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니? 나는 그냥 담당자일 뿐이야. 리한 카드민이 타르안을 해체시켰어도, 한때 타르안의 멤버였어도, 그래도 문서 앞에는 의미가 없어. 하물며 ‘수상하다’ 같은 느낌이 내게 대체 무슨 소용이지?”
“유진, 이건 느낌이 아니라…….”
“너도 내게 모든 진실을 말하지는 않잖아. 너랑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지만, 수없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 그래도 그런 것에 의미 두지 않아. 너랑 나는 밀수로 이어진 고객과 장사꾼이고, 또 친구 사이고, 그 관계에서 꼭 모든 걸 공유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나는 가장 중요한 것 외에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지하실 문을 열고 다시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며, 유진이 보일 듯 말 듯 살짝 웃었다.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심각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 오던 노엘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타르안 사진이 아닌 그를 보고 미약하나마 웃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친구가 있다는 건 나름 괜찮네.”
유진의 이어지는 말에 노엘이 시선을 떨구고 괜히 들고 있던 림프를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유진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문에 기대어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영수증을 쓰며 중얼거렸다.
“조막만 한 게 성질도 사납고 고집은 어찌나 센지…….”
“조막만 한 게 성질머리도 없고 고집도 없으면 이 세상 어떻게 사냐?”
“하여튼 한마디를 안 져.”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격표와 영수증을 꼼꼼하게 확인한 뒤 돈을 건넸다. 노엘은 유진의 무심한 초록색 눈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진은 사실 남에게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다. 자신이 학업을 그만두고 상단에 들어갔을 때에도, 위험한 물건의 밀수를 시작했을 때에도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내가 네 인생에 참견하지 않는 만큼, 너도 내 인생에 참견하지 마라……. 어떤 일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유진을 사람들이 처음엔 상당히 순한 아이로 보지만, 결국엔 혀를 내두르게 되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노엘은 그런 점이 가끔 이상하게 서운했다.
“……이거 꽤 무거워.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러시든가.”
* * *
“유진?”
“체스트? 왜 나와 계세요?”
하숙집 골목에 들어서니 체스트가 숄을 두르고 집 앞에 나와 있어서, 유진은 옷깃을 여기며 물었다. 체스트가 유진의 옆에 선 노엘을 보고 눈가에 고운 주름을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밤도 꽤 늦었고, 골목길은 어둡고 하니까. 그런데 괜히 나와 있었나 보구나.”
“제가 늦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냥 오늘은 찬 바람도 좀 쐬고 싶어서. 이분은 남자 친구?”
노엘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유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휘청거리는 그에게서 림프를 받아 들고 대답했다.
“아뇨. 중학교 때부터 친구예요. 저기 이스티교 뒤편에서 잡화점을 해요. 림프 사러 들렀는데, 배달까지 해 준다고 해서.”
“아아.”
체스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라고 하고 싶지만…… 사정이 있어서…….”
“리한 카드민이 저희 집에 있는 것 알고 있어요.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유진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가게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차는 안 마실걸요.”
“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노엘이 꾸벅 인사했다. 체스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진이 리한 얘기까지 했어? 나보고는 절대 말하지 말라더니…… 아주 가까운 사이인가 봐요.”
“오랜 친구일 뿐이에요.”
유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노엘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다가 말했다.
“하숙생을 숨겨야 한다니…….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리한 카드민? 어떤 사람이에요? 유명인인데, 데리고 있기 힘들거나 하지 않으세요?”
“힘들 게 뭐가 있겠수. 어차피 난 오전에는 멀리까지 장을 보러 나가기 때문에 집에 잘 붙어 있지도 않아. 오히려 내가 스타람이 궁금해 하루 종일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그 청년이 더 힘들걸?”
“……잘생겼나요?”
“엄청 예쁘장하게 잘생겼지. 막 깨서 아침밥을 먹는 모습도 넋 놓고 보게 될 정도예요. 육십 넘은 노인네도 이러니 대륙을 홀릴 만하던데. 뭐, 하지만 그뿐이야.”
체스트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팔아서 그런지 간단한 인사에서조차 진정성이 안 보여. 분명 어딘가 지치고 공허해 보이는데 내색을 안 한단 말이지. 인간이 아니라 무슨 전시품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노엘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 그런 노엘을 유진이 흘끔 바라보고,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 가. 바쁘잖아.”
유진이 노엘의 팔을 툭, 한 번 치고 림프를 멘 어깨로 문을 열어서 별다른 인사도 없이 들어갔다.
2. 의무와 믿음
리한은 림프를 처음 다뤄 본다고 했지만, 몇 번 줄을 튕겨 보고는 몇 분도 안 되어 원하는 음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은 날이 촉박해 미안하지만, 토요일까지 부탁한다고 사무적으로 말하고, 리한의 방에 방음 마법을 걸어 주었다. 리한은 림프를 잡고 뚱땅대다가 마법을 거는 유진을 보며 신기한 듯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기함을 감출 수 없는 눈빛을 발견한 유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효과가 얼마 안 가요. 마력이 자꾸만 줄어드는 추세라.”
리한이 자신의 앉은키에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유진을 살짝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륙의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마법을 잘 쓰나?”
“아뇨. 제가 잘 쓰는 편이죠. 왕립마법대학에서도 선택 과목이 마법이었을 정도니까.”
“그럼…… 마법사인 거야?”
“요새 마법사 하면 굶어 죽어요. 지금 이 순간도 마력이 죽죽 줄어들고 있는데요. 게다가 나보다 마법 잘 쓰는 애는 많았어요. 주어진 마법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건 타고나야 하는데…… 난 그냥 남들이 만들어 놓은 마법만 외워서 쓰는 거라.”
그녀의 초록색 눈이 무심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일반인보다는 잘 써요. 요새 일반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법을 잘 쓰지 못하고, 마력이 담긴 아이템이나 가까스로 쓰는 정도니까.”
“난 그런 아이템도 못 쓰겠던데. 마력이 아예 없어서 그런가 봐. 상당히 삶이 불편해.”
“……스타람 섬에서 탈출하면서 그만한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왜 스타람 사람들이 절대 대륙에 오지 않는지? 기초적인 생활도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이젠 내가 왔으니 ‘절대’는 아니지.”
유진은 웃음기가 전혀 없는데, 리한은 말이 없을 때에도 시종 일관 예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긴 다리를 춤추듯이 까딱거리며 물결치는 바다색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쓸어 넘겼다. 유진은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의자에 걸터앉아 초록색 림프를 매만지는 그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무인의 몸이야.’
카이든의 말을 듣고 나서 그의 몸을 바라보니, 확실히 탄탄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서도 근육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림프를 치는 그의 팔에 선 핏줄에서 눈을 억지로 떼며 말했다.
“뭐, 그래도…… 체스트는 마법 아이템을 잘 쓰지 않는 편이니 여기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런 것 같더라고. 전기가 없어 불편하긴 하지만……. 하긴, 전기가 없는 것보다, 내가 전기에 대해서 생각보다 잘 모르는 게 더 불편하긴 해.”
유진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한이 씩 웃으며 말했다.
“체스트가 전기공학에 너무 관심이 많더라고. 네가 출근하고 나면 자꾸 나한테 10년 동안 스타람의 전기공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물어봐. 근데 난 쓰기만 했지 전기가 어떻게 생성되는지는 모르거든. 예를 들어…… 매일 전깃불을 썼지만 어떻게 전깃불을 만드는지 모른단 말이야. 근데 체스트는 자꾸 설명하라고 하니까…….”
“흠.”
리한이 살짝 과장되게 한숨을 쉬어 보이자, 유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체스트는……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이 별로 없게 태어났어요.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답답하겠죠.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전기공학에 관심을 가진 거고…… 그러다가 봉쇄령 내린 뒤에, 대학에서 과목이 사라져 어쩔 수 없이 실직했어요.”
“아. 그래서 집에 마법 아이템이 얼마 없구나. 내가 지내기에 참 좋은 집이긴 한데…… 다소 슬프네.”
“슬프죠. 그러니까 귀찮더라도 대화 상대 좀 되어 주세요. 학문 하는 사람들에게 학문은 인생 그 자체니까. 봉쇄령 이후 인생이 부정당했다가, 어쨌든 60이 넘은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난 거잖아요.”
“괜찮아. 체스트는 매일 장을 보러 멀리까지 가서 낮에는 거의 집에 없어.”
“그건 몰랐네요.”
유진이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하여 방음 마법을 한 번 더 점검하고 나가려는데, 그가 유진을 불러 세웠다.
“유진.”
“네?”
“방금 만들었는데, 들어 봐.”
“뭘…….”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그가 능숙하게 림프로 반주를 넣고, 발로 장단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함께 있으면서도 알았지 줄곧 그리워할 거야
눈에 담으면서도 느꼈지 평생 잊을 수 없어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작은 방 안 공기를 모두 장악하는 것 같은 존재감이었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 음역대가 높지는 않지만 나지막하고 감성적인 목소리, 림프 하나만으로도 풍성한 반주……. 유진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가 나지막하게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