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01/256)

  

11화.

“리젠 하카트, 완전 영악한 계집애.”

음식을 먹으면서, 동기 중 하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때도 사람 완전 가려 가면서 사귀더니, 결국 귀족 출신을 채 가네. 성격 좋은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왕녀님이랑만 붙어 다녔잖아.”

오늘의 신부, 리젠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웨딩드레스를 갈아입고 있는 중인 듯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이에 섞여서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

“루스가 멀긴 해도 굉장히 알짜 땅이라더라. 학창 시절에는 서로 경쟁하느라 정신없다가, 카이든만 한 남자 없었나 보지?”

“야, 비밀인데…… 걔가 원래 왕비가 꿈이었단다. 다니엘 전하랑도 뭔가 있대. 하여간 대단한 애야. 여우 짓은 혼자 다 해.”

“아까 루벤 전하가 ‘꼬맹이, 결혼 축하한다.’라고 말하는 것 봤어? 우리하고는 묘하게 벽을 쌓더니 언제 또 루벤 전하랑 그렇게 친해졌대? 난 루벤 전하가 그렇게 다정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네.”

“웃긴 게, 또 자기 배경은 하나도 없어. 아까 아버지 봤어? 히야, 신부 쪽 하객은 전혀 없고, 신랑 쪽만 우르르…….”

유진은 중간중간 와인을 따라 마시며 고개를 숙이고 식사만 할 뿐이었다. 원래 말수가 없는 유진에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녀가 세 번째 푸딩을 먹기 시작할 때였다. 갑자기 바로 옆 모퉁이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아악!”

그녀는 순전히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이어지는 왁자지껄한 소음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리한 카드민, 이 배신자! 어떻게, 어떻게 네가!”

와장창,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제치고 뛰어서 바로 모퉁이를 돌았다. 난감한 표정의 리한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네 나라로 돌아가! 저주받은 땅의 천박한 자식!”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함께 계란이 하나 날아왔다. 리한이 어렵지 않게 날아온 계란을 피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우연히 곁에 있던 신부, 리젠의 푸른색 드레스에 계란 껍질이 튀었다.

“아아악! 사랑해요, 리한! 사랑해요!”

아수라장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리한에게 타르안을 배신했다며 험한 욕을 하는 사람과, 어디선가 소문을 들었는지 나타난 정체 모를 극성 팬, 그냥 스타람 섬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섞여 난장판이었다. 키가 작은 유진이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밀려 곁으로 다가가지 못할 때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량한 남자 목소리에 모두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게 무슨 소동이냐고 물었습니다.”

적막해진 연회장을 국왕, 다니엘이 천천히 가로질렀다. 유진도 사람들과 함께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아메탄의 젊은 왕, 다니엘은 눈부신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이었는데 유진과는 왕립마법대학 동기기도 했다. 이렇게 아메탄의 가장 높은 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못 했지만, 왕위쟁탈전이 거하게 벌어지고 나서 누구보다도 자연스럽게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화려한 옷을 입은 다니엘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다.

“내 소중한 친구들의 결혼식에 이제껏 보지 못한 멋진 무대를 보여 줘서 감명 받았는데, 나의 국민들이 나를 이토록 부끄럽게 할 줄이야.”

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적막 속에서 울려 퍼지는 젊은 왕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그녀는 학생 시절의 온화한 다니엘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어조와 태도였고, 또 그게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과거도, 명성도, 국적도 다 지우고 싶어 우리 아메탄에 망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을 파헤치지 못해 안달인 모습을 보여 준다면, 앞으로 어떤 주요 인사가 아메탄에 망명하겠어요? 어떻게든 아메탄에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왕립마법대학 연구홀은 물론, 왕궁의 각종 행사에서 매번 이런 소동을 벌일 겁니까?”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 첫째, 국왕 다니엘은 리한의 노래에 큰 감명을 받았다. 둘째, 국왕 다니엘은 여러 행사에 추가적으로 리한을 부르고 싶어한다. 물론 리한의 무대가 상당히 훌륭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상황이 더 복잡하게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리한 카드민.”

“예, 전하.”

“왜 혼자 있습니까? 원래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혼자 다닙니까?”

“아, 아닙니다.”

리한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담당자가 있습니다. 담당자에게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담당자? 누구죠?”

유진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한걸음 나아갔다. 절대 길을 열어 주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유진의 발걸음에 우르르 길을 비켜 주었다.

“송구합니다. 행정국의 유진 유니트라고 합니다. 제가 담당자입니다, 전하.”

“아.”

다니엘의 눈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어쨌든 대학 동기였기 때문에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이라면 믿을 수 있지. 우리 기수 행정국 수석이니.”

대체 뭘 믿을 수 있다는 거지? 유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행정국 수석이라고 해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압도적인 성적도 아니었는데 능력에 맞지 않는 거창한 간판만 달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니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왕명입니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앞으로 모든 아메탄 국민은 특별히 관리되고 있는 망명한 외국인에게 그 어떠한 불편함도 주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든 싫어하는 마음이든 그 외국인의 삶에 개입하지 마세요. 행정국이 담당 부서인가요? 행정국에서는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항에 넣으세요.”

“……네.”

유진은 고개를 더 숙이며 대답했다. 출근하면 이제 일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그리고 유진.”

다니엘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담당자로서, 신변을 좀 지켜 줘.”

“네, 알겠습니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그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유진에게는 그의 행정적 처리는 물론이고 신변을 지킬 의무까지 추가로 생긴 것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리젠의 푸른 드레스 밑자락에 달랑거리고 있는 계란 껍질을 바라보았다.

* * *

“스타람에서는 상상도 못 했는데.”

리한이 싱긋 미소를 띠고 말했다.

“한 사람의 말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정리가 되다니.”

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 대답했다.

“그게 왕정이죠, 뭐.”

“좋네.”

그가 영혼 없이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유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잔을 내려놓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만 가죠.”

“그럴까.”

“전하가 왕명을 내리신 덕분에…… 이제 일상생활에서 조심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팬이든 아니든 어쨌든. 왕명을 어기면 최소 재판이거든요. 벌금도 세고.”

“이제 모자 안 쓰고 다녀도 되겠네. 갑갑했는데.”

정작 신부와 신랑은 이미 연회장을 떠났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북적이고 있었다. 신랑이 지방 귀족 출신이어서 그런지 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고, 동기 간의 결혼식이다 보니 오랜만에 동기들이 모여 삼삼오오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진은 동기들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리한과 함께 연회장을 나갔다. 여기저기서 꽂히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지나치게 잘생긴 어떤 외국인 남자와, 그 옆의 담당자라던 조그만 여자애. 유진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잰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을 걸어 정원을 가로지를 동안 그들은 별말 하지 않았지만, 유진의 발걸음이 자꾸 느려지고 리한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유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녀가 민망해하며 말을 이었다.

“저도 이 대학을 나와서…… 졸업 후에는 처음이라, 자꾸 여기저기 둘러보게 되네요.”

리한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리고 싶은 곳 있으면 들려. 또 언제 오겠어?”

“그럼 조금만 더 걷다 갈까요? 도서관에 한번 가 보고 싶어서. 저 오솔길이 지름길이에요.”

주말이고, 또 연구홀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길은 살짝 외졌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리한은 림프를 등에 메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뒤 터덜터덜 걸었다. 저 멀리서 새가 울고, 조용한 숲속 길에는 이름 모를 잡초들이 수북했다. 그보다 살짝 앞서 걸어 나가는 유진의 은발 머리가 햇빛에 빛났다.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구두를 신고도 흙길을 망설임 없이 걸었다.

“……이렇게 여유 있게 걸어 본 적이 얼마 만인지.”

리한은 뭉게구름이 떠 있는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유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가수이니 굉장히 바쁜 것은 기본이고, 유명세 때문에 밖에 나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대학 시절이 좋았나 봐.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하는 걸 보면.”

“그땐 좋은 줄 몰랐는데.”

유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지나고 나니까 좋았던 시절이더라고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걸 아니까 더 그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땐 빨리 돈 벌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었는데.”

“……뭐가 좋았는데?”

“인생이 달라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는 점.”

“…….” 

유진은 구두 발끝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일상을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차죠.”

리한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가 원래부터 말이 없는 성격이라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유진은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었다.

“앞으로 닥쳐올 좋은 일들은 승진이라든가 하는 예상 가능 하고 사소한 것들인데, 나쁜 일들은 가늠조차 안 되니…….”

“잠깐만.”

순식간이었다. 유진은 아무 생각 없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옆에서 걷던 리한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그녀가 넘어질 것 같아 균형을 잡느라 그의 팔에 매달리며 휘청거렸다. 그 짧은 새에 리한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허리에 대고 발차기로 일격을 가했다.

“리, 리한!”

남자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에 날아드는 발차기를 재빨리 피한 리한이 유진을 가리기 위해 한쪽 팔로 뒤에 있는 유진을 고정하며, 동작을 최소한으로 유지한 채 남자의 배에 주먹을 밀어 넣었다. 반동으로 어쩔 수 없이 꺾이는 상체를 놓치지 않고 그가 남자의 턱을 올려붙였다. 남자는 연달아 두 대를 맞고 나서도 별다른 타격이 없는지 재빠르게 자세를 회복했다. 너무 빠르게 일어나는 일이라 유진은 눈으로도 움직임을 좇을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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