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적절히, 별일 없이, 끈질기게…….”
어차피 모르는 것, 그녀는 불안에 자신을 내몰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 처리해 가면서, 흔들리지 않고 그냥 사는 거지, 뭐.”
그녀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하숙집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역사에 어떤 거대한 흐름이 밀려오고 있다고 해도 그녀가 뭘 어쩌겠는가. 그래도 비현실적인 꿈 하나만 꾸자면, 유진은 역시…….
타르안의 공연을 죽기 전에 단 한 번만 보고 싶었다. 해체했다고 하더라도, 리한이 스타람을 버리고 망명해 왔다고 해도, 멤버들이 모두 사상범으로 감금되어 있다고 해도, 다들 죽은 건 아니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재결합을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그것 외에는 딱히 아쉬울 것도 없었다.
“유진 유니트!”
잡화점 문이 활짝 열렸다. 유진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커다란 종이봉투를 안은 그녀를 노엘이 와락 끌어안았다. 지나가던 어린아이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홱 밀치려는데, 그녀의 귓가로 노엘이 작게 속삭였다.
“이제 당분간 우리 가게에 오지 마. 지금도 감시가 붙었어. 그리고 리한 카드민을 얼른 내보내. 그 자식하고 떨어져.”
“왜?”
그녀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넌 이 모든 일에서 빠져. 너야말로 오래 살란 말이야.”
“리한 카드민을 담당하는 건 나의 일이야.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해. 리한이 왜 위험한데?”
“몰라.”
“너 장난해?”
“잘 들어, 유진. 우리는 점조직이라 서로를 모르고 일을 진행 중이야. 그래서 더 불안하다고.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어떤 위험을 끌고 왔는지 파악이 안 되는 자식이 네 옆에 있으니까 미칠 것 같은 거야.”
“정치적 망명이라고 했어.”
“그 말을 누가 믿어? 당장 반란군에 협력해도 이상하지 않은 놈인데.”
그녀를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봉투 너머로 그의 거세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유진은 그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어쨌든 아메탄 왕가를 위해 충성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되면 그를 고발해야 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노엘은 그런 난처한 상황을 각오하면서도 그녀에게 ‘어떤 일이, 그것도 점조직으로 진행될 만큼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오로지, 리한을 멀리하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
“조만간 기회 되면 연락할게. 혹시나 심문을 받으면, 내가 다시는 널 볼 수 없을 거라고 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고 서술해. 조심히 가.”
3. 위로하는 방법
유진은 업무 과다로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고, 지쳐 있다는 것을 절대 숨기지 않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야근하곤 했다. 행정국은 비상사태 빼놓고는 야근이 잦은 기관은 아니었지만 요즈음 유진은 이틀에 한 번꼴로 퇴근이 늦었다. 원래 점심도 대충 먹으면서 밀도 있게 일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상사 눈치 같은 건 전혀 보지 않고 벌떡 일어나 나가는 것이 유진의 일상이었는데, 요즈음은 퀭한 눈으로 늦게까지 서류를 뒤적거리기에 바빴다. 리한의 일 때문이었다.
국왕 다니엘이 리한의 무대를 상당히 감명 깊게 보면서, 각종 국가 행사에 종종 동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쳐 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상당히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는데, 공화정을 탈출한 리한 카드민의 존재 자체가 왕정을 단단히 지지하는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덕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조항을 계속 손봐야 했다.
어차피 하루가 멀다 하고 쫓아가서 타르안의 밀수품들을 사던 때에 비하면 사실 야근을 해도 시간은 많았다. 그리고 유진은 너무 오랫동안 타르안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빈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노엘을 만날 수도 없었다.
“유진 유니트, 잠시.”
보고서를 읽고 있던 키탄이 유진을 불렀다. 유진은 주섬주섬 퇴근 준비를 하다가 속으로 한숨 한 번을 쉬고 키탄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기안문 중에, 이 추가 조항 말이야…… 특별 관리 망명 대상이 국가 행사에 동원될 때의 기준.”
“네.”
“주체의 기준은 직계 왕족…… 범위를 정해 놓은 건 잘한 일이지. 왕족의 온갖 사돈의 팔촌 생일잔치에 불러 대는 꼴 나지 않게 말이야. 지급액은 산하기관 기관 시급의 30%에 준하고 식비와 교통비를 포함…… 이것도 뭐, 우리가 기본 생활비를 지급하니 파견직에 준하는 대우라 합리적이고. 그런데, 이거.”
키탄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의 보고서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치적인 내용의 공연이나 예술은 하지 않도록 한다? 이건 왜 들어간 거야?”
“지난해 최종 재판 문서를 정리하다가 불현듯 생각나서요. 망명한 외국인들은 분명 다 리한 카드민처럼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일 텐데…… 정치적인 행보에 쓰일 수도 있잖아요.”
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예를 들어 다니엘 전하를 찬양하는 노래는 부를 수 있다고 쳐요…… 그렇지만 지금 전하의 형님 되시는 루벤 왕자님이 또 반대되는 노래를 부르라고 시킬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또 반대인 것과 반대가 아닌 것의 기준이 필요하고…… 아예 막아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흠.”
“작년에 테스티 왕비님 쪽 사람들 다 지금 어떻게 됐는지 생각을 해 보면…… 어쩌면 신변 보장의 조건에 이 사안이 포함되는 것 같아서.”
“합리적이네. 산하기관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니 산하기관에서 담당하는 특별 관리 대상도 중립을 지켜야지. 괜히 얽혔다가 우리까지 피 볼 수도 있으니까.”
키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1년 전에 있었던 왕족끼리 죽고 죽이며 난리도 아니었던 그 왕위쟁탈전이 생각나 그는 한 번 몸을 떨었다. 현재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굴러가고는 있지만, 지금 국왕 자리에 다니엘이 앉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행정국 직원답게 정치 같은 것에는 발도 들이밀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유진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훌륭해. 여기까지 생각해 내고.”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 더 많겠죠.”
“하지만 모두가 리한 카드민처럼 예술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 더 범용적인 표현으로 바꾸고, 권고가 아닌 의무 사항으로 바꿔. 아메탄 왕가에 충성하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의무를 가진다, 정도로.”
“네.”
“아, 그리고 아직도 외교국 협업 징표 안 받았던데 빨리 받아. 지금은 퇴근했을 테니 내일 아침엔 꼭 받도록 해.”
* * *
유진이 외교국 징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질질 끌어온 것은 그녀가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키탄이 한 번 더 말한 이상 어쨌든 가서 징표를 받아 오긴 해야 했다.
유진은 다음 날 아침, 제발 이아크가 외근이나 출장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아크 텔시는 유진이 왕립마법대학을 다닐 시절에 1년 정도 사귀었던 남자 친구였다. 왕립마법대학의 경우, 이성 교제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예전에 사귀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대학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 린 아시에 외에는 산하기관에 아무도 없었다.
이아크의 특이한 점은 그가 귀족 출신이었다는 점인데, 산하기관에 들어오는 귀족들은 보통 세 부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그저 학문이 좋아 취미 생활로 다니는 귀족들인데 보통 왕족들과 친하게 지냈고 졸업 이후에도 산하기관에 임관되지 않는 부류였다. 그들은 다시 자신이 속한 귀족 세계로 돌아갔다. 두 번째는 지방의 귀족 자제들 중 영지를 물려받을 의지가 없고 수도로 올라오고 싶어하는 경우였다. 아메탄은 수도인 아메니티와 지방의 격차가 상당한 국가였기 때문에 종종 영리한 지방의 귀족들은 산하기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세 번째는 가문 자체는 몰락했으나 귀족의 작위가 남아 있는 경우였다. 이들은 왕립마법대학을 통해 왕족이나 학문을 좋아하는 귀족들과의 인연을 맺기 위해 입학했고, 실질적으로 생계를 잇기 위해 산하기관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아크 텔시는 세 번째 경우였다.
“아, 오랜만이야.”
외교국 징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자 재수 없게도 이아크 텔시에게 인계된 유진은 히죽거리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쳐야만 했다. 징표 담당이 하필이면 이아크였던 것이다. 유진은 무표정으로 말없이 팔목을 내밀었지만, 이아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증빙서류부터 줘야지. 절차는 절차니까.”
유진은 말 한마디 섞기 싫다는 듯이 보고서를 내던지듯 그에게 건넸다. 이아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고서를 확인하더니, 씩 웃어 보였다.
“좋겠네, 유진 유니트. 네가 그토록 사랑하던 타르안 아니야?”
“…….”
“평민 출신들은 하여간 천박한 문화에도 거부감이 없어.”
“며칠 전에 전하가 리한 카드민의 무대를 보고 극찬하셨어.”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전하도 거부감이 없으신 것 같던데, 왕족모독죄로 넣어 버릴까?”
“한번 그래 봐.”
이아크가 느물느물하게 대답했다.
“네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타르안 물품들 차곡차곡 밀수한 거, 바로 고발해 버릴 테니까.”
“해 봐. 벌금 그까짓 거 내고 말지.”
그녀는 무던하게 대답했다.
“이성 교제 금지 학칙을 어겨 가며 신입생한테 껄떡거렸던 누군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안 들켜서 다행이지, 들켰다면 징계 받아서 수석 자리 놓칠 뻔했어.”
“같이 어긴 거야. 너도 다 알면서 받아들인 거잖아.”
이아크는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렸다.
“천하의 유진 유니트가 벌금은 쉽게 내겠지. 그런데 네 빌어먹을 중학교 동창 놈은?”
“외교국 한가한가 봐. 안 바빠? 빨리 나 처리하고 보내 주지 그래? 그리고 넌 안 바쁠지 모르지만 난 엄청 바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