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56)

88화.

죽어도 안 된다, 그러나 자유도 안 된다고 하는 그들의 끝없는 토론에 또 다른 답을 내린 것도 루벤이었다. 그가 가겠다고 한 곳은 너무나 의외여서 다들 놀랐지만 그래도 합의할 수밖에 없는 결론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언제나 궁이 싫었어.”

“…….”

“그래서 별로 아쉽지도 않아.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라.”

“형 위해서가 아니야.”

다니엘이 벽에 기대며 긴 숨을 내뱉었다.

“그냥…….”

“꼬맹이는 잘 보내 준 거야.”

루벤이 피식 웃으며 다니엘의 등을 한 대 툭 쳤다.

“잘 했어.”

“사실은 좀 더 붙잡고 싶었는데…….”

다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료를 아껴 주니 좋은 왕이 될 거라고 하잖아.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억지로 더 가둬 두겠어. 그나마 갖고 있는 ‘좋은 사람’의 이미지도 사라지게 생겼는데.”

“걔가 좀 영악하긴 하더라.”

석양이 지고 있었다. 창 너머로 노을이 붉게 타고, 그래서인지 다니엘의 기분이 조금 더 침울해졌다. 루벤은 저 석양을 등지고 오늘 궁을 떠날 것이다.

“약 빼고는 세상을 전혀 모르던 제 고모랑은 달라. 르엘라는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더군.”

루벤은 마지막으로 본 리젠의 모습을 떠올렸다. 최종 재판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단정히 입고, 짧은 머리를 억지로 묶은 그녀가 차곡차곡 르엘라의 일기장을 넘겨 주며 계속 덧붙였었다.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네가 무슨 상관이야?’

‘뭐, 제가 지하 미로에서 길 잃고 죽는 꼴을 못 보시던 심정과 똑같겠죠.’

확실히 르엘라와는 달리 천연덕스러운 면도 있고, 오지랖도 은근히 넓었다.

‘그래도 뭔가 삶이 의미 없어지셨다면…… 음, 제가 추천해 드릴 곳이 하나 있는데.’

이미 떠날 생각으로 마음을 굳힌 그녀에게는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차르티 수도원이라고, 얼굴은 못 뵈었지만 저희 아빠가 계신 곳이거든요? 대륙 각지 다니면서 봉사 활동도 다니고, 빈민들 위해 노작 활동도 하고 그러나 봐요. 저희 아빠가 꼭 저희 엄마 돌아가시고 자살하실 것 같았다는데, 거기서 계속 살고 계신 거 보면…… 그래도 어떤 치유가 되는 건 분명한 곳 같아요.’

리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르엘라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리젠을 낳다가 리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딸을 르엘라에게 던져 놓고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루벤은 리젠의 말을 그때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만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시면, 남한테 도움이라도 되시는 게 어때요?’

만일 그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는 멀쩡하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교수형을 당했고, 나람의 숨이 넘어가던 순간 손에 느껴지던 감촉도 생생했다.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었고 죽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아 마치 길을 잃은 듯했다. 마음속에 쉼 없이 들끓는 괴로움을 어떻게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계속 시간을 보내다 보니, 수도원에서 한다는 봉사 활동이나 구호 활동 등이 어머니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속죄인 것 같기도 해서 점점 더 마음이 확고해졌다.

“죽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겠지, 뭐.”

루벤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동생이 얼마나 좋은 세상을 만드는지도 좀 보고.”

다니엘은 천천히 멀어지는 루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그의 단 하나뿐인 친구의 생각이 나서, 하염없이 지는 해만 바라보았다.

테스티의 교수형도 집행되고, 점차 서쪽 지역과 아메니티를 잇던 교통 체증도 줄어들었다. 카이든의 정직 기간도 거의 다 끝나 갔기 때문에, 그들은 아메니티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사실 리젠도 언제까지나 병가를 낸 채로 약제국을 비울 수는 없었다. 제롬 부부가 너무나 아쉬워했지만 카이든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을 잘라 내는지 리젠은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결혼식 안 올리고 가?”

제롬의 주장으로, 리젠은 난생처음 보는 정말 큰 마차를 타게 되었다. 사람이 여섯 명은 거뜬히 탈 수 있을 것 같았고, 꽤나 넓기까지 했다. 제롬과 함께 탄 마차가 평균 규격이었다면, 이 마차는 네 배는 될 듯했다. 말도 네 마리나 있었고, 마부의 자리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제롬도 마리나와 함께 신혼여행을 갈 때만 썼었던 마차라고 했다. 이쯤 되자 이런 마차를 제공해 주는 것은 제롬의 배려가 아니라 압박인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루스에서는 안 해.”

마차를 탈 때까지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 제롬에게 카이든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하긴, 신부 측 사람들도 있을 텐데 아메니티에서 해야죠. 도련님도 루스에는 친구가 없잖아요.”

“뭐…….”

리젠이 반은 장난을 치는 얼굴로, 떨떠름하게 말했다.

“카이든은 아메니티에도 친구가 많은 건 아니에요.”

“어머나, 그래요? 도련님이 좀 말수도 없고 가끔 무표정일 땐 다가가기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무개념은 아닌데 왜…….”

“뭐, 하나 있었는데요.”

카이든이 피식 웃었다.

“여자 문제가 걸려서, 그나마도 좀 멀어지는 바람에.”

마리나가 호들갑을 떨며 대답했다.

“그런 걸로 멀어질 속 좁은 놈은 아예 상종도 마세요.”

만일 그 ‘속 좁은 놈’이 이 나라의 국왕이라는 것을 알면 마리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리젠이 혼자 쿡쿡 거리며 웃고 있는데, 카이든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치면 저도 만만치 않아서…… 할 말은 없네요.”

카이든을 따라 마차를 타려던 리젠의 손을 마리나가 급히 잡아끌었다. 리젠이 마차를 타려는 걸 도와주려던 카이든은 순간 당황했지만, 마리나가 리젠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을 보고 그저 잠시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는 도련님이 저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리젠은 마리나의 속삭임에 귀가 간지러워 키득키득 웃었다.

“아가씨가 있으니 말수도 엄청 늘고, 여하튼 굉장히 행복해 보이세요. 그리고 루스가 좀 아메니티에서 멀긴 하지만, 그래도 부유한 영지라고요.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그냥 결혼해 버려요.”

제롬과 마리나는 리젠을 만날 때마다 결혼 타령이었기 때문에, 리젠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마리나를 꼭 껴안았다. 다소 눈치가 없고 푼수기가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착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리젠이 정말 되고 싶었던 모습이기도 했다. 아무 구김살이 없고, 그저 존재 자체가 밝고 명랑한 사람.

“또 결혼이지? 또?”

마차에 올라타서 출발하자마자, 카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리젠이 조심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리젠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물었다.

“그…… 호수 축제? 그거 언제 하지?”

“중간고사 기간이니까, 봄에 하지. 봄꽃 가득 필 무렵.”

“두 달 정도면 되겠군.”

“……왜?”

“연애하기로 약속한 건 다 하고 결혼해야 할 것 아니야. 난 저렇게 떠밀려서 하는 건 싫어.”

리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자, 카이든이 그녀를 안아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를 꼭 안고 그가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썰매 별로였어?”

“아니, 뭐, 그건 아닌데…….”

마차가 덜컹거리며 험한 길을 지나자, 그가 더 그녀를 꽉 안았다. 그녀가 입은 치마 아래쪽으로 느껴지는 그의 남성에 리젠이 곱게 눈을 흘겼다.

“뭐야, 이건?”

카이든은 그녀의 목도리를 풀어 반대편 자리에 던지고, 그녀의 흰 어깨에 깊게 입 맞추고 나서 그녀의 허리로 손을 감아 넣었다.

“또 꿈꾸고 싶은가 봐.”

바퀴가 큰 돌에 걸렸는지, 또 한 번 덜컹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저 앞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리젠은 카이든에게 뒤로 안겨 중심을 잃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앞자리에 손을 짚은 상태였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카이든이 엎드린 것 같은 리젠의 몸에 재빠르게 자신의 몸을 포갰다. 그가 리젠이 입은 망토를 위로 젖히고, 스웨터 속의 속옷을 풀렸다. 리젠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이 자세는.”

“……왜?”

“등이…… 등이 보이잖아.”

리젠은 몸을 웅크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등의 흉터가 꽤나 깊게 남은 것은 그녀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카이든에게 보이기에는 꽤나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해서 몸을 섞을 때에는 그에게 등을 잘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었다. 다른 때에는 괜찮아도, 왠지 서로 흥분해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흉터가 그의 눈에 너무 흉측하게 보이지 않을까 해서였다. 스웨터를 내리려던 그녀가 순간 숨을 멈췄다.

“무슨 소리야.”

이제는 아프지 않았지만, 그래도 등의 흉터를 따라 카이든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척추를 따라 내려오는 그의 입술이 부드러우면서도 자극적이었다.

“다 나 때문인데.”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치마 속의 스타킹을 내렸다.

“그리고 넌 다 예뻐.”

리젠은 앞자리에 팔을 대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등 위로 단단한 그의 가슴이 느껴졌고, 왼손이 들어와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출발하자마자…… 진짜…….”

이를 악물며 리젠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의 오른팔이 그녀의 얼굴 바로 옆에서 의자를 짚고 있었는데, 잔근육이 살짝 선 것이 보여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니트를 걷어 올린 팔에 힘줄이 파랗게 보였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움직이는 작은 근육들을 보며 그녀는 그녀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촉 때문에 신음 소리를 삼켰다.

“아.”

아무리 분리된 공간이고 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혹시라도 마부에게 들킬까 봐, 그녀는 팔목에 입을 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 작은 소리에도 반응하듯이 카이든의 손길이 더 적극적이 되었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카이든이 속삭였다.

“너도 젖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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