“그렇지 않아? 리한 씨?”
말없이 마늘만 까고 있던 리한은 체스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둥그런 유진의 녹색 눈과 마주친 그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언제나 시선을 먼저 돌린 건 유진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리한은 자신이 항상 띠고 있는 웃음도 어색함을 자각했다.
“……글쎄요.”
그가 마늘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귀여운 외모인 건 사실이지만 애교라고는 하나도 없고…… 엘리트라지만 너무 딱딱하고…… 잘 웃지도 않고…….”
“저기요.”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갑자기 할 말이 많으신가 봐요.”
“……뭐, 그래도 믿음직스럽죠.”
“나 참. 감사합니다.”
유진이 까진 마늘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빈정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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