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256)

90화.

“리젠.”

아셰는 루스에서 가져온 선물이라며 서쪽 지역에서 나는 찻잎 세트를 가져온 리젠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왜 욕하지 않아?”

“뭘요?”

“어떻게 피를 나눈 오빠를 죽이냐고, 한 나라의 운명을 건 태자를 없애고 그토록 태연할 수 있냐고, 무섭고 잔인하고 소름끼친다고. 왜 한 번도 안 욕해?”

리젠의 앞에서는 태연히 말해도, 그녀는 로즈리와 지젤을 마주칠 때마다 흠칫했고 가끔 윌리엄의 꿈을 꿀 때면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글쎄요.”

리젠은 아셰가 끓여 준 차를 마시고 살짝 웃었다. 사실 아셰의 궁에 오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아무도 아셰의 차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아셰는 아주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한 셈이었다. 그녀는 이제 어깨 정도로 자란 갈색 머리를 자연스럽게 묶고, 다소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찻잔을 돌렸다.

“왕녀님은, 왜 저한테 욕 안 하세요?”

말문이 막혀 있는 아셰에게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게 재판 직전까지 쓰러지기 직전인 목숨을 살려 주고 수면제까지 먹여 가며 신세를 지게 해 줬더니, 아무 언질도 없이 고발했다고, 배은망덕하다고.”

“……모르겠네.”

다니엘을 똑같이 닮은 그녀의 푸른 눈이 멍하니 리젠을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하는데, 또 너라면 꼭 그럴 것 같아서…… 새삼 놀랍지도 않아.”

“저도 그래요.”

리젠이 씁쓸하게 동의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하는데, 왕녀님 입장에서는 또…… 그럴 것 같아서. 그렇게 배워 오셨잖아요. 저도 사실 배운 대로 하는 거니까.”

아셰가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집행유예 중인 그녀는 자유가 묶여 어디로 갈 수조차 없었지만, 사실은 이 궁을 떠나기 싫어 이런 짓을 벌였으니 할 말은 없었다. 아셰는 단 하나밖에 없었던 그녀의 친구를 앞에 두고 다소 쓸쓸해졌다. 생각해 보면 리젠은 한 번도 그녀의 속을 먼저 시원하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늘 아셰가 먼저 묻거나, 혹은 부추겨야만 진심을 가끔 보이곤 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학창 시절을 함께했는데도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고, 르엘라가 죽은 뒤에도 힘들고 외롭다는 말 한번 한 적이 없고, 졸업 이후에는 바로 깍듯하게 그녀를 왕녀님이라고 불렀던 리젠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속을 보이지 않아도 이해해 달라’라는 르엘라의 말이 언제나 떠올랐다.

“더 있고 싶지만, 훈련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일어날게요.”

“벌써?”

“네. 카이든이 엄청 겁을 줬는데, 겁을 줄만 하더라고요. 저는 완전 기초만 배워서 정식 수사국 직원의 반의반도 안 배운다는데 너무 바빠요. 힘들고요.”

그러나 르엘라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셰는 리젠을 쉽게 미워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진심을 터놓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주 찾아오라는 그녀의 부탁에 바빠도 꼭 시간 내어 얼굴을 비추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 때문이었다. 리젠은 르엘라보다 표면적으로는 훨씬 더 밝고 명랑해 보였고, 적당히 권력에 타협하는 척하기도 했지만 사실 표현하지 않고 마음을 쓰는 것이 르엘라를 많이 닮았다고 아셰는 생각했다.

“그래도 하고 싶었던 일이라 그런지, 재미있어요. 그러면서 좌절하고 있다니까요. 이런 훈련을 훨씬 더 강도 있게 받은 카이든하고는 평생 대련해도 못 이기겠구나…….”

“궁금증은 풀려서 좋다.”

아셰가 피식 웃었다.

“늘 너랑 카이든이 대련하면 누가 이길까, 궁금했는데.”

“마법 써도 턱도 없겠어요.”

리젠이 손을 내저으며 비참한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어서 아셰가 농담을 던졌다.

“그래도 이길걸? 카이든이 널 어떻게 한 대라도 치겠니?”

한 대라도 때리지는 못하지만, 금세 제압해서 제멋대로 할 수는 있는데…… 리젠의 볼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아셰가 볼을 부풀렸다.

“사랑하니까 좋은 모양이네.”

“어…… 예, 그러네요.”

리젠은 살짝 망설이다가, 그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셰가 짜증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미 없어. 너랑 카이든이 있으면 진짜 재미없을 것 같아. 서로 감정 표현은 하니? 카이든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너는 속에 없는 빈말만 할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백 명, 천 명도 보지 못한 서로의 모습을 봐 준다니까요.”

리젠이 씩 웃었다. 카이든은 자신이 이렇게 말이 많고 다정한 사람인 줄 몰랐다며 매일 스스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고, 그럴 때마다 리젠은 자신이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표현하는 성격인 줄 몰랐다며 대꾸했다.

“왕녀님한테도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이.”

“집행유예 중의 살인자한테?”

“모르죠. 등에 채찍 맞아 가면서도 눈 맞는 게 남녀 일인데.”

아셰는 자신도 모르게 리젠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하카트 집안 여자들에게 사랑의 대가란 왜 그렇게 가혹한 거냐고 농담처럼 대꾸하려다가, 르엘라의 생각이 나서 아셰는 순간 눈물을 삼켰다.

“헛걸음이네.”

차르티 수도원은 숲 속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시 마차로 돌아갈 때까지 꽤 오랜 길을 걸어야 했다. 급할 것은 없어서 리젠과 카이든은 천천히 손을 잡고 걸었다. 노랗고 작은 꽃을 피워 낸 산수유를 보며 리젠이 신기한 듯 방긋 웃었다.

“봄이 오려나 봐.”

“때 되니 오겠지.”

“산수유가 폈거든. 제일 먼저 피는 꽃인데.”

“약제국 직원 너무 티내는데.”

“당연하지. 이제 곧 후배도 받는데.”

리젠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카이든이 산수유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 때문에…… 괜히 약제국 들어가고.”

“아니야. 이번 1년간 엄청 공부하고 연구했더니, 나름 정말 재밌어. 고모처럼 천재는 아니어도 고모가 연구한 거 정리하고 찬찬히 보급하는 것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이야.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녀가 정색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덕분에,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어. 수사국 파견 직원으로 와 있는 것도 좋아. 그러니까 더 재미있고, 더 열심히 살 거야. 이제는 그냥, 나를 위해서.”

“그럼 다행이고.”

카이든은 수많은 말을 삼키며 그저 묵묵히 길을 걸었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리젠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이럴 때에는 그저 긍정적이고 평범한 여자애 같았지만, 어쨌든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그녀의 숨겨진 면모를 다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책임지기 위해 진로도 망설임 없이 바꾸고,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토록 많이 다치고 심각한 부상을 겪었지만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진실 앞에서 사사로운 정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그를 살리기 위해 그 상황에서 수면제까지 먹었는데…… 그는 그것도 모르고 다니엘에 대한 질투와 내면을 들킨 민망함 때문에 루스에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한 채 먼 길을 달려 그에게 와 준 강한 여자였다.

“그나저나 어쩌나. 하필이면 북부 지역으로 봉사 활동을 떠난 날이라니. 괜히 헛걸음했어. 모처럼 둘 다 쉬는 날인데, 미안해서 어쩌지?”

감상에 젖어 있는 카이든의 마음도 모른 채 리젠이 한숨을 쉬었다. 큰 맘 먹고 찾아간 수도원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제국으로 전원이 긴급 구호 활동을 나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이 그다지 허탈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카이든이 곁에 있어서였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미안해하지 마. 이게 왜 미안해할 일이야?”

그가 그녀의 머리를 꾹 누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헛걸음 같은 건 없어.”

“응?”

“너랑 함께 가는 길은 헛걸음이 아니라, 뭐든지 추억이니까.”

리젠이 주먹을 쥐고 카이든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뭐야, 로맨틱하게.”

그녀가 깔깔거리며 덧붙였다.

“그 논리면, 내 인생에도 실수 같은 건 없어. 네게 먹였던 시약도 운명이야.”

“맞아.”

저 멀리 그들이 타고 왔던 마차가 보였다. 그 마차를 타고 다시 아메니티로 돌아가야 했다.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너는 내 운명이야.”

“그런 거 안 믿는다며.”

리젠이 볼을 부풀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네가 내 운명인 줄 착각했다고 차갑게 돌아서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 운명으로 만들지, 뭐.”

카이든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살짝 입을 맞췄다.

“이제 난 세상에 진실도 밝혔고, 정말로 여유롭게 또 다른 삶을 살아 보려고. 행복하게.”

“그래. 행복하게 살아야지.”

리젠이 그의 진지한 어투를 눈치채지 못하고 성의 없게 대답했다. 어느새 마차에 도착한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가, 순간 놀라서 그대로 멈췄다.

“……어…… 이건…….”

마차 안이 온갖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메니티에서 잘 볼 수 없는, 정말 희귀한 꽃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었다. 가만히 문을 열고 서서 말을 잇지 못하는 리젠의 뒤에서 카이든이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나랑 같이 행복하게 살아 줄래?”

리젠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어…… 세상에…… 어…….”

그녀가 살짝 몸을 비틀어, 그를 보고 가까스로 웃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전혀 예상 못 하게…… 으음…….”

카이든이 쑥스럽게 웃었지만, 긴장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반지 상자를 꺼냈다. 정말로 고전적이었지만, 그만큼 전형적인 감동이 밀려왔다.

“오늘, 아버님을 만나든 못 만나든, 네게 꼭 결혼하자고 하고 싶었어.”

“아…….”

“이제는, 네 곁에 너무나 당연히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감동에 젖어 한껏 웃으며 떨리는 왼쪽 손을 내밀었다. 그가 씩 웃고, 준비해 온 반지를 끼워 주었다. 보석에 별로 관심이 없는 그녀가 오늘 걸친 유일한 액세서리가 되었다.

“뭐야, 축제까지는 기다린다면서.”

“축제 끝나고 바로 결혼식 올리려면 이제부터 준비해야지.”

억지로 딴청을 피우는 리젠의 손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대고, 그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어딜 가도 내 여자라고, 반지 끼우고 싶었어. 너랑 나랑 공인된 가족이라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꽃 사이로 앉았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던 파란색 꽃을 보며 리젠이 반갑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속삭였다.

“어머, 이건 진짜 비싼 건데. 구하기도 어렵고.”

“……네가 좋아하는 걸 준비하고 싶었는데,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기쁜 표정은 풀 볼 때라서…… 희귀하고 예쁜 약초는 다 모았지.”

“그럼 나도 지금 프러포즈할 수 있겠다.”

리젠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반짝거리는 반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 기쁜 표정은, 날 볼 때니까.”

“좀 억울하긴 한데…….”

카이든이 살짝 한숨을 쉬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맞는 말이네.”

그들을 태운 마차가 다시 출발하고 있었다. 카이든의 말에 리젠이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발랄하게 물었다.

“너도, 나랑 결혼해 줄래?”

그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귀를 깨물고 속삭였다.

“기꺼이.”

리젠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유년기에 속으로 하염없이 울면서 왔던 그 길을 가장 행복한 기분으로 되짚어 갔다. 르엘라가 일기장에서, 그토록 곁에서 다독여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회고했던 그 길이었다.

‘고모.’

가장 예쁜 꽃들을 모아 어설프게 꽃다발을 만들어 그녀의 무릎 위에 놓아 주는 카이든을 말없이 바라보며 리젠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제 다 괜찮은 것 같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왜냐하면…….’

리젠의 눈빛에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어서, 카이든은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오지 못했던 이 길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젠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좋은 꿈을 꿨거든.’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