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04/256)

  

14화.

“……뭘?”

“수사국 직원한테 공격받을 때, 나를 뒤로 숨겨 준 것. 뭐, 애초부터 날 노린 건 아니었지만 말이에요.”

“…….”

“굳이 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관계인데…….”

“왜 지키지 않아도 되는 관계야?”

리한이 싱긋 웃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마주치자, 순간 심장이 두근거려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아직 마음의 준비 없이 그를 보면, 타르안의 리더가 그녀의 옆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패닉 상태가 되었다. 리한이 결혼식 축가에서 홀린 건 리젠과 다니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축가 중에 그와 눈이 똑바로 마주쳤을 때를 잠시 회상하기만 해도 몸이 간지러웠으니까.

“내 담당자인데.”

“송구스럽네요.”

유진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딱딱하게 말했다.

“과거엔 스타람 총통의 오른팔이었고, 현재는 노래 한 곡으로 국왕의 인정까지 받은 대단한 가수의 담당자라기엔 제가 너무 평범해서.”

“아니, 유진.”

리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상한 말이지만…… 난 그 사람들보다 널 더 믿어.”

“믿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저는 그냥 문서 작업과 행정 업무 처리만 할 뿐인데. 만일 전하가 당신을 수사국에 당장 넘기라고 명령하면, 전 즉시 넘길 건데요?”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

“이건 솔직한 말이었어. 진짜야.”

유진은 멀뚱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전하께서 정말 그 무대가 마음에 드셨나 봐.”

유진은 선반에서 오선지 몇 개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혹시 행사가 생기면 부르고 싶다고 하셨고…… 그 바람에 특별 행사 예산까지 편성됐어. 당장 다음에 아셰 왕녀님 생신 기념 파티부터.”

노엘은 턱을 괴고 잡화점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지만 유진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번에는 체력 단련에 필요한 남성용 아령 등을 살펴보았다. 유진이 말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요새 타르안 물품은 밀수 못 하지?”

“……당연하지. 아예 해체했는데. 왜, 더 갖고 싶어? 특별 부탁하면 예전 물건이라도…….”

“아니.”

그녀가 방음 마법을 약하게 치며 말했다.

“수사국에서 타르안 물품들을 눈가림 삼아 대거 자본의 이동이 있었다고 하더라. 혹시, 너도 관련이 되어 있어?”

“…….”

노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진의 질문에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유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노엘을 포함한 밀수업계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노엘의 가게에서 본 수상한 사람들의 실루엣이 불안하게 떠올랐다. 수사국이 붙은 것을 보아 가벼운 일은 아니다. 유진은 생각을 억지로 참으며, 고른 물건들을 와르르 계산대에 쏟아 내렸다. 오선지 몇 장, 아령과 철봉 몇 개, 남성용 면도 크림…… 노엘이 짜증을 냈다.

“그 자식 물건을 왜 네가 사? 본인이 직접 오라고 해. 체스트에게 부탁하거나.”

“오늘은 할 말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온 거야.”

“할 말?”

“노엘 하이트.”

그녀가 종이봉투에 물건을 담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노엘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서, 잡화점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저 눈속임을 하는 가게답게, 노엘의 잡화점은 가격 경쟁력이 없어 그다지 잘 되는 편이 아니었다. 손님 하나 없는, 햇살도 잘 들지 않는 좁은 잡화점 안에 뻐꾸기시계가 정각을 알리며 울었다.

“우리 둘뿐이지, 렌토에서 아메니티로 올라온 중학교 동창은.”

“어.”

노엘이 낮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리한 카드민이 온 이후로, 그는 왠지 유진을 보면서 예전처럼 유들유들하게 농담을 칠 수가 없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노엘은 유진에게 느물거리는 장사꾼처럼 굴었다. 유진이 대학에 들어가 첫 남자 친구를 사귈 때도 그는 유진에게 아무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며칠간 그는 표정 변화 없는 유진에게 신경질만 내는 것 같았다. 노엘은 그런 자기 자신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감정 기복을 티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아메니티 땅값이…… 평민이 함부로 올라올 곳은 아니잖아.”

그가 묶지 않아서 단정하지 않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너같이 엄청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산하기관에 들어가거나, 나처럼 장사로 대단히 성공하지 않으면 평생 밟기도 힘든 땅인데.”

“그러게. 그럼 우리 둘 다 성공한 건가.”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

노엘은 거칠게 수염을 매만졌다.

“네가 소처럼 열심히 버는 얼마 안 되는 돈은 다 고향의 혈육들에게 돌아가고, 귀족들에게는 아직도 무시당하고. 아니, 이아크 같은 놈에게 평생 무시당하겠지. 그렇다고 평민들이 네 편인 것도 아냐. 대다수의 평민들은 널 질투할걸. 같은 평민인데 어쨌든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며, 고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야. 원래 이름 모를 사람이 거하게 해 먹는 건 괜찮아도 옆집에 살던 애가 나보다 조금 잘 사는 꼴을 못 보는 게 인간이니까.”

“…….”

유진은 고향인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자주 가지 않았는데, 노엘이 정확한 이유를 말했기 때문이었다. 산하기관 직원들이 너무 많은 권리를 갖는다고, 월급이 많다고 짜증을 내는 것은 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성적 경쟁에서 밀린 수많은 평민들의 불평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는 성공했느냐, 그것도 아니지.”

“왜, 돈은 어마어마하게 벌었으면서.”

“귀족 나리들께서…… 수틀려서 세금 비율 왕창 높이면 또다시 사라지는 돈이야. 돈이 많으면 뭐해? 평민이 영지라도 하나 샀다간 바로 재무국에서 자금 출처에 대해 조사 나올 거고, 내일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 빌어먹을 평민 신분 때문에 정책결정권이 없으니까. 아 씨, 왜 또 다 아는 얘기를 하게 만드는 거야?”

“…….”

“알잖아.”

노엘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그녀의 얼굴을 흘끗 보고 아무렇게나 담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체계 안에서, 너랑 나 같은…… 배경 하나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패배자야. 네가 평민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어도 결국 돈 좀 받는 왕가의 수족밖에 더 돼? 여전히 그 외교국에 있다는 거지같은 놈은 너랑 자기가 똑같은 신분이라고 생각 안 할 거고…….”

“그 인간 얘기는 갑자기 왜 자꾸 해? 이미 잊고 산 지 오래인데. 그리고 그 인간이 귀족이라서 우리가 헤어진 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귀족이었어도 그 자식이 널 찼을 것 같아?”

“그만해.”

유진은 한숨을 쉬었다. 예전 남자 친구 얘기나 하자고 노엘과 대화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뭐, 나도 썩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일에 대한 기대보다는 나쁜 일에 대한 걱정으로 사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각종 생필품이 담긴 봉투를 들어 안으며 조용히 말했다.

“태어난 김에 사는 거긴 해도, 딱히 성공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어도, 그래, 네 말대로 나보다 잘난 것 하나 없지만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무시했던 예전 애인에게 차였어도…… 그래도 패배자라는 생각은 안 해. 물론 내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난 적절히, 별일 없이, 끈질기게 살 거야. 그러니까 노엘, 너도…….”

그녀의 초록색 눈이 노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 중학교 교복을 입고 만났을 때부터 자그마치 10년이다. 그때와 유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도 키가 작았고, 잘 웃지 않았으며,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오래 살아.”

노엘은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네 인생은 네 인생이지만…… 몸조심하라는 말은 하고 싶었어.”

유진은 낑낑거리며 나무로 된 문을 몸으로 밀었다. 문 위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소리를 냈다. 오후의 햇빛이 밀려들어 오며 유진의 은발에 반사되어 빛났다. 노엘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내 제일 오래된 친구니까, 너무 일찍 죽으면 좀 슬플 것 같아.”

노엘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유진은 가게 밖을 나섰다. 부산한 아메니티 거리에 유진은 가만히 서 있었다. 노엘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그녀에게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며, 할 말이 없다는 것은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는 뜻이었다.

여전히 아는 것이 없었고, 노엘에게 더 이상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순간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친한 친구 노엘도, 자신이 정말 좋아했던 가수 중 하나인 리한도, 분명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든, 진실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약하게 친 방음 마법은 어느새 풀렸다. 대륙에서 마력이 사라지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선택 과목이 마법이었던 그녀는 피부로 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나온 최고 엘리트 대학 기관이자 왕족 교육 기관인 ‘왕립마법대학’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메탄 왕국은 여전히 마법 기반의 국가였다. 황제에게 강력한 마력이 세습되어 절대 제정을 누리고 있는 제국보다는 덜하다 해도, 귀족과 왕족의 권위가 확실히 마법에 기대어 있는 측면이 있었다.

대륙에서 마력이 사라지면서 가장 먼저 흔들린 건 역시 제국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황제의 강력한 마법 몇 번이면 반란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제국에서는 마력을 황제의 핏줄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00여 년 전 제국에게 대항해 보려다가 황제의 분노 때문에 스타람 섬은 영원히 마법과 마력이 사라져 버렸고 그에 따라 삶의 질이 상당히 하락했다. 그런데 지금 포악한 황제를 물리치자며 일어난 반란군이 몇 개월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을 간단히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황제의 마법도 약해졌다.

모두가 별다른 주목을 하고 있지 않지만, 사막 국가 한스팀에서도 마력이 점점 더 사라지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흑마법 기반의 국력이 급격히 기울면서, 각자의 신을 모시던 소수 부족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신의 축복을 받아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유랑 민족들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흑마법이 사라졌을 때의 통치 기반이 흔들릴까 봐 사전에 대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유진은 망명 대상의 처우를 조사하다가 오래 전에 일어났던 한스팀의 소수 부족 대학살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살고 있는 작은 왕국, 아메탄은 과연 마력이 사라지는 이 시대를 평화롭게 지나갈 수 있을까. 역사는 돌고 돈다지만, 결코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공화정을 이룩하고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스타람의 과학 문명, 반란군의 배후에 있다는 제 2황자, 아메탄에서의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자금 움직임…… 유진은 모든 것을 몰랐고, 또 그 흐름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한낱 평민 출신 공무원에 불과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