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 순간 이 마음 누구나 예상하는 평범한 행복
이제 내가 어떤 길을 걷더라도 간직하고 있을게
노래가 끝나고, 정적이 조금 흐른 후에야 유진은 가까스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지금 만든 노래라고요?”
“역시 좀 다듬어야겠지만. 가사가 좀 유치한가? 축가라서 감이 안 잡히네. 우울한 가사를 주로 썼던지라.”
유진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고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남자로서 좋아서 뛰는 심장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렌토의 무대에서 처음 타르안의 무대를 보고 난 후부터 계속 우상으로 삼았던 가수의 간이 공연을 눈앞에서 보았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중학생 이후 줄곧, 그녀의 소망이라고 할 건 ‘다시 한 번만 타르안의 무대를 보는 것’뿐이었다. 타르안의 무대는 아니더라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호웰의 목소리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작사와 작곡을 맡고 있는 리한의 자작곡을 이렇게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듣게 되다니……. 유진의 굳은 표정을 보고 리한이 살짝 고개를 모로 틀었다.
“……별로야?”
“아, 아뇨.”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좋아서요. 곡…… 잘 쓰시네요.”
“아주 오래 전에 우리 무대 본 적 있다면서?”
그가 씩 웃었다.
“듣고 싶은 노래 있어? 조금이라도 불러 줄게. 스타람에서 팬미팅 하면 종종 통기타 하나 메고 불러 주곤 했는데. 아, 물론 네가 내 팬이라는 건 아니고. 오랜만에 악기를 드니 그때 생각이 나서.”
“……팬미팅이요?”
“팬들이 고마우니까, 함께 소통하는 행사. 마음에 드는 악기까지 사다 주었으니 네게도 고마워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예전에도 초록색 기타를 주문 제작 해서 썼는데.”
그녀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 모든 것을 저버리고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온 남자에게 유진은 숨겨진 팬으로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결국 감정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한 번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들은 가면을 잘 쓰는 어른들답게 그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적절한 예의를 갖춰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 때…… ‘만들어진 꿈’이라는 노래를 들었어요. 그 노래…… 한 번만 더 듣고 싶은데.”
“아. 2집?”
리한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림프를 다시 들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문에 몸을 기대고 두 손을 모았다. 결 좋은 검푸른 머리카락, 우수에 찬 것 같은 푸른색 눈동자, 흰 피부와 균형 잡힌 몸, 깊은 눈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색기……. 마치 잊힌 종교의 어느 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녀는 순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꿈이 있다는 건 어른들의 거짓말이라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허락된 환상을 보고
하기 싫은 출근, 밀려 있는 업무, 조카가 다쳤으니 돈이 더 필요하다는 첫째 오빠의 전보, 리한을 감시하라는 수사국의 요구, 리한을 조심하라는 가장 친한 친구, 진심은 없고 전시품과 같다는 하숙집 할머니의 평가……. 그 모든 것이 생각나지 않고, 유진은 멍하니 노래를 부르는 리한을 바라보았다.
사실 무기력도 우울도 나의 습관이야 그러니
나보고 기운 내라며 그 손을 내밀지 말아요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지만, 만일 유진이 제국의 황제고 리한이 그녀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무희였다면 지금 당장 수청을 들라 하고, 평생을 나만을 위해 노래하라고 명령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나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야
내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결국엔 살아낼 거야
이 사람 때문에 타르안이 해체한 건데……. 그녀는 노래를 듣다가 울고 싶어졌다.
* * *
한가한 토요일 오후,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허름한 선술집에서 노엘은 동료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일단 우리 쪽 사람은 전혀 아닌 것 같아.”
동료의 보고에 노엘은 담배를 비벼 끄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동그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가 재차 물었다.
“점조직이잖아. 어디서 끊겼을 가능성은 없어? 그 자식이 정당 활동 한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며. 게다가 지지 정당이 선거에도 승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심지어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도 쓴 인간이, 이제 와서 왕정 국가에 오고 싶다? 그걸 누가 믿어? 제국에 온갖 공화주의자들이 그를 보려고 엄청난 인파를 이루었다지?”
“점조직이어도 어디엔가는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연결점이 없어. 게다가 딱히 이상 행동도 전혀 안 보인다고. 엄청난 훈련을 받았거나, 아니면 어떤 조직에서 팽당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킹은 무언가를 알고 계신가 봐. 어쨌든 그의 진입 경로까지 네게 정확하게 알려 주셨다며.”
킹은 이 모든 작전의 우두머리였다. 정적이 흘렀다. 동료의 말에 의뭉스러운 표정이 된 노엘은 이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결국엔…… 모르는 거네. 우리 중 킹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도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해. 리한 카드민이 입국한 뒤로 상황이 급변하고 있으니까. 수사국 쪽에서도 냄새를 맡았는지 요새 밀수꾼들에게 모두 감시가 붙었어. 다른 미끼를 좀 던져 볼까?”
“일단 조심히 움직여. 이 바닥에서는 모르는 상대가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미끼를 던지기 전에 스타람의 상황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어.”
“……아니면 영입해 볼까?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아냐. 일단 경계해야 할 것 같아.”
“……너 그 사람에 대해서 뭐 알아?”
동료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왜 싫어한다는 듯한 느낌이 들지?”
“난 잘생긴 남자 놈들은 다 싫어.”
노엘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속으로 살짝 뜨끔한 것은 사실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초록색 림프를 사 가던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생각나 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남자가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그 남자에게 업무적인 책임감은 물론 팬으로서의 미묘한 감정까지 품고 있다. 노엘은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담배를 집어 들었다.
‘지금쯤 그놈이 축가를 부른다던 결혼식이 진행 중이겠지. 나도 가서 그 자식 상판대기나 한번 볼 걸 그랬나.’
* * *
유진은 동기들 사이에 섞여서 멍하니 결혼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딱히 친하게 지내는 동기가 없을 뿐이지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못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동기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안부를 묻고 신변잡기적인 대화를 하며 무성의하게 결혼식을 보았다. 어쨌든 남의 결혼식일 뿐이었고, 그녀에게는 사랑의 서약이니 맹세니 하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에, 이번 순서는, 왕립마법대학 연구홀의 전문 축가 가수가 된 리한 카드민의 축가가 있겠습니다.”
정작 유진은 팔짱을 끼고 작은 무대를 노려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여자들의 탄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리한 카드민? 타르안? 소문이 사실이었네! 나도 여기서 결혼할래! 어머, 저기 봐. 진짜 잘생겼어. 나 10년 전만 해도 엄청 팬이었는데. 그래? 난 오늘 처음 봐. 그래도 소문은 들어 봤을 것 아니야. 어렸을 때 대륙 투어도 했으니까. 세상에, 정말로 귀화한 거야? 나머지 멤버는 어쩌고? 말도 마, 국경이 난리였대…….
여러 말들이 어지럽게 섞였다. 유진은 곧게 뻗은 은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리한은 술렁이는 장내를 바라보며 여유 있게 싱긋 웃었다. 누군가는 큰 소리로 타르안의 역사와 멤버에 대해서 읊었지만, 리한이 이내 림프를 한 번 튕기니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함께 있으면서도 알았지 줄곧 그리워할 거야
눈에 담으면서도 느꼈지 평생 잊을 수 없어
모두의 눈길이 리한에게 고정되었다.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바로 그 노래였다. 그의 시선이 하객 속에 섞여 있는 유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가사가 쿵 하고 가슴에 박혔다. 유진은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허스키하면서 낮은 음색, 묘하게 세련된 박자, 귀에 감기는 멜로디, 림프 반주 하나로 풍성해진 음악 그 자체……. 유진은 너무 오랜만에 눈을 뗄 수 없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유진뿐만이 아니라 그 결혼식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랬다.
이 순간 이 마음 누구나 예상하는 평범한 행복
이제 내가 어떤 길을 걷더라도 간직하고 있을게
가사에 맞는 표정 연기와 수준급의 림프 실력, 아름다운 음색까지 어우러져 모두가 정신을 놓고 리한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결혼식에 참석했던 왕족들까지 해당되었는데, 심지어 현재 국왕인 다니엘마저도 그를 감명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형인 루벤마저도 감탄한 눈으로 스타람 섬의 가수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결혼 축하드립니다.”
결코 길지 않은 노래가 끝나고, 리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이 조용했던 공기가 깨졌다. 휘파람이 난무하고, 기립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다니엘마저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유진은 여유 있게 웃으며 인사하는 리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짓는 모든 표정을 알고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그는 무대에 선 것 같은 태도로 지금껏 유진에게 연기하듯 대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무대에 선 리한을 보니 기분이 정말 묘했다. 3분 남짓한 무대로 이 공간의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팬으로 만든 그가 림프를 들고 퇴장했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동기들에 섞여 식사를 하기 위해 연회장으로 터덜터덜 이동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