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95/256)

  

5화.

“……네?”

“왕도 있고, 귀족도 있고, 그리고 산하기관이라는 이상한 기관도 있고. 신분제가 기묘하게 균형을 이룬 것이 신기하잖아. 산하기관으로 들어가면 평민도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면서? 유진도…… 귀족 신분이겠네?”

“어느 귀족이 이러고 산답니까?”

홀릴 것 같은 푸른 눈을 억지로 피하며 유진이 성의 없게 내뱉었다. 실제로 산하기관은 아메탄에만 있는 특이한 기구이기는 했다. 아메탄의 왕족들은 제국의 황족들처럼 마력을 타고나지 못했기에 예로부터 왕권이 약했는데, 귀족들을 견제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평민들에게 등용문을 준 곳이 산하기관이었다. 물론 산하기관에도 학업을 좋아하는 귀족 출신들이 있기는 했으나 대다수가 영리한 평민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산하기관 직원들은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지만, 귀족의 역사가 아무래도 산하기관보다 오래되다 보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귀족과 같은 권리를 누리기는 하지만 정치적 활동이 금지되므로, 대다수의 귀족들은 산하기관 직원들을 그저 귀찮은 일 처리를 담당하는 똑똑한 평민들의 모임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흐으음.”

리한이 고개를 살짝 돌리고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가 무언가 결론을 내렸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유진에게 기울였다. 유진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유진,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요?”

“그 전에……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유진은 처음엔 없다고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그에 대한 것은 넘치도록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색깔, 처음 가수로 데뷔한 나이, 취미, 특기, 심지어는 잘 웃지만 말은 별로 없는 성격이고, 리더로서 카리스마가 있어 그룹을 이끌고 있다는 점까지. 물론 생각보다 말이 조금 더 많기는 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유진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제발 목소리가 평정심을 유지하기 바라며 조용히 물었다.

“……스타람에 두고 온 다른 멤버들한테…… 안 미안해요?”

“음?”

리한이 정말 놀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예의 바르고 다정하기까지 한 얼굴에서 흔들림이 보인 것을 놓치지 않고 유진이 재차 물었다.

“타르안이 실질적으로 해체된 거잖아요. 리더가 정치적인 이유로 적대국으로 망명했는데, 나머지 멤버들은 어떻게 해요? 예를 들어…… 호웰이라든가…….”

“아.”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리한이 난감하다는 듯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물론 아메탄에서도 인기가 꽤 있었지만 교역 끊긴 지 10년이나 지나서 일반인도 우리를 자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호웰까지 알다니, 우리를 잘 알아?”

유진은 호웰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 역시 타르안의 광팬이었다는 사실은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진심을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중학생 때 순회공연 온 거, 본 적 있거든요.”

“흠.”

“…….”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머지 멤버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그럼 그 많은 팬들은…….”

“팬들한테도 미안하지만,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니까.”

유진은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유진은 타르안에서도 호웰이라는 멤버를 가장 좋아했다. 음역대가 높아 노래도 가장 잘했고, 귀엽고 사근사근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르안을 좋아하는 유진도, 타르안의 멤버 호웰도, 어쨌든 리한의 인생을 대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타르안이라는 그룹의 팬만 아니었어도 유진은 애초에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것이니 남들의 결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눈앞의 리한 때문에 호웰은 영원히 가수로서의 삶이 끝난 것이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친 얼굴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리한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유진, 그럼 내가 이제 질문해도 돼?”

“…….”

유진은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긍정의 의미로 리한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맑은 눈에 제복을 입은 무표정의 작은 유진이 한껏 담겼다.

웃돈을 한참이나 주고 노엘에게 얹어 산 여러 가지 사진들에서 리한은 언제나 가운데에 서서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천사 같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녀는 호웰을 제일 좋아했지만, 어쨌든 리한의 팬이 가장 많은 것은 이해할 법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진이 지금까지 본 그 어떤 귀족 여자들보다도 기품 있는 웃음을 지으며 리한이 천천히 말했다.

“유진.”

“…….”

달콤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해?”

흠칫 놀란 유진의 눈이 커졌다. 이런 말을 하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섬뜩했다. 유진은 순간, 지금까지 자신에게 다정하면서 적절한 예의를 갖추고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 갔던 그 남자는 모두 겉껍데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다정하게 건넸던 말들은, 유진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내가 일거리라서? 쓸데없는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하루 온종일 나를 본 순간부터 싫은 내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 건 좀 매너가 없는데.”

스타람 출신 사람들은 마력이 없다. 분명 목소리에 마력을 섞지도 않았을 텐데 유진은 순간적으로 모공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유진은 가만히 앉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내 담당자라…… 여러모로 민폐를 끼쳐야 하는데, 이러면 상호간에 불편하지. 잘 지내보도록 노력해 봐.”

“…….”

리한은 한 번 더 환하게 웃고는,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댔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주눅 들지 않고 살아왔으면, 외국에 망명까지 했는데도 이토록 오만할까. 그의 미소는 아름답고,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지만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유진은 잠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민폐라는 걸 알고는 있나 보지?”

유진은 몸집도 작고, 체술이라면 언제나 학급에서 꼴찌를 도맡아 했다. 그녀의 뒤를 봐줄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대단한 권력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린 시절 내내 거칠기 그지없는 뱃사람들 속에서 온갖 욕지거리를 들으며 자라났기 때문에 ‘약해 보이면 얕보인다.’라는 밑바닥의 논리를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상대가 먼저 자신을 제압하려고 강하게 나왔을 때 쉽사리 물러서면 서열이 정해지고 만다. 아무것도 못하더라도 일단은 욕지거리부터 뱉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네 나라 버리고 도망 온 망명자 주제에 어디서 명령질이야? 네가 네 예쁜 상판대기 하나 믿고 방싯방싯 웃는다고 나까지 속없이 웃어 줘야 되냐? 나 표정 관리 못 한다고 짜증내는 건 아린스면 족해. 어디서 굴러 들어온 외국인까지 안 웃는다고 지랄이야.”

억지로라도 어쨌든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그녀의 결심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 그녀를 기선 제압 하려고 할 때 쥐뿔도 없으면서 오히려 빳빳하게 날을 세우는 것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많은 손해를 봤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사실 이렇게까지 반응할 것은 없었는데 자꾸만 속이 시끄럽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 버리고 말았다. 유진은 의자를 대충 발로 차서 집어넣고 계단을 올라 그녀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결국 리한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되는 대로 제복을 벗어 내팽개치고 침대에 지친 몸을 던져 누웠다. 사실은 처음 얼굴을 봤을 때부터 온갖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건 리한뿐만이 아니라 타르안의 해체 자체를 향한 욕설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자신이 합리적인 인격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애초부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냥 돈 받는 만큼 책임감 있게 일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타르안의 사진이나 보면서 살면 그걸로 족했다. 그런데…….

“뭐, 내 인생이 그렇지.”

방을 다 정리했는지, 맞은편 방에서 체스트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가 살맛이 안 나.”

* * *

다음 날, 리한의 얼굴을 마주치기가 조금 껄끄러워 유진은 아침도 먹지 않고 일찍 출근했다. 원래 유진은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칼같이 맞춰 최소의 근무 시간만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 때문에 아린스에게 싫은 소리를 몇 번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었다. 그녀가 한숨을 푹푹 쉬며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행정국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찾아온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카이든 루스?”

“오랜만이야.”

검은 머리의 잘생긴 청년이 어제 리한이 앉아 있던 회의실 안 손님용 테이블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아메탄 왕국에서 정보가 가장 빠르고, 그만큼 권력도 상당한 산하기관인 수사국에 몸담고 있는 카이든은 유진의 왕립마법대학 동기였다.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항상 유진보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하고는 있었다.

“행정국은 무슨 일이야?”

“네가 리한 카드민 담당이라며?”

카이든은 보고서 하나를 내밀며 건조하게 말했다.

“이틀 전에 리한 카드민이 망명 신청 했을 때 내가 심문했어. 이건 그 보고서야. 일단은 순수한 의도의 망명이라고 생각할 만한 답변이었지. 담당자에게 넘겨주러 왔어.”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