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92/256)

  

2화.

노엘은 후, 하고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둘은 같은 중학교를 나왔지만 인생의 길이 아예 달랐다. 유진은 착실히 공부하여 결국 산하기관에 수석으로 입사하기까지 한 재원이었고, 노엘은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상단에 들어갔다. 머리가 좋고 욕심이 많은 평민들은 거의 대부분이 상단에 발을 들였는데, 노엘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가장 수익률이 좋다는 밀수에 몸을 담았다.

“호웰의 사진은?”

“여기.”

“아, 정말 멋있다.”

호웰은 타르안의 리드 보컬으로, 유진이 가장 좋아하는 멤버기도 했다. 흐릿한 흑백 사진을 보며 유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런 유진을 바라보며 노엘은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원래부터 유진은 잘 웃는 성격이 아니었다. 타르안의 밀수품이 아니라면 유진의 미소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노엘조차도 보기 힘들었다.

“체스트만큼이나 나이가 들어도, 호웰을 볼 수 있다면 대륙 끝까지라도 갈 거야.”

유진이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노엘과 유진은 밀수꾼과 고객의 관계로 묶여 있었지만 사실은 10년 지기 친구기도 했다. 노엘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쁜 소식…… 말해도 돼?”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뭔데?”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안에 온다고 체스트에게 말해 놓았으니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가장 정보가 빠른 사람들이 밀수꾼인 건 알지?”

“알지. 그래서 뭔데?”

“……너…… 타르안의 공연은…… 아마 평생 못 볼 거야.”

“웃기지 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교역이 내 평생 한 번은 풀리지 않겠어?”

“아니. 평생 못 봐.”

유진이 악담하지 말라고 짜증을 내려는 순간, 노엘이 말을 이었다.

“타르안의 리더, 리한 카드민이 스타람 섬을 탈출했어. 최근 스타람이 신분제를 완전 폐지하고 공화정 체제로 굳힌 건 알지? 그게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다며 제국에 망명하겠다고 했는데…….”

“……뭐?”

유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워낙에 대륙 전체에 팬들이 많다 보니…… 비밀리에 바다를 건너왔는데도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온갖 팬들을 이동할 때마다 몰고 다니고 있어. 봉쇄령이 내린 지 10년인데도 아직 팬들이 남아 있는 게 신기해. 아, 내 앞에도 있지만.”

리한 카드민은 타르안의 리더로, 실질적으로 작곡과 작사를 담당하고 있는 그룹의 주축 멤버였다. 유진은 리한의 생일은 물론 그가 좋아하는 음식까지 다 외우고 있었지만 그의 정치적인 색깔이 어떤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당연히 타르안은 해체야. 타르안이 가진 영향력이 어마어마한데, 그 리더가 스타람에 반기를 들었다는 건 사실상 엄청난 타격이니까. 나머지 멤버들은 사상범으로 즉시 체포되어 격리되었다는 말이 돌고 있어……. 상황이 난리도 아니야.”

“…….”

노엘은 타르안이 유진의 인생에서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진이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이 상황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꼼짝도 못하고 있는 유진을 바라보며 노엘이 뒤통수를 긁었다.

“리한의 동선을 보니까…… 제국에 터를 잡을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제국 망명은 부담스러운지…… 우리도 아주 정확한 정보는 모르지만…….”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아메탄 왕국에 망명할 것 같다, 그게 우리 의견이야.”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유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타르안 2집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노엘.”

“응.”

“이 2집…… 내가 중학생 때, 그때 발표했던 노래들이야.”

“그……렇지.”

“그 공연을 봤던 기억들로 살아갈 수 있었던 순간들이 있었다고.”

“…….”

“……어디야?”

“어?”

“어느 국경인데? 어디로 오고 있는데? 어느 지역이야?”

그녀가 울컥하는 목소리로 소리치듯 물었다.

“내 눈으로 봐야겠어! 네 말 못 믿어! 리한 카드민이 타르안을 버리고 아메탄으로 온다고? 다른 멤버들을 다 버리고? 그럴 리 없어. 헛소문이야. 타르안이 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리한이 그렇게 쉽게 이 모든 걸 다 없애 버린다고?”

“……유진, 진정해.”

“나 진정하고 있어, 충분히 진정했다고.”

노엘이 그녀의 팔을 붙잡자, 그녀가 차분히 떼어 내며 말했다.

“지금 당장 간다는 거 아니야. 내일 출근해서 연차 내고 갈 거야. 이 정도면 내가 얼마나 이성적인지 알겠지? 당장 말해, 노엘 하이트.”

그가 갈색 눈으로 빤히 유진을 바라보았다. 세련된 옷차림, 고급스러운 안경테 등이 그가 나름 굉장히 성공한 장사꾼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의 앞에서 싸구려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유진은 마치 시골에서 올라온 여동생 같았다. 유진의 키가 작은 편이어서, 노엘은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였는데도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유진, 정보도 돈이야. 알지?”

“1년 치 월급 달라고 해도 줄게. 어차피 내 삶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타르안뿐이었는데 1년 치 월급이 대수야? 가서, 가서 직접 얼굴이라도 볼 거야. 솔직히…… 안 믿긴단 말이야.”

“……나랑 같이 가.”

“어?”

“날 고용하라고. 고객이기 전에 친구야. 제정신도 못 차리는 상태의 여자애를 어떻게 혼자 보내냐? 거기에 파리 새끼 하나 못 잡을 정도로 체술도 형편없으면서.”

“필요 없어. 내가 애냐?”

“나랑 같이 가는 조건 아니면 안 알려 줘.”

유진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노엘은 성공한 상인답게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여 한번 마음먹은 것에 대해서는 어지간하면 타협해 주지 않았다. 결론이 이미 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한 번 더 짜증을 냈다.

“너답지 않은 소리 하지 마. 네가 우정보다는 돈이라는 걸 모를 것 같아? 네가 왜 날 따라오니? 시간이 곧 금인 네가.”

“너도 내겐 금이니까.”

노엘이 씩 웃었다.

“산하기관 인맥이 흔한 줄 알아? 너를 잃으면 난 행정국에 끈이 없어.”

“행정국만큼 너한테 도움이 안 되는 부서는 없을걸. 행정국은 진짜 시키는 것만 하는 곳이야.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정치적인 부서도 아니고…….”

“도움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판단하는 거야. 장사꾼의 시야가 공무원 샌님인 너보다는 넓으니 토 달지 마시게.”

노엘은 여유가 넘치는 표정이었다. 유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항상 아쉬운 사람은 그녀였고, 그래서 언제나 유진은 노엘이 파는 것을 살 수밖에 없었다.

* * *

“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평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래도 고성이 절대 오가지 않는 부처라는 행정국에서 큰 소리가 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외교국으로 보내. 행정국 관할 일이 아니야. 아예 업무에 없다고. 어쨌든 외국인이잖아? 게다가 스타람이라니. 전무후무한 사건인데 행정국이 왜 이걸 맡아?”

“아, 그게…….”

아린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외교국장님께서…… 이미 망명했으니 외교적 협상이 필요한 사안은 아니라고…… 행정적인 절차만 밟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필 행정국장님이 출장 중이실 때!”

과장인 키탄이 짜증을 내며 펜을 던졌다. 귀찮은 일거리가 하나 들어왔고, 다른 부서에 넘길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났다. 키탄이 관련 기록들을 몇 개 훑어보았으나 전례가 있을 리 없었다.

행정국에서는 명언처럼 회자되는 말이 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

행정국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묻혀 있던 사실을 밝혀내거나, 협상을 시도하여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부서가 아니었다. 어제가 오늘처럼, 내일이 오늘처럼 흘러갈 수 있도록 체계화하여 문서 작업을 하거나 행사를 보조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매뉴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매뉴얼이나 전례에 따라서 할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이고, 가장 나쁜 일은 이렇게 아무런 문서도 참조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 닥치는 것이었다.

키탄은 아무 문서도 참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짜증스럽게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젊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바다 색깔로 물결치는 머리카락에서부터 날렵하게 뻗은 눈꼬리, 길쭉길쭉한 손가락과 까딱거리고 있는 발목까지 이상하게 색기가 넘치는 남자였다. 아린스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 저기요?”

“네.”

중저음이 듣기 좋게 울렸다. 아린스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배…… 안 고프세요? 저녁도 안 드셨는데…….”

“아, 조금요.”

그의 별것 아닌 대답에 아린스가 자신도 모르게 간식 서랍을 열어 어느새 붉어진 얼굴로 온갖 쿠키를 쏟아 내는 것을 바라보며 키탄이 한숨을 쉬었다. 스타람 섬에서 오늘 요란 법석을 떨며 망명해 온 저 잘생긴 남자가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었다. 얌전히 국경을 넘어와서 있는 듯 없는 듯 몰래 살 것이지, 누가 유명인 아니랄까 봐 수만 명의 팬들을 이끌고 천천히 이동하는 바람에 일이 커져 버렸다.

“어차피 전례도 없고, 요란하기만 하지 중요도도 떨어지는 일이니까 과장급에서 할 일은 아니야. 아린스, 네가 알아서 해라.”

“네?”

아린스가 펄쩍 뛰며 미간을 찌푸렸다. 잘생긴 외국인에게 베푸는 호의는 간식까지였는지, 그녀가 재빠르게 선을 그었다.

“과장님,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다니엘 전하께서 요구하신 자료를 준비하는 일의 책임이 저한테 있다는 건 아시죠? 게다가 전례도 없다고 하시니 참고할 만한 처리 규정도 없는 거잖아요. 그냥 평범한 외국인 이민 절차를 밟는 것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유명인이잖아. 정치적인 의미도 있는 사람이라고. 초짜들에게 넘겼다간 행정국장님께서 돌아오시면 화내실 거야.”

키탄이 피곤하다는 듯이 눈을 쓸어 내렸다.

“아이돌? 스타람 섬에서는 가수를 그렇게 부른다고? 하이고…… 전 대륙에 이렇게 팬들이 많다는데, 당장 우리 아메탄에서도 왕궁 밖까지 팬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데, 어떻게 일반 이민 절차를 밟겠어? 이런 유명인이 스타람 섬이 싫다고 실질적으로 제국령인 우리나라에까지 온 건 나름 상징성이 있다고. 나 참, 그러니까 외교국에 넘기고 싶었던 건데.”

“음…….”

아린스가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그럼 유진에게 맡기는 건 어떨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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