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03/256)

  

13화.

“학교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한 바퀴 돌고 가려고 왔지. 다들 똑같은 마음인가 보네.”

리젠은 환하게 웃고, 유진의 옆에 멀뚱하게 서 있던 리한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축가 너무 잘 들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대륙 단위로 유명한 가수가 저희 결혼식에 노래를 해 주었다니, 그것도 최초로! 가문의 영광으로 간직해야 할까 봐요.”

“마음에 드셨어요? 다행입니다.”

“마음에 든 것 정도가 아니고…… 정말로 영광스러울 정도로, 음, 이런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찬란했어요. 저도 앞으로 팬 하려고요.”

리젠이 쾌활하게 말하며 깔깔 웃었다. 유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같은 무대를 보았는데, 리젠은 숨김없이 자신의 감상을 말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아마 타르안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반응이겠지. 유진은 자신이 타르안의 팬이 아니었다면, 리젠과 똑같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리한을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련하겠어.”

남편인 카이든이 리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한숨을 쉬었다.

“옆에 신랑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홀린 듯 무대만 바라보고 있던데.”

“그건…… 음…… 아, 변명은 안 할게. 미안하게 생각해.”

리젠은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깔끔하게 사과했다. 유진은 카이든에게 방금 수사국의 남자가 다녀갔던 일을 캐물을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럼 우린 가 볼게. 오늘 와 줘서 고맙고, 축가도 정말 감사했어요.”

리젠이 손을 흔들며 카이든과 함께 뒤를 돌았다. 유진은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리젠.”

카이든과 함께 걸어가던 리젠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뒤를 돌았다. 결혼식 때와 다르게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의 그녀는 평소처럼 발랄하고 쾌활해 보였다. 유진은 눈을 잠시 내리깔고 있다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동기들 말은 신경 쓰지 마.”

“…….”

“……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니까.”

아까 동기들과 밥을 먹다가 소동이 났을 때, 유진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려 나갔었다. 가까운 모퉁이를 바로 돌자 리한이 있었다. 그리고 리한이 맞을 뻔한 계란 파편을 맞을 정도로 리젠이 가까이 있었던 것을 유진은 볼 수밖에 없었다.

‘리젠 하카트, 완전 영악한 계집애.’

‘학교 다닐 때도 사람 완전 가려 가면서 사귀더니, 결국 귀족 출신을 채 가네. 성격 좋은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왕녀님이랑만 붙어 다녔잖아.’

‘루스가 멀긴 해도 굉장히 알짜 땅이라더라. 학창 시절에는 서로 경쟁하느라 정신없다가, 카이든만 한 남자 없었나 보지?’

그들의 대화를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었던 위치였고, 그녀의 얼굴을 살펴봤을 때 대화를 다 들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유진의 담담한 말에 리젠이 살짝 웃었다.

“괜찮아, 뭐. 다 틀린 말도 아닌데.”

“맞든 틀리든…… 대다수는 뭐, 별로 관심도 없어. 나도 관심 없고.”

실제로 그녀는 동기들 사이에서 ‘사정도 모르면서 남 얘기 함부로 하지 말라’라는 일침을 가해서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리젠과 친하지도 않았다. 만일 리젠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와 리한에게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유진은 딱히 이런 말을 할 계획도 없었다. 유진은 살짝 머쓱해져서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행 잘 다녀와. 결혼은 안 부러운데 특별 휴가는 부럽다. 그럼 잘 가.”

리젠만큼이나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사람은 리한이었다. 위로라기엔 너무 무미건조하고, 변명이라기엔 너무 솔직했다. 어색하게 또다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유진의 옆에 서서 리한은 이 여자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일을 엄청 하기 싫어하는 여자인 줄 알았다. 그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어 보였고, 지금까지도 그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그런 건 좀 기분은 나빴지만 크게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를 보고 이토록 무표정인 여자도 처음이었지만 한결같이 뚱한 태도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도 의외였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유진은 키가 그의 어깨까지도 오지 않았다. 앳되어 보이는 통통한 볼살과 인형처럼 동그란 눈, 어린아이 같은 몸집을 가져서 굉장히 귀여운 외모인데도 귀여운 짓이라고는 하나도 안 한다. 말투도 퉁명스럽고, 웃는 모습도 못 봤다. 그가 기선 제압을 시도했을 때 그 작은 몸으로 욕지거리를 하기도 했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약한 몸을 가진 여자인데…….

‘행정국의 유진 유니트, 리한 카드민의 담당자입니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공무집행 방해로 징계 사안입니다.’

이상하게, 자신의 앞에 선 그 작은 여자가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제게는 특별 관리 대상자의 신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팔 하나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그 작은 여자의 존재가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심문 자체를 막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신변 보호의 의무가 있습니다. 마법으로 인한 상해가 의심되는 수사국 심문에 동석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아린스 같은 여자가 담당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보고 웃어 주는 것이 쉽게 통하는 상대가 담당자라면 여러모로 편했을 텐데 대놓고 자신을 짐 덩어리 취급하는 까칠한 여자가 담당자가 되어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난생처음 여자에게 욕을 먹기까지 했을 때에는 헛웃음마저 나왔다.

‘저는 행정국의 강령에 의해 판단할 뿐입니다.’

그런데 리한은, 새삼, 갑자기 자신의 담당자가 유진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리한을 감싸 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무심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리한은 그녀가 있는 한 자신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은 겪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리한을 통해 수없이 반복될 앞으로의 담당 대상들을 보고 있으므로.

“유진.”

유진은 멀뚱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유진이 조금 놀랐던 것은, 리한의 얼굴에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리한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어색할 땐 미소를 지었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땐 눈을 바라보며 씩 웃었고, 가벼운 대화를 할 때도 눈웃음을 쳤다. 하다못해 아까 심문을 받을 때도 중간중간 비웃음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던 사람인데. 말이 없는 대신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직업처럼 마치 ‘웃는 표정’을 입고 있는 것 같았던 그가 처음으로 웃고 있지 않았다.

“뭘요?”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안다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천천히 반문했다.

“내가 알아야 해요?”

난생처음 보는 어느 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시종일관 무표정인 자신의 담당자를 내려다보며, 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에 대해서 제발 묻지 말라고, 그게 다라고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왜 나에 대해서 안 물어보냐는 질문을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다.

“……진짜 순수하게 망명해 온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거대한 음모를 마음에 품고 온 걸 수도 있고. 근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 수사국의 정보라고 해서 다 맞는 게 아닐 수도 있고, 당신이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

“그런 건 안 생각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리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내게 보이는 것도, 내가 보는 것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뿐이에요. 나는 무언가를 판단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까.”

“대단한 사람이 왜 아니…….”

“그냥 입에 발린, 누구나 소중하다, 누구나 대단하다, 이런 말 하지 마세요. 난 창의력도, 직관도, 순발력도, 합리적인 추론 능력도 거의 없어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 대한 판단 같은 건 안 해요. 다만 당신에 대한 처리 조항 하나하나가 나쁜 전례가 되지 않도록…… 나중에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꼼꼼히 진행할 거예요. 어차피 남는 건 문서뿐이니까. 그 과정에서 진실 같은 건 딱히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어차피 내가 진실을 안다는 보장이라도 있나요? 당신이 나한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리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솔직할 수도 있지.”

“나도 당신한테 안 솔직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100% 솔직한 게 어디 있어요. 나 자신에게도 솔직하기 어려운데.”

리한은 새삼 그녀가 그에게 두고 있는 거리가 눈에 보여 말문이 막혔다. 그도 아까 그녀와 동석한 동기들이 신부 리젠의 흉을 보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 말들을 모두 듣고, 발걸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리젠의 표정까지 보았다. 물론 그 목소리들 사이에 유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리한이 판단한 유진은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대놓고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젠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는 관심 없어.’ 같은 성의 없는 위로라니. 아니, 그걸 위로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실제로 그 험담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리젠은 분명 위안을 받은 것 같았다. 유진은 딱 그만큼의 위안을 그에게 주고 있었다.

“이제 가죠.”

오후가 들어 바람이 차가운지, 유진이 몸을 움츠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거침없이 앞으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리한은 피식 웃었다.

심지어 국왕까지 그에게 무대가 너무 감명 깊었다고 ‘신변 보호’까지 약속해 주었는데, 정작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보조한 유진은 흔한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이 정도의 말은 할 줄 알았던 리한은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서운함을 느낀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무대를 했고, 그 몇 배로 ‘잘한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보다 잊히고 싶은 욕구가 절실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니.

“아.”

유진이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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