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리한은 처음에 자신이 신기하게 보았던 문서 서식을 상기했다. 행정국 직원들은 모두 종이에 마법을 걸어 정해진 서식을 띄우고 모든 것을 문서로 남겼다. 지금 유진은 그 서식 중 ‘예산’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잖아. 누가 내 악기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유진은 그의 말을 아예 무시하며 포크를 놓았다. 리한의 항의하는 눈빛을 못 본 척하며 그녀가 일어섰다. 퇴근한 옷차림 그대로 그녀가 겉옷을 입었다.
“이미 예산이 정해져 있다니까요. 더 어두워지기 전에 다녀올게요. 축가로 유명한 아메탄의 곡을 몇 개…….”
“필요 없어. 곡은 내가 직접 쓸 거니까.”
리한은 답답한 마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담당자라는 이 작은 여자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꼭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스타람의 음악과 아메탄의 음악은 좀 달라요. 여기는 그룹 가수의 개념이 아예 없고…….”
“예술엔 국경이 없어. 악보 살 푼돈이라도 악기에 다 보태도록 해.”
그들의 신경질적인 대화를 듣고 있던 체스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첫인상은 둘 다 말 없는 순둥이였는데…….”
노인은 한숨을 쉬면서도 슬쩍 웃었다.
“까탈스럽고 고집 센 것까지 똑같구먼.”
* * *
유진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아메니티의 적절한 번화가 길목에 있는 잡화점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남자와 눈빛이 이상한 여자가 그의 잡화점에서 나서는 것을 보았다. 노엘이 수상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빈도가 생각보다 잦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 ‘수상한 사람’에는 자신도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진은 자신도 딱히 할 말은 없다고 생각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노엘이 책을 읽고 있다가 유진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밀수품을 파는 간판 없는 선술집에서 입고 있던 것과는 아예 다른 옷차림이었다. 그땐 세련되다 못해 사치스러운 옷을 걸치고 있던 그가 지금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은색 재킷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단정히 정리하여 묶고 있던 곱슬머리도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귀 뒤로 넘기고 있었다.
“뭐야? 왜 여기로 왔어? 게다가 원래 약속한 날도 아니잖아?”
“오늘은 다른 걸 사러 왔거든. 행정국 제복 입고 온 거 보면 몰라? 정상적인 물건 보러 왔다는 거.”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잡화점 안에는 유진과 노엘 둘뿐이었지만, 유진은 약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노엘이 살짝 당황하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네가 나한테 정상적인 물건을 뭘 사?”
“말소리 죽여. 감시당하고 있을 수도 있어. 수사국에서 붙었을지도 몰라.”
노엘의 갈색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유진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리한 카드민을 담당하게 됐거든. 지금 우리 하숙집에 있어.”
“……뭐?”
그가 책을 테이블 위에 완전히 덮어 놓고,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올린 뒤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세히 말해 봐. 리한 카드민이 네 담당이라고? 같이 산다고?”
“자세히 말할 것도 없어. 그게 다야. 출근해 보니까 내 담당이 되어 있더라고. 일단 아무 데나 살게 할 수는 없어서 데려왔어. 그리고 아메탄을 위해 형식적으로라도 뭘 시켜야 한다고 해서…… 왕립마법대학 결혼식 축가나 부르게 하려고. 그래서 리한이 쓸 악기 사러 왔어. 기타같이 생긴 현악기 좀 부탁해.”
“음…… 현악기……. 이쪽으로 들어와 봐. 창고에 있을 것 같아.”
노엘은 호롱불을 들고 가게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그를 따라 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먼지가 가득 쌓인 창고에 도달하자 노엘이 문을 닫았다. 유진이 콜록대자 그녀에게 무명천 하나를 내밀며 그가 말했다.
“여기 방지 마법이 걸려 있어. 아무리 수사국이어도 여기에 있으면 도청을 못해.”
“근데 진짜 자세히 더 말할 게 없다니까.”
유진이 건성으로 호흡기를 가리다가, 결국엔 귀찮다는 듯이 그에게 다시 무명천을 내민 후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연차 쓰고 헛걸음할 동안, 빌어먹을 인간들이 귀찮은 일을 다 나한테 떠넘긴 것뿐이야. 별로 중요하지 않으면서 성가신 외국인을 처리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 거 확실해?”
“어?”
“위험한 사람 아니냐고.”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렇게나 쌓여진 나무 궤짝 위에 앉았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더 말해 보라는 듯 노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유진…… 스타람은 공화정이 완전히 들어서면서 커다란 혼란의 10년을 보냈어. 그러면서 제국과의 전쟁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야. 그런데 이 시기에, 마력이 없는 스타람 사람이 대륙으로 건너왔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돼? 게다가 리한은…… 스타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가수야. 게다가…… 사실…… 네게 그동안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금서의 저자기도 해. 그를 제국에서 둘러싼 사람들이 다 팬은 아니었어.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네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야. 제국의 정치관이 마음에 들어 망명한다고? 왕족도 아닌 놈이 거기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말도 안 되지. 수사국이 붙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
유진은 눈을 내리깔고 허공에 붕 뜬 자신의 두 작은 발만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카이든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몸이 아니야. 무인의 몸이야.’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노엘이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두 어깨를 잡았다.
“리한 카드민하고 얽히지 마, 유진. 다른 집으로 보내고, 어떻게든 너랑 분리해. 위험한 일에 얽히거나 이용당할지도 몰라. 이건…… 진심이야.”
“웃기지 마. 시키면 해야 돼. 이미 문서로 맡았는데 어떻게 분리해?”
“네가 담당자니 처리하기 나름이잖아.”
“다 기록으로 남아서 전례로 쓰이거나 참조 문서로 보존할 텐데…… 담당자가 분리해 버리라고? 무책임한 말을 하네, 노엘 하이트. 나랏돈 받는 값은 해야 할 것 아냐? 소명 의식 같은 건 없어도, 전문성과 객관성을 지키는 건 당연히…….”
“아, 진짜 지긋지긋한 산하기관 공무원들!”
노엘이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그놈의 전문성, 객관성! 대체 그딴 건 누가 주입시키는 거야? 팔자 좋은 왕들이 만들어 낸 다른 이름의 족쇄야. 유진, 돈을 벌고 싶으면 차라리 그만두고 나랑 장사나 해. 몇 배는 더 벌게 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작은 다락방에 먼지가 날릴 정도로 노엘이 소리를 쳤지만 유진은 무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발을 까딱일 뿐이었다. 긴 속눈썹이 그녀의 흰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은발이 가슴께까지 늘어져 흔들렸다. 작은 체구를 붙잡은 노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그놈하고 일단 떨어져. 위험한 것 같단 말이야.”
“…….”
정적이 잠시 흐르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팔짱을 풀고 자신의 어깨에 올려 있던 노엘의 손을 하나하나 떼어 낸 유진이 말했다.
“노엘, 현악기 하나 부탁해.”
“유진!”
“내 생각엔…… 림프 어떨까? 그나마 기타랑 비슷하게 생겼고 종류도 많으니까. 아까 보니까 저 쪽에 있는 것 같던데?”
그녀가 폴짝 뛰어 나무 궤짝에서 내려온 뒤, 종종걸음으로 선반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악기들 앞에 섰다. 먼지투성이의 악기들을 하나둘씩 골라내며 그녀가 자신의 몸집만한 림프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거 초록색 없어?”
“유진, 내 말 우습게 듣지 마. 말했잖아. 밀수꾼들이 정보가 가장 빠르다고. 근거 없이 하는 소리가 아니야.”
“리한 카드민이 어느 길로 오는지도 모르는 밀수꾼의 말을 어디까지 들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차라리 수사국 동기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뻔했어.”
“말장난하지 말고.”
“네 말 우습게 듣는 거 아니야. 다만 딱히 들을 필요가 없는 것뿐이야.”
유진이 결국 초록색 림프를 찾아내고 낑낑거리며 먼지를 털며 말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리한의 담당자야. 그런데 난 리한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모든 ‘특별 관리 대상 망명 외국인’들의 담당자기도 해. 나 자신은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그 사람들에 대한 원칙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그러니까 리한 카드민이 어떤 사람인지 들어 봤자 별다른 변화는 없을 거야.”
“아, 유진 유니트! 제발 융통성 좀 가져! 그 새끼가 널 보고 싱긋싱긋 웃고 그 매끈하게 생긴 얼굴로 홀려도 그 속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거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해. 날 믿어. 행정국 안에만 있는 네가 뭘 알겠어?”
“별개의 얘기라니까. 이미 문서로 지정된 이상 난 딱 그만큼의 일은 해야 돼. 물론 전혀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그녀가 림프를 껴안고 뒤뚱거리며 걸어 혼자서 나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유진은 자신에게 말하는지 노엘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성의 없게 중얼거렸다.
“다정하고 예의바르게, 별다른 특징 없이 말하다가…… 기선 제압을 한번 시도하기도 하고…… 또 껄끄러운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기도 해. 그런데 그 모든 모습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건 확실한 것 같아. 가면…… 그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 공인이니 사실 가면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노엘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넘겼다. 성큼성큼 걸어 그녀가 안고 있던 커다란 림프를 빼앗듯이 들고 나란히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그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싱긋싱긋 잘 웃더라. 근데 그게 다 계산된 것 같았어. 진실함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하나…… 이런 얼굴로, 이런 표정으로 웃으면 사람들을 홀린다는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별다른 특징이 없는 것을 연기하고 있는 느낌. 말하기 귀찮으니까 웃음으로 때우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유진의 차분한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보다 보니, 은근히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어딘가 스산해 보이기도 하거든. 사진에서는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그런 맑은 얼굴에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는 게 신기해.”
“퇴폐적인 게 아니고 음침한 거라니까. 분명 뭔가 감추고 있다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