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93/256)

  

3화.

“유진 유니트?”

“네! 이제 2년 차에 들어가지만 수석 출신이니 행정국장님께 보고할 명분은 서지 않을까요? 게다가 오늘 이틀째 연차 아닙니까? 새로운 국왕이 즉위해서 바쁜 이 시기에 연차를 냈다는 건 사실 일이 많지 않다는 거라고요.”

“흠.”

아린스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 키탄이 수염을 쓸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없는 사람에게 일이 돌아간다는 것은 어느 집단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업무 분장에 ‘특별 관리 대상 망명 업무’를 신설하고 유진 유니트 담당으로 넣어 놔.”

“예. 혹시 모르니 외교부 협업 업무라는 단서까지 달아 두겠습니다.”

아린스가 번개같이 대답했다. 이로써 일은 끝났다는 듯 키탄은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다른 서류 작업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유진의 연차는 오늘까지였다. 아린스는 쿠키를 먹으면서 느긋하게 턱을 괴고 있는 푸른 머리의 외국인 남자를 한 번 더 흘끗 바라보았다. 조각처럼 잘생겼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보았다. 대륙에 팬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데, 그 인기가 한순간에 납득이 될 만큼 깔끔하게 생겼으면서도 뇌쇄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남자였다. 보고 있으니 현실감마저 사라질 외모라서, 눈을 떼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름이…… 리한 카드민이라고 했던가. 아린스는 스타람 섬에는 아예 관심이 없어서, 타르안이라는 그룹 가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스타람 태생이니 마력은 조금도 없겠지……. 그런데 마치 마법을 쓴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린스와 눈이 마주친 리한이 싱긋 웃었는데, 그녀의 볼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어떤 절차를 밟으면 되나요?”

“아…… 내일 담당자가 옵니다. 유진 유니트라고 하는데, 담당자에게 문의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오늘은 일단 저희 당직실에서 묵으시고요.”

“흠.”

리한이 유진 유니트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 이후에는요?”

“아…….”

아린스가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그거야 담당자의 재량이죠.”

1. 일거리

유진은 아침에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속으로 노엘의 욕만 하고 있었다. 밀수꾼의 정보가 제일 빠르고 정확하다면서, 리한이 온다는 길목은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을 타고 몰래 내려올 것이라는 노엘의 정보와는 다르게 리한은 너무도 당당히 최단거리의 국경을 넘어왔고,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큰 소란이 벌어졌다고 했다.

결국 노엘은 남들만큼의 정보도 없었던 셈이었다. 너무 최단거리고 개방되어 있는 공간이라 헛소문인 줄 알고 걸렀다는 노엘의 변명에 유진은 길길이 뛰며 약속한 금액의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짜증을 냈다. 아까운 연차도 두 개나 날렸으니 그녀는 속상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도저히 얌전히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이제 제발 좀 가라고 사정하다시피 하는 노엘의 가게까지 쫓아와 끊임없이 분노를 쏟아 냈지만, 딱 봐도 수상한 사람들이 그의 가게로 하나둘씩 오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밀수업자가 떳떳한 사람들과 거래할 리 없었기 때문에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때까지 노엘을 괴롭힌 덕에 타르안 2집 LP와 호웰의 사진까지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타르안의 해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과연 평생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출근한 행정국 관사 내에서 회의실에 있는 리한 카드민을 마주쳤을 때 유진은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하는 마음으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 유진. 혹시 타르안의 리한 카드민이라는 사람 알아?”

1년 선배 아린스가 막 출근한 유진을 끌고 회의실에 가는 길에 말을 걸었다.

“되게 유명한 사람이라는데…… 스타람 섬 출신이래. 이 사람 보려고 어제는 행정국 앞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니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야. 세상에, 아직도 스타람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하여간 나도 평민이지만 평민들의 취향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그런 저주의 땅에서 온 마력 하나 없는 남자한테 어떻게 저렇게 미칠 수 있는지…….”

‘제가 이 사람을 직접 보려고 이틀간 연차를 썼답니다.’

유진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누르고 눈을 깜빡이며 낮게 대답했다.

“아…… 들어 본 적만 있어요. 중학교 때…… 렌토 지역에 공연을 온 적이 있거든요.”

“제국이 봉쇄령 내리기 전인가 보구나. 여튼 이 사람이 어제부로 아메탄에 망명하기로 했어. 스타람의 반제국적인 정책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대. 왕정 옹호자라나. 뭐,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고.”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던 리한이 싱긋 웃었다. 10년도 더 전에 높은 무대 위에서 빛나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10년의 세월이 무색하듯 그는 별달리 외적으로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유진은 이 상황이 믿을 수가 없어서 자꾸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괜히 필요 없는 서류만 꼭 쥐었다.

“스타람 섬의 유명인이 아메탄에 망명한 게 처음이라…… 업무 하나를 신설했어. 특별 관리 대상 망명 업무고, 외교국 협업이야.”

“아…… 네…….”

유진은 표정 관리를 하느라고 입술을 깨물어야 했지만, 평소에도 그다지 상냥하거나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린스는 그녀가 당황하고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툭 던졌다.

“네 업무로 편철했어. 알아서 해.”

“……네에?”

유진이 정신을 놓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제 업무요?”

“어. 이런 사안이 처음이라 전례는 없어. 네가 실무자로 처리하고, 기록 남겨 놔.”

아린스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유진이 반사적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참조할 만한 문서는요?”

“그런 게 있겠어? 여하튼 알아서 해. 행정국장님 돌아오시면 바로 보고하고.”

아린스는 매몰차게 돌아서서 회의실 문을 다시 열었다. 유진은 어안이 벙벙하여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서, 선배님! 잠시…… 심지어 외교국 협업이라고요?”

“그렇다니까. 시간 날 때 외교국 들러서 징표 받아 와.”

순식간에 이루어진 대화였지만 유진은 자신에게 엄청난 업무가, 그다지 실적이 되지도 않으면서 엄청나게 번거롭기만 한 업무가 주어진 것을 빠르게 인식했다. 게다가 외교국 협업이라니, 이제 외교국과의 경계가 모호한 일이 생기면 모두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뻔했다. 유진의 질린 표정을 뒤로한 채 행정국 아린스가 사라지자 회의실 안에는 둘만 남았다. 유진 앞에 홀로 남은 리한이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유진 유니트 씨?”

“…….”

유진은 눈을 깜빡이며 리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항상 흑백 사진으로만 봤던 그가 그녀의 앞에서 심지어 말을 하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다리까지 떨림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리한의 손을 형식적으로 잡고 흔든 뒤 빠르게 놓았다. 그리고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했다.

“……일단 앉아 계세요. 당장 급한 일이 계신가요?”

“……거주지?”

“……아.”

“자유롭게 살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일단 일정 기간은 국가 관리하에 있어야 한다고.”

“그건 당연하겠죠. 어쨌든 유명인인데.”

“저기…….”

머리를 감싸 안고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세상 다 산 표정을 하고 있는 유진에게 리한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제가 돈은 많으니, 대충 알아봐만 주시면…….”

“저기요.”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대답했다.

“다음번에 망명한 유명인은 돈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당신을 처리한 게 전례로 남을 텐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결정할 수는 없어요.”

“어…….”

“아메탄의 산하기관은 전문성을 가진 곳이에요. 그만큼 일 처리에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요. 뭐 하나를 결정하더라도 책임감 있게 해야죠.”

리한은 유진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는 것을 눈치채고 흠칫했다. 눈웃음을 살짝 쳐 보았는데도 유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책임감 있는 결정이요.”

그녀가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하고, 한숨을 한 번 쉬었다. 타르안에 대한 책임감 없이 혼자 망명해 버린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타르안의 팬이었다는 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스타람 섬과의 교역은 불법이었고, 학생일 때면 몰라도 공적인 기관에 몸담고 있는데 스타람 섬의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걸 들켰다가는 결국 평민 출신이라 취향이 고급스럽지 않다고 조롱이나 받을 것이 뻔했다. 귀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제국 기반의 신분제를 추종했고, 봉쇄령 이후 스타람의 문화 자체를 천한 것으로 취급했다.

“일단 기다려 보세요.”

리한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일 처리가 아무리 귀찮다고 해도, 대놓고 이렇게 적의를 보이는 여자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꽃 같은 외모로 대다수의 여자들에게 호의만 받아 오다가, 정작 자신의 담당자라는 자그마한 여자에게 차가운 대접을 받으니 뭔가 의기소침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는데, 난감하거나 할 때 살짝 웃기만 하면 거의 모든 일이 해결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어질한 머리를 한 번 짚고 한숨을 한 번 쉰 뒤, 비틀거리며 회의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유진의 굳은 얼굴을 보고 행정국의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일이 몹시 짜증나는 업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례도 없고, 참조할 만한 문서도 없고, 다만 기록은 남겨야 하고…… 다시 말하면 유진의 업무 처리가 앞으로의 모든 비슷한 업무의 전례가 된다는 뜻이다. 잘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계속해서 회자될 일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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