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유진은 집에 가자마자 행정국 제복을 벗어 던지고 최대한 후줄근한 옷을 걸쳐 입었다. 챙이 넓은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나니, 원래 체격이 작고 아담한 유진은 마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민 소녀처럼 보였다.
유진은 왕궁 직속 산하기관 행정국 소속으로, 아메탄 왕국의 제도상 평민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엘리트였다. 왕립마법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물론 그녀보다 더 뛰어난 성적의 학생들이 행정국을 지망하지 않아서였긴 했지만, 어쨌든 행정국 수석으로 입관하기까지 했다. 사회생활에 큰 재능이 없어 선배들에게 밉보인 것 빼고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을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체스트, 저 다녀올게요!”
“퇴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딜 또 나가? 저녁 먹어야지!”
“한 시간 안에 와요!”
그녀는 남쪽 바닷가 마을의 칠 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작고 손아귀 힘도 야무지지 못했던 그녀는 바닷가 마을에서 자신이 하등 쓸모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유진이라는 이름부터 부모가 그녀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가를 유추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유진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다수의 시간을 ‘약해 빠져서 쓸데가 하등 없는 천덕꾸러기 계집애’라는 말만 집에서 듣고 살았다.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생각보다 공부에 재능이 있었던 그녀는 월반을 거듭하여 대도시의 중학교까지 유학을 나가게 되고, 더 큰 도시의 고등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하며 왕립마법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왕립마법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기숙사 생활을 했으나, 졸업 후 왕궁 산하기관인 행정국에 입사하게 되자 정말로 있을 곳이 없어졌다.
산하기관의 월급은 상당했으나 유진의 경우 대다수의 돈을 그녀의 학업을 늦게까지 뒷바라지해 준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보내야 했기 때문에 수도 아메니티의 높은 월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왕궁 산하기관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것도 한 기관에 수석으로 입사했다는 것은 평민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자리였기 때문에 그 시기에는 유진의 부모님도 발 벗고 나서서 유진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유진의 어머니의 막역한 친구의 이모님의 사돈이 아메니티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유진을 의탁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체스트 카티로, 60이 넘은 은퇴 교수였는데 유진은 필요한 마법을 써 준다는 조건으로 그녀에게 최소의 하숙비를 내고 그 집에 살았다. 원래 하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숙생도 그녀뿐이었다.
유진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골목길 몇 개를 지나 지하도를 건너 간판도 없는 어떤 선술집의 문을 쾅쾅 두드렸다.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문의 건너편에서 울렸다.
“별에 사는 비둘기.”
수수께끼 같은 말에 유진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새벽녘 달의 그림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유진은 살짝, 꽤 긴장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고, 모자를 한 번 더 푹 눌러쓴 채로 재빨리 문 속으로 들어갔다.
“여, 공무원 나리, 요새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냐?”
그녀가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자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암호를 물어 왔던 남자였다. 갈색 머리를 짧게 묶고 동그란 안경을 걸친 청년의 이름은 노엘 하이트로 유진의 중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유진은 헐렁한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지고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했잖아. 일이 좀 많아야지……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해. 아린스는 매일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고. 그럴 때마다 우리 타르안의 물품들을 보기 위해 나를 파는구나, 하고 정신 승리해야 한단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산하기관 공무원이 이렇게 불법 수입 업체에 자주 발걸음을 하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징계 먹는 것 아니야?”
공무원이라는 단어는 평민들이 산하기관 직원들을 비꼬듯이 말하는 호칭이었는데, 유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누가 뒤를 밟을 만큼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서. 네가 신고만 안 하면 돼.”
“포상금 같은 푼돈보다 네가 우리 가게에 쓰는 돈이 더 많은데 우리 VIP 고객을 내가 신고할 리가. 잠깐 기다려 봐. 사실 좋은 소식 하나랑, 나쁜 소식 하나가 있어.”
“좋은 소식부터. 나쁜 소식부터 들으면 불행한 시간이 더 길어지니까.”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노엘은 흐음, 하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좋은 소식은…… 네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타르안 2집 LP를 구했다는 점? 서비스로 호웰의 공연 사진까지 한 장.”
“미리 듣길 잘했네. 이렇게 기쁜 소식을 기분 나쁜 채로 들을 수는 없지. 빨리 가져와 봐. 실물부터 영접하고 싶으니까.”
무심한 말투와는 반대로 유진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타르안은 스타람 섬의 5인조 남성 그룹 가수로, 그 섬에서는 ‘아이돌’이라고 부른다고 했었다. 아메탄과 스타람 섬의 교역이 끊기기 전, 타르안이 그녀가 공부하고 있던 렌토라는 도시에 순회공연을 온 적이 있었는데 유진은 그때 타르안에게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마력이 아예 사라진 땅이라는 스타람 섬은 불행과 반동의 땅으로 유명했다. 스타람 섬에서는 풀 한 포기조차 마력을 머금고 있지 못하며,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들었다. 10년 전 제국이 봉쇄령을 내리면서, 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약소국 아메탄 왕국은 스타람과 모든 교역을 끊었다. 스타람 섬과 연관된 모든 물품들은 불법으로 거래될 수밖에 없었는데, 유진은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거의 대다수의 월급을 이 불법 거래에 쏟아붓고 있는 중이었다.
“비싸게 받을 거지?”
“당연한 거 아니냐? 목숨 걸고 밀수해 온 거야. 위험수당도 포함해야지.”
“스타람이랑 교역을 다시 하게 되면 넌 뭐 먹고 사냐?”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시게.”
노엘이 키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제국은 절대 스타람을 인정하지 않아. 왜인지 알아?”
그가 모서리가 해진 LP판을 까딱거렸다. 유진의 눈이 LP판을 따라 똑같이 흔들렸다.
“스타람은…… 마법이 없어도 충분히 편리하고, 강하고, 부유하게 살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 불행과 결핍과 가난의 땅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공공연히 알려지고 교역이 뚫리는 순간…… 정말 많은 것이 바뀔 거야. 마법으로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황제에겐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고.”
“황제가 스타람까지 신경 쓰겠니? 반란군 잡기도 벅찰 텐데.”
그녀가 참지 못하고 노엘이 들고 있던 LP판을 붙잡아 가슴에 끌어안았다. 가격과 상관없이 그녀는 처음 ‘타르안 2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구매하리라 마음먹었다.
“제국이 바쁠 때 아메탄이 눈치 봐서 신문물 좀 받아들이면 되지. 어차피 마력도 계속 사라져 가는 마당에 말이야. 새로운 왕이 좀 그랬으면 좋겠지만…… 루벤과 대립각을 세운 사람이니 친제국파일 것 같긴 해.”
루벤은 지금 아메탄 왕국의 국왕으로 있는 다니엘의 이복형으로, 더 이상 제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스타람의 전기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도 스타람과의 교역에는 관심이 지대했던 유진에게는 희망과도 같은 이름이었지만, 그는 국왕이 되지 못했다.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됐어. 높으신 분들 일에 관심 가지는 건 나 같은 소시민한테 아무 의미 없는 일이지, 뭐.”
“산하기관 공무원 나리께서 왜 갑자기 자신 없는 목소리야? 왕국이 인정한 엘리트께서.”
“그래 봤자 가난한 평민인데 무슨.”
그녀가 먼지 쌓인 의자에 대충 앉으며 쓰러져 가는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내가 입사하자마자 우리 아버지는 빚을 지고 배를 바꿨어. 그 빚은 당연히 내가 갚아야 하는 거고. 큰오빠는 당연히 내가 자기 조카들 학비를 대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큰오빠가 내 중학교 학비를 대 줬으니까 당연하겠지? 하지만 내겐 형제만 6명이 있다고. 학비를 대 줘야 하는 조카가 대체 몇 명인 거야? 두 명씩만 낳는다고 해도…….”
그녀가 무덤덤하게 초점 없는 눈을 깜빡였다. 워낙에 작은 체구인 데다가 얼굴도 아이처럼 생겨서 유진은 20대임에도 불구하고 10대 중반의 꼬마처럼 보였다. 그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삶의 피로감이 가득했다.
“내가 귀족들처럼 영지를 받은 것도 아니고…… 행정국이 뭐 대단한 권력을 가진 곳도 아니고……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월급이나 따박따박 받고 집에 돈이나 보내며 살아야지. 그래도 난 행복한 편이니까 괜찮아. 적어도 날 행복하게 하는 게 뭔지는 알잖아.”
유진의 초록색 눈이 반달로 휘어지며 LP판을 꿈꾸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렌토에서 중학교를 나온 건 팍팍한 내 인생에서 가장 행운이었어. 어쨌든 타르안의 순회공연을 우연히 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타르안의 노래를 듣고, 타르안의 공연을 처음 본 순간 번개 맞은 것 같더라니까.”
평소 같았으면 ‘100번도 더 들었으니까 그만해라.’라고 통박을 줄 노엘이 약간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지되어 있지만…… 타르안의 노래를 듣고, 타르안의 물품들을 수집할 수 있어서 행복해. 내 생애 한 번만이라도 교역이 풀려서 타르안의 공연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런 희망만으로도 일단 살 만한 세상이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