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나름 성적이 좋았던 유진이 행정국에 지원한 것은 행정국은 원칙과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부서였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부서였기 때문에 지망했던 것이다. 그 원칙과 매뉴얼을 새로 만든다는 것은 끔찍하게 번거로운 일이었다.
근거가 될 만한 모든 문서를 끌어 모아 정리를 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일단 새로 생긴 복잡한 일거리인 데다가 책임 소재도 그녀에게 있고, 차후에 선례가 될 기록도 남겨야 하므로 몹시 짜증났다. 행정국장님께 직접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저 성가신 일을 맡았다는 것 이상으로 속이 시끄러웠다.
그녀의 인생에서 타르안은 유일한 낙이자 위로였다. 비록 스타람과 아메탄이 교역이 끊겨 10년 동안을 실제로 보지도 못하고 살아왔지만, 밀수된 각종 사진과 LP, 가사집, 포스터, 2차 창작물 등을 모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타르안을 해체시킨 장본인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그녀가 가장 좋아했었던 곡을 쓴 사람이기도 했다. 이미 모든 프로필을 외우고 있는, 그녀가 정말 동경하던 남자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를 볼 때마다 그룹을 해체시켰다는 원망과 동시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복받쳐 오르는 이상한 감정도 함께 몰려왔다.
타르안의 해체도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데, 해체한 원인이자 망명한 멤버가 그녀 담당이라니……. 유진은 가늠할 수 없이 폭발하는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은 채 형식적인 일을 기계처럼 할 뿐이었다.
“거주지…… 거주지.”
정말로 제일 급한 건 거주지였다. 유명인이지만 어쨌든 망명 대상이니 지나친 편의를 봐줄 수는 없었다. 사막 국가 한스팀에서 망명해 온 소수부족장에 대한 15년 전 기록을 찾아낸 그녀는 1년 동안 적응 비용을 지원했다는 것을 읽고 지원 기간을 1년으로 정했다. 그러나 유명인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제대로 된 일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식비까지 지원해 주기로 했고…… 합리적인 금액을 찾기 위해 또 다른 기록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행정국의 문서는 모두 정해진 서식에 맞게 작성해야 했는데, 리한은 유진이 회의실에 잠시 들어와 자신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며 평범한 종이에 마법을 걸어 반짝이는 서식을 불러오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관련, 특별관리대상 리한 카드민 거주지. 사안, 아메탄 왕국은 특별관리대상의 관리와 적응을 위해 식비 및 거주지를 지급한다. 기간, 1년. 금액…….”
결국 물가 상승률까지 계산하여 의식주 비용까지 계산하는 데에 오후를 모두 쓸 수밖에 없었다. 현금으로 지원하느냐, 현물로 지원하느냐의 기준을 찾기 위해 또 유진은 온갖 기록을 다 참고해야만 했고 중간중간 원래 맡은 일들도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해가 질 때가 되었는데도 별다른 진전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행정국의 직원들 몇 명이 퇴근하기 시작하자, 유진은 가방을 챙겨 들고 회의실에 있던 리한에게 다가갔다. 리한이 그녀를 발견하고 기계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고 재빨리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마 식비와 거주비가 1년간 지급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리한이 씩 웃었다. 10년 전에는 멀리서 봐서 몰랐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괜히 스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얼굴에 대고 당장 욕을 하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지만 너무 잘생긴 청년이 곁에 있으니 눈길이 가는 건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끝까지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뒤를 돌았다.
“가죠.”
“어디를요?”
“하숙집에요.”
유진은 제복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문서를 다시 편철한 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 거주지 얘기할 때부터 이렇게 처리될 줄 속으로 알고 있었다. 갈 곳 없는, 그러면서도 외모 자체가 절대 평범하지 않은 외국인을 대체 어디에 갑자기 맡긴단 말인가.
“어쨌든 담당 업무니까 철저히 해야죠. 아메니티의 몇몇 하숙집과 제휴를 맺어야겠어요. 앞으로 이런 경우가 생기면 제휴를 맺은 하숙집 중 자리가 있는 곳에 머무는 걸로…… 그래야 관리도 쉬우니까…….”
“제휴를 맺은 하숙집이 벌써 있나요?”
“아직 바빠서 한 곳밖에 맺을 수가 없었어요.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나머지는 내일 알아봐야죠.”
리한은 키가 작지만 당차게 걷는 그녀를 따라가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이 같은 첫인상과는 달리 상당히 깐깐하고 꼼꼼한 여자였다. 대충 처리할 만도 한데 자꾸만 다음번 사례를 생각하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이 갑갑해 보이기도 했지만, 일단은 믿음이 갔다. 아메탄 사람들은 모두가 이렇게 꼼꼼한지, 아니면 이 여자의 특징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어떻게요? 여기는 전화도 없던데…….”
“지금 통보하러 가는 거예요.”
전화가 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유진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사는 하숙집에요.”
“네?”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게 되겠네요. 말 놓으셔도 돼요. 아까 보니 저보다 나이가 한참 많으시던데요.”
유진은 리한의 나이가 자신보다 8살이나 위라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제 막 알아챈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 주인이 싫다고 하면 어쩌지?”
리한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주변에 자신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며 살아온 결과였다.
“그럴 리 없어요.”
유진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면서 대꾸했다.
“스타람 사람이라고 하면 아마 공짜로라도 데리고 있고 싶어할 테니까요. 아, 모자 좀 쓰실래요? 팬들에게 소재지를 들키면 피곤해질 수도 있으니까.”
* * *
“세상에.”
체스트는 상황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유진을 꼭 끌어안았다.
“늘그막에 이런 호사가 다 있구나. 유진 유니트, 별로 살갑지도 않고 방을 깨끗하게 쓰지도 않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청소도 못하게 하는…… 딱히 좋은 하숙생은 아니었지만 결국 너를 하숙생으로 받은 건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이었네.”
“……뭐…… 칭찬이죠?”
유진은 지친 눈으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60이 넘은 노인, 체스트의 눈가에 기쁨의 주름이 가득 찼다.
“이 하숙집 주인이고, 체스트라고 편히 불러요. 유진의 맞은편 방이 비어 있으니 그 방을 쓰시구려. 금방 치워 줄게.”
이 상황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리한을 보며 유진이 성의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체스트는 스타람을 연구하던 교수님이시니…… 스타람 사람을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으실 거예요. 물론 10년 전에 제국이 봉쇄령을 내려 스타람과 교역이 끊기면서 밥줄도 끊기셨지만.”
“정확히는 스타람의 전기공학 전공이었단다. 그리고 밥줄이 뭐니. 누누이 말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거상이셨고, 난 돈은 많단다.”
체스트가 홀홀 웃으며 신나서 대답했다. 유진은 식탁에 앉으며 턱을 괴고 체스트를 바라보았다. 체스트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던 것이었다. 푸근해 보이던 할머니의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10년 동안 스타람에서 전기공학이 엄청나게 발달했다지? 스타람 사람을 한 번만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전기가 없는 곳에 오니 답답하지는 않던가? 아니, 이런 건 나중에 천천히 길게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일단은 피곤할 텐데 여기 잠시 앉아 있으면 방부터 치워 줄게요.”
리한은 유진의 맞은편에 어색하게 앉았다. 유진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향하는 시선을 어쩌지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체스트가 종종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자 그들 사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리한이 긴 손가락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정국 소속의 제복을 입고 있던 유진은 거친 손길로 블라우스의 리본을 푸르고 두 눈을 비볐다. 해가 지면서 부엌이 살짝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느낀 유진은 아무 생각 없이 마법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갑자기 밝아진 마법구를 보며 리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마법……이군.”
“……네.”
“흠.”
리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전깃불을 쓰는데. 전구와 비슷하군.”
유진은 그게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스타람의 가수를 좋아하긴 하지만 스타람의 문화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도 아메탄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마법이 아닌 것은 일단 하등하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이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다는 것이 타르안 해체의 증거라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계속 그의 눈을 피하자, 리한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제는 왜 연차였어? 어제 만났더라면 조금 더 빨리 여기에 올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어떻게든 제 담당이 되는 걸 제가 막았겠죠.”
유진은 부루퉁해서 대답했다. 그가 하핫, 하고 어색하게 웃더니 또 말을 걸었다.
“도시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 같아. 사람들도 친절하고.”
“하루 있었잖아요.”
“아메탄은 거의 10년만인데…… 스타람에 비하면 많이 변한 편은 아니군.”
“발전을 못했다는 뜻이죠.”
“확실히 제국보다는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아. 제국은 반란군들 때문에 사람들이 긴장해 있는 게 눈에 보이거든. 자꾸만 전투가 벌어지니까.”
“여기도 살기 힘들어요.”
이틀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리한이 조곤조곤 다정하게 말을 꺼내는데, 유진은 멍한 눈으로 대충 대답할 뿐이었다. 그가 지치지 않고 말했다.
“뭐, 아메탄은 신기한 왕국이야, 여러모로.”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