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97/256)

  

7화.

“……과장님, 이런 일은 제 능력 밖입니다.”

유진은 망설이다가, 그래도 한 번은 일을 거부해 보기 위해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차피 한번 자신의 일로 배정받은 것, 피하기는 어렵겠지만 싫다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떠맡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었다.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고, 그래서 제 재량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일을 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저는 창의적이지도 않고 센스도 없어요.”

“하지만 꼼꼼하잖아. 네가 생각한 측면이 조항에 바로 반영된다는 것에 보람을 느껴 봐.”

“제가 생각하지 못한 측면은 반영이 안 되겠죠. 저는 그게 무서운 거예요.”

유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조항 하나하나에 저의 생각이 들어가겠죠. 앞으로 비슷한 사례에서 계속 전례로 인용될 텐데…… 제 생각이 들키는 것보다, 제가 생각하지 못한 면이 두고두고 들키는 것이 두렵습니다.”

“유진 유니트, 넌 수석 출신이야. 수석 출신이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키탄의 언성이 차차 높아지자 유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뒤를 돌아야만 했다. 사실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에 대한 신념이 있는 것뿐이었는데 키탄은 조금도 자신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키탄은 적절히 이야기를 들어 주지만 사실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은 안 하는 평범한 범주의 상사였다. 어차피 일을 누군가에게 넘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예측하고 있었다.

‘특별 관리 대상의 기준…… 생활비를 지급할 명분…….’

유진은 자리에 털썩 앉아 새로운 보고서를 쓰기 위해 깃펜을 들었다. 행정국 제복 블라우스에 맨 리본이 목을 조르는 듯했다. 예상은 했지만 일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항은 하나를 만들면 또 하나가 따라온다. 리한 카드민에 관련된 일은 주거지를 정해 주고 생활비를 지급한다고 끝나지 않았듯이, 기준과 명분을 정한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딱히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유진에게 삶은 지겨웠고 모든 일에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사는 것은 고난이 아니면 권태의 연속이었고, 죽을 용기가 없어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 내는 일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생각이 필요한 일이 정말 싫었다.

최대한 생각 없이 처리하라는 방법대로 일을 처리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지긋지긋한 가족들에게 보내고, 남은 돈으로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하는 대상에 시간을 쏟고…… 그러다 그냥 명이 다하면 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살아 있었으니 타르안이라는 그룹 가수의 공연을 보고 가슴이 뛴 것 아니었던가. 이러다가 타르안의 공연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딱히 여한이 없는 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지만 내겐 일상이 인생이라.’

대단한 인생이 아님은 탄생부터 알고 있었다. 대단한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타르안의 물건을 수집하고, 그런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소박한 바람이었는데, 리한 카드민, 그 남자가 모든 것을 깨 버렸다.

관찰해서 수상한 점이 있으면 알려 달라는 수사국의 요구도, 자꾸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라는 행정국의 요구도 그녀는 모두 피곤했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그녀의 유일한 삶의 낙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그녀에게 타르안은 유명한 가수 그 이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유진 유니트, 넌 수석 출신이야.’

그깟 행정국 수석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유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동기들 중 3등이었고, 1등과 2등을 다투던 진짜 ‘엘리트’들과는 차원이 다름을 이미 뼈저리게 느꼈었다. 3등이었다는 것도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체술을 아예 못했기 때문에 체력 단련을 조금도 하지 않았고, 나머지 시간을 모두 다 암기 과목에 쏟았던 것뿐이었다. 주어진 것을 꼼꼼하게 외우는 것은 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특출 난 과목이 없었다. 약초학 같은 경우 암기가 많아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새로운 조합으로 다른 약물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창의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체술이 약해 수사국은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생각 자체를 믿지 않았다. 예를 들어 1등과 2등을 다투던 리젠과 카이든이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이 책상 구석에 있던 둘의 청첩장으로 향했다.

‘같은 수석이어도 어차피 처음부터 시작이 다른데 뭘…….’

수사국 수석 카이든은 귀족 출신이고, 약제국 수석 리젠은 아메탄 역사에서 전설로 남은 천재 약제사의 조카였다. 반면 유진에게는 의무에 가까운 빈민층 가족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유진은 다만 1등과 2등이 행정국에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반복되는 문서 작업과 행사 지원 등의 지겨운 업무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행정국 수석이 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애초부터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행정국을 꿈꿔 온 것도 아니었다.

‘일이나 하자. 특별 관리 대상의 기준…… 생활비를 지급할 명분…….’

그녀의 멍한 눈동자가 청첩장에 머물렀다.

[장소: 왕립마법대학 연구홀]

‘왜 왕립마법대학에서 하지? 더 좋은 곳도 많은데 굳이 소박하게 왕립…… 잠시…….’

유진의 초록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깃펜에 잉크를 푹 담구고, 최대한 감정을 빼서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관련, 특별 관리 대상의 기준과 생활비 지급 명분. 사안, 리한 카드민의 경우…….”

* * *

“……그렇게 됐어요.”

유진은 딱딱한 말투로 저녁 식사를 하며 말했다.

“일단 이번 주 토요일 결혼식이 하나 있어요. 대학에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전용 악단이 없고 되는대로 동아리 학생들이 아무나 공연하는 식이라…… 안 그래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하더군요. 필요한 악기가 있으면 예산을 조금 따 놓았으니 말씀하시고, 악단은 두 명 내외밖에 안 돼요.”

리한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깊은 눈매 속 푸른 눈동자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었다. 그가 짧게 물었다.

“악단은 필요 없고, 기타 하나를 구할 수 있을까?”

“기타는 스타람 악기잖아요. 불법 밀수를 해 오거나 아주 옛날 것밖에 못 구해요. 비슷한 현악기로 구해 볼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타 하나 들고 올 걸 그랬군.”

어젯밤 리한이 다소 무례하게 기 싸움을 걸다가 유진이 어제 욕하고 방에 들어가 버린 사건은 아예 묻어 두고, 둘은 예의를 갖춰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어제의 그 대화로, 둘은 서로가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적절한 선을 지키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 셈이었다. 체스트는 흐뭇한 표정으로 빵을 더 꺼내며 말했다.

“유진, 영리하구나. 그런 생각도 해내고.”

“일단 급한 불 끈 셈이죠. 나중에 다른 망명자가 오면 이 조항 때문에 곤란해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별로 마음에는 안 들어요.”

유진은 ‘특별 관리 대상’의 기준을 ‘외국인이면서 내국인이 할 수 없는 분야의 재능이나 능력, 배경을 가져 관리가 필요한 사람’으로 잡았고, ‘생활비를 지급할 명분’으로 ‘해당하는 특징으로 아메탄 왕립 기관에 도움을 줌’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리한의 배경을 ‘대륙 전체에서 영향력 있는 유명한 가수’라고 서술한 뒤 ‘아메탄 왕립마법대학 연구홀 결혼식의 축가 담당’으로 관련 업무를 설정했다.

“하기 싫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이미 보고했으니까.”

“싫지 않아. 오히려 좋은데. 다시는 남 앞에서 노래 같은 건 못 부를 줄 알았거든.”

리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사람은 정말로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을 생각으로 왔구나. 유진은 마음속에 밀려오는 씁쓸함을 억지로 무시했다.

“……이따가 축가로 유명한 곡 몇 개 악보도 구해 올게요. 어차피 악기 구하려면 나갔다 와야 하니까.”

“같이 가.”

리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다룰 악기인데, 남한테 맡기는 것이 말이 돼?”

“안 돼요. 아메탄에 당신 팬들이 꽤 있다는 걸 잊지 마요. 그저께도 행정국 입구까지 일반인들이 들어와서 쫓아냈다는데.”

“아니, 하지만…….”

“행정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몰래 이동하느라 고역이었어요.”

리한의 반달을 그리고 있는 푸른 눈을 흘끗 보고, 유진이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냥 잘생긴 것이 아니다. 잘생긴 남자라면 꽤 많이 보았다. 지금은 왕이 된 유진의 동기, 다니엘 왕자도 상당히 조각처럼 생긴 미남이었고 오늘 만난 카이든도 무표정이 잘 어울리는 멋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리한은 확실히 그들과 달랐다. 괜히 무대에 서고,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빛 하나, 손짓 하나, 표정 하나, 미소 하나가 모두 사람을 홀리는 듯했는데 마력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스타람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면 알 수 없는 마법을 쓴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게다가 유진은…… 물론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호웰이었지만 타르안의 리더인 리한도 당연히 좋아했고, 온갖 사진을 웃돈까지 줘 가면서 수집했으며 사소한 프로필도 모두 외우고 있었다. 타르안의 모든 곡들은 그가 직접 작사, 작곡했는데 노랫말이 너무 아름다워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호웰이 가장 좋지만, 그래도 리한의 능력을 가장 인정하지.’라고 노엘에게 백번이 넘게 말했었다.

그를 볼 때마다 드는 마음이 여러 가지였다. 팬으로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가 타르안을 버렸다는 점에 분노하는 마음, 귀찮은 일거리를 대면하고 있는 마음이 뒤죽박죽 얽혔다. 자신의 감정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것을 싫어하는 유진은 결국 온갖 마음을 누르고 무표정으로 사무적인 말만 할 뿐이었다.

“타르안의 팬들 중 당신을 가만두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흠.”

“당분간 조심하세요.”

“다쳐도 내가 다치고…… 언제까지나 숨어 살 수는 없잖아.”

“극성팬들이 이 하숙집 위치를 안다고 생각해 봐요. 나랑 체스트의 삶은요?”

그 말에 리한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가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꽤 많은 돈을 가져왔는데, 그럼 돈을 줄 테니 제일 좋은 악기로 부탁해.”

하지만 유진은 그가 그 정도 표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영혼 없이 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파악한 상태여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곤란해요. 이미 결재가 난 문서에 할당한 예산이 있어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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