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아…… 그래?”
“너는 마지막까지 약을 주면서도 다니엘 타령이지…… 마지막 꿈에서도 끝내 날 좋아한다는 말은 안 했지…… 그 와중에 내가 억지로 널 덮쳤던 꿈속의 일들이 떠올라 네 얼굴은 제대로 볼 수가 없지…… 내 모든 말들을 네가 비웃었나 싶어 생각은 많고…… 너는 다 실수라고 하고, 사실 나도 무서웠어.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네가, 다 실수니 내 감정도 거짓이니까 그냥 접으라고 말할까 봐. 그러면 정말로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그때 자리를 피한 거기도 해.”
“……그랬구나. 우리, 서로한테 똑같은 걸 무서워했나 봐. 나도 정확히 그런 말을 무서워했었는데.”
“그래도 네가 쓰러지는 걸 보니 몸이 먼저 움직였고…… 정직 처분 나자마자 바로 궁에 갔는데 다니엘이 들여보내 주지 않았어.”
“……전하가? 전하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널 두고는 피차 서로 양보하지 않기로 했어. 다니엘을 원망하지는 않아. 그저 왕 앞에 초라한 내가 짜증났을 뿐이지.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 그때 처음으로 비참하고 자존심이라는 게 상했어. 나와 다니엘이 가진 어마어마한 권력의 차이가.”
“흠.”
“루스에 발을 디딘 이상…… 너 절대 못 보내 줘. 그게 왕비 자리라고 해도.”
리젠은 자신에게 다정하게 웃던 다니엘을 생각하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랑 앞에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며칠 동안을 안 들여보내 주더라고. 이러다가 결국엔 궁에 침입하고 감옥 갈 것 같기에 부모님 묘지도 볼 겸 루스로 왔는데, 바로 후회했어.”
“왜?”
“내려온 그날부터 자꾸만 다니엘이 손끝 하나 안 다치고 멀쩡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거야. 꿈이고 뭐고 다 떠나서, 그냥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
리젠이 푸핫, 하고 웃었다.
“네가 진짜 다니엘을 안 좋아하면, 나한테 아직 기회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다가도 또 그런 생각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고…… 다 실수로 시작된 감정인데…… 네가 다니엘을 안 좋아한다고 해서 날 좋아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도 다시 갈까 백번 고민하다가, 조카 생일이 다가오는데도 형이 못 오고 있길래 조카 생일만 지나고 아메니티로 가려고 했지. 어차피 아메니티로 향하는 마차들도 다 승차 거부 중이고 해서.”
“정말?”
“생각이 너무 복잡해서…… 네 얼굴을 봐야 결론이 날 것 같았어.”
“…….”
“그냥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리젠이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근데 나 처음 봤을 땐 왜 그렇게 딱딱했는데?”
“사실은 너를 보면서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 네가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왔는데 붙잡고 매달리면 너무 추해 보일까, 이런 생각 중이었거든. 네가 그저 책임감 때문에 왔다고 하면, 내가 과연 널 보내 줄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나를 참느라.”
그가 작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입맞춤에 화답하듯 혀를 밀어 넣었다. 깊은 키스가 이어지고,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아마 네가 미안하다고 하고 떠나려고 했어도 절대 놓아주지 않았을 거야. 그 작은 무대에서 널 봤을 때 알았어. 도저히, 도저히 놓을 수 없다고…… 또다시, 나 좀 좋아해 보라고 졸랐겠지. 그런데…….”
그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를 꽉 안고 코를 맞대며 웃었다.
“네가 이렇게 와 줘서 나 사실 너무 행복해.”
“그래?”
“네 마음을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받아서,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고 싶을 만큼.”
그의 말에 따르면 아마 그녀가 가만히 아메니티에 기다리고 있었어도 그는 왔을 테지만, 그 말에 리젠은 그동안의 고생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존재만으로도 사랑하는 남자에게 이런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기쁨이 잔잔하게 마음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아, 왜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 되지.”
“야.”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또 커진 그의 남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거 또 왜 이러는 거야?”
“……너랑 또 하고 싶어서.”
그가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리젠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짝 밀어냈지만, 그의 탁한 눈빛에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막상 꿈이 깨면 사실 기분이 나빴어. 내가 욕정에 미쳐서 널 함부로 생각하는 것 같고, 눈앞의 널 보면 죄책감도 들고.”
그녀가 살짝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최종 재판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그 차가움을 만회하듯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근데 지금은 하나가 된 것 같아서 마냥 좋아. 이 세상에 너와 나밖에 모르는, 너와 나밖에 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설레는지 몰라. 그래서 사실, 꿈속의 기분이랑은…… 비교가 안 되더라고.”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와 있었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창가에 붙어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은 처음 보았다. 다리가 푹푹 빠질 정도로 하얗게 변한 세상에 그녀가 신나서 발을 침대 위에서 동동 굴렀다.
“카이든!”
부스스하게 일어나 리젠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눈을 제대로 뜨지도 않고 미소를 지었다.
“나가자! 눈이 엄청 많이 왔어!”
“루스에서는 흔하다니까.”
“나 썰매 탈래!”
“안 돼.”
그가 눈을 비비고 모로 누워, 리젠을 바라보고 씩 웃었다.
“치료도 안 받고, 등에 흉터도 더 짙어졌는데. 내 말 하나도 안 들었잖아.”
“너 그렇게 살지 마.”
리젠이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영지 좀 있다고 그렇게 갑질하는 거 아니야.”
“내가 타기 싫어서 그래.”
카이든이 창가에 붙어 선 리젠의 몸을 쓰러트리며 나른하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서.”
간밤에 몇 번이나 그녀를 안아서 결국 늦잠까지 잤으면서, 아직도 부족한지 그의 페니스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리젠은 그를 곱게 흘겨보다가, 그에게 안겨 살짝 입 맞췄다.
“가자.”
그녀가 혀로 입술을 간질이며 속삭이자, 카이든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볼을 감싸 쥐었다.
“타 보고 싶어.”
그가 그녀의 코에 자신의 코를 부딪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진짜 이러면 안 돼.”
“응?”
“넌 원래 뭘 조르는 애가 아니잖아.”
“……그러게.”
“그래서…… 네가 조르면 나는 무조건 들어주게 되어 있잖아.”
리젠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옷을 여며 주며, 그가 힘겹게 일어났다. 잔뜩 들뜬 리젠의 얼굴을 바라보며 카이든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재미있으면 결혼하자. 매년 겨울마다 데려와 줄 테니까.”
“웃겨.”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제는 결혼 같은 건 연애 후에 하는 거라며?”
“좀 참아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그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감고 속삭였다.
“매일 밤 같이 있고 싶어서.”
천천히 방문을 열고 나가자, 아이 둘이 뛰어다니다가 눈이 동그래져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
남자 꼬마 아이가 깔깔거리며 다가왔다.
“바보 삼촌, 잘 잤어?”
카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리젠이 여자아이의 볼을 감싸고 얼러 줄 동안,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루스에서 결혼은 안 돼. 아메니티에서 하자.”
“왜?”
“주민들이 식장에 모여서 다 저 소리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리젠은 낄낄대며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 날이 추웠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카이든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리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와 줘서.”
짧지만 많은 말을 함축하고 있었다. 리젠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손에 깍지를 꼈다.
“내가 안 오면, 네가 와 줬을 거잖아. 그렇지?”
“그건 확신할 수 있지.”
아이들이 그 나이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복도 끝까지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깍지 낀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뭘 또?”
“나한테 그런 약 먹여서.”
“……실수였는데.”
“그래서 너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감정을 느꼈어.”
다시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사랑해.”
그녀가 살짝 눈을 깜빡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구해 줘서 고마워. 남은 생은 다 널 위해 쓰게 해 줘.”
싱긋 웃는 그의 미소가 너무 멋있어서, 리젠은 새삼 가슴이 뛰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그의 단단한 근육들이 생각나 볼이 붉어졌다. 이렇게 멋있는 남자가, 그렇게 차가웠던 그 동기가, 자신을 보고 이렇게 따뜻하게 웃어 주고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네게 달려갈 테니까.”
“카이든.”
리젠이 살짝 웃었다.
“어떻게 너만 계속 올 수 있겠어?”
그녀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네가 좀 지칠 땐, 내가 갈게. 루스까지 온 것처럼.”
그의 눈이 감동으로 일렁거렸다. 뭐라고 대꾸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감격한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리젠이 키득거리며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도 너를 사랑하니까.”
그녀를 안고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크게 원을 도는 카이든의 눈을 바라보며 리젠이 농담처럼 속삭였다.
“그러니까 썰매 잘 가르쳐 봐. 재미있으면 결혼 생각도 좀 해 볼게.”
* * *
다니엘은 쓸쓸한 눈빛으로 짐을 다 꾸린 루벤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벤은 왕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출한 짐을 꾸리고 그 어떤 배웅도 거부했지만, 다니엘은 억지로 그를 보러 온 것이다.
“왕이 좋긴 좋네?”
그가 반쯤은 빈정대며 신발 끈을 묶었다.
“내가 분명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왕은 그 ‘아무도’에 해당되지 않으신가 보군.”
“……정말 갈 거야?”
“어.”
루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궁을 한 번 돌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다니엘 앞에 섰다. 다니엘은 그와 똑같은 푸른 눈의 형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자신도 왜 여기에 온지 모르겠으나, 대답을 찾는다면 연민이 가장 컸다. 테스티는 며칠 전 교수형을 당했고, 아셰의 재판은 윌리엄의 유골으로부터 정확한 성분 분석을 할 수 있는 5년 뒤로 미뤄졌다.
나람을 살해한 루벤의 처분을 두고 왕가에서 재판이 이루어졌다. 왕가 내에서의 살인 사건은 왕가에서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미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루벤에게 쉽사리 처분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꾸만 늘어지는 재판에 먼저 그의 처분을 말한 것은 루벤 자신이었다. 어차피 살아 있을 의미가 없으니 죽이라는 그의 말에 모두가 반대한 것은, 최종 재판 때 그가 보인 광기에 진정성을 모두 느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