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날이 추워 리젠은 한 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카이든이 그녀를 더 꼭 안으며 걱정된다는 듯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형수님 반응 봤지? 아마 지금 완전 신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애초에 시장에 혼자 갔어야 했는데. 조카 생일 선물을 사야 하는데, 나는 대체 걔가 뭘 갖고 있는지도 잘 몰라서 같이 나왔었거든.”
“아…… 미안.”
리젠은 자신의 오해로 너무 일을 크게 키운 것 같아 한숨을 쉬었다. 카이든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더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한 건 나야.”
“네가 왜?”
“곧 알게 될 거야.”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는 석양이 지는 하늘에 하얗게 부서지는 입김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이든, 카이든이 이렇게 다정한 표정으로 옆에 있어 준다면 다 괜찮았다.
“아메니티에서 서쪽 오가는 길이 완전 꽉 막혀 있을 텐데 어떻게 왔어?”
“마차 구하기 쉽지 않았어. 어렵게 루스까지 동행을 구해서 합석해서 왔지.”
“사흘 동안?”
“너, 진짜 내 사랑을 의심하지 마라. 그 화려한 궁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마차에서 거친 빵이나 뜯어 먹으며 왔다고.”
그가 리젠을 더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리젠이 볼을 부풀리며 덧붙였다.
“금화 두 개나 들었어. 심지어 동행하신 분은 요금을 한사코 거절하셨는데 말이야.”
“금화 두 개?”
카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평소 금액의 다섯 배는 되는 돈이었다. 그것도 합석인데,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오자마자 격투 뛰어서 두 배로 벌었다고.”
리젠이 깔깔거리며 웃어서, 카이든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루스는 참 인심 좋은 동네야. 마음에 들어.”
가벼운 대화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보이던 대저택이 눈앞에 있었다.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여 마치 하나의 성 같았다. 대문 앞에서 그가 훌쩍 뛰어 내리고 그녀의 허리를 받아 내려 주자, 어느 순간 하인이 다가와 그의 말을 데리고 사라졌다.
“와…….”
리젠은 눈을 굴리며 씁쓸하게 말했다.
“너 대단한 집 아들이구나.”
“그래 봤자 아메니티에서는 산하기관 직원이야.”
그가 리젠의 손을 잡으며 씩 웃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을 덧붙였다.
“너한테 수석 뺏길 뻔한.”
정원을 거쳐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꼬마 하나가 바람같이 달려와 카이든에게 안겼다. 은빛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귀여운 남자아이였다. 카이든이 번쩍 안아 주자, 꼬마가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삼촌! 아메니티에서 별명이 바보라며?”
카이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고, 리젠 역시 잠시 당황했다가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공부 잘한다더니, 거짓말.”
리젠은 어깨를 으쓱하고, 씩 웃었다. 카이든이 충격 받은 얼굴로 꼬마를 다시 뜰에 내려놓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카이든을 보며 리젠이 말했다.
“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꼬마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리젠을 향했다. 그리고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보고 놀란 눈을 하고 다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쟤가 알면 루스 전체가 안다는 얘기인데…….”
카이든이 한숨을 쉬며 패닉에 빠져 있는 동안, 저택의 문이 번쩍 열리고 아까 보았던 은발의 여자가 아까의 꼬마보다 작은 여자아이를 안고서 오도도도 뛰어 왔다.
“어서 와요! 배고프죠? 저녁을 힘주어서 준비해 두었어요!”
“안녕하세요. 리젠 하카트라고 합니다. 카이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예요.”
리젠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리나 루스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마리나가 어수선하게 뛰어다니는 남자 꼬마를 억지로 저택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 도련님, 그이도 아까 도착해서 와 계세요. 도착은 어제 했는데, 새뮤얼 조문까지 갔다 오느라 좀 늦었대요.”
“형 왔어요?”
“네. 도련님이 여자 데려온다고 하니 여독도 없는지 하나도 안 피곤한 채로 기다리고 있어요.”
별로 달갑지 않은지, 카이든이 한숨을 푹 쉬었다. 리젠은 약간 어리둥절해서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실내가 다소 그녀를 주눅 들게 했지만,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본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 제롬 씨?”
초조하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서 있던 제롬 역시 깜짝 놀랐다.
“리젠 양?”
안고 있던 여자아이를 어르던 마리나 역시 놀라서 제롬을 바라보았다.
“어? 아는 사이예요?”
“아…… 아까 마차에서 합석했다던 그 아가씨가…….”
제롬은 자신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렸고, 마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이미 속세에 물든 아메니티의 깍쟁이지만 사랑 찾아서 루스까지 달려왔다는 나름 순수한 그 약제국 아가씨? 어머, 어머, 선물 너무 고마워요. 안 그래도 너무 써 보고 싶었는데. 똑똑한 동서 두니까 이런 행운도 제게 생기네요! 도련님, 너무 잘했어요.”
리젠은 어설프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희 가족이 되시려고, 인연이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제롬이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새삼 악수를 청했다. 동서라니, 가족이라니, 리젠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얼떨떨했다. 카이든이 뒤에서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카이든이 씩씩거리며 난감하다는 듯이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리젠은 조심스럽게 그의 침대에 앉아, 아무런 살림이 없어 기시감마저 드는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열일곱 살에 루스를 떠나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해해. 루스 지역 문화는 좀 이래. 이게 실례라는 것도 몰라.”
아까 식사 시간에, 제롬과 마리나는 거의 리젠을 당연히 카이든과 약혼한 여자 정도로 대했다. 아이들에게는 ‘숙모라고 불러’라고 이르기까지 했다. 카이든이 꼭대기의 손님방을 리젠에게 주라고 주장했지만, 마리나는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손님방은 아직 청소가 안 되었고, 난방을 손질 중이니 내일부터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묵고 있던 여관에서 하인을 시켜 그녀의 짐을 찾아와서 내일 싹 정리해 놓겠다는 말에 리젠은 신세를 지는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도련님 방 넓잖아요? 살림도 없는 데다가 침대도 엄청 크고.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하룻밤만 같이 지내요.’
마리나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리젠은 얹혀 있게 된 주제에 뭐라고 가타부타 말할 수가 없었다. 카이든이 짜증을 내자 제롬이 다 들리게 속삭였다.
‘저 정도 여자 만나기 힘들다. 뭘 노리고, 그럴 만한 여자는 아니야. 나도 들은 게 있으니 네게 진심이라는 건 내가 보증할게. 얼른 못 이기는 척 붙잡아.’
‘아, 진짜 왜 이래? 앞서 나가지 좀 마. 부담 주지 말라고.’
‘네가 저 여자를 볼 때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럼 형으로서 가만있냐?’
저녁 식사는 훌륭했지만, 정신없기도 했다. 카이든이 왜 자신보고 미리 미안하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다. 카이든이 뭐라고 항의하려고만 하면 마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럼 결혼 안 할 거예요?’라고 하는 통에 이길 수가 없었다.
“뭐, 괜찮아.”
리젠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같은 방에서 자는 게 처음도 아니고.”
“그래도…… 불쾌할 수도 있잖아.”
카이든은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고,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데 형이랑 형수는, 저게 정말 너를 환영하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기는, 그냥 서로 마음에 들면 바로 결혼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서. 형이랑 형수도 몇 번 안 만나고 결혼했거든. 아메니티랑 좀 달라.”
“아메니티는 어떤데?”
리젠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아메니티에서만 살아왔어도, 아직 결혼에는 관심이 없어서 잘 몰라. 아메니티는 어떤데? 진짜로.”
“음…….”
리젠의 휘어진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이든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속삭였다.
“아메니티 축제 구경도 같이 하고, 서로 직장에도 몰래 놀러 가고…….”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춘 그가 쿡쿡 웃었다.
“여행도 다니고, 이런 짓도 좀 하면서 연애하다가…… 기회 봐서…….”
“기회 봐서?”
“조르는 거?”
진지한 그의 표정에 리젠이 자신도 모르게 푸하하하 웃었다.
“너 비웃어?”
“어! 비웃어!”
리젠이 잽싸게 몸을 굴려 카이든의 품에서 빠져 나갔다. 넓은 침대 구석까지 굴러서 자세를 잡은 그녀가 주먹을 쥐고 명랑하게 외쳤다.
“카이든 루스, 격투를 신청한다!”
장난을 치는 듯이, 그녀가 비장함을 과장하여 연극처럼 말하자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뭐?”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가 모로 누워서 피식 웃었다.
“내가 널 어떻게 때려?”
“얼른! 수사국 지원 못 하는 바람에 난 계속 너랑 대련 못 했단 말이야.”
“내가 그냥 진 걸로 해.”
“싫어. 내 대학 시절 내내 목표였는데.”
“난 너 못 때려.”
“나도 마법 안 쓸게. 넌 그럼 피하고 막기만 해.”
“그게 뭐냐?”
카이든이 전혀 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 아까, 격투 좀 하고 몸이 근질근질하단 말이야. 너무 오랜만에 몸을 풀어서. 원래 대학 때도 체술 엄청 좋아했는데. 상대 좀 돼 줘.”
리젠이 볼을 부풀리며 사정하자 정말로 열의 없는 표정으로, 카이든이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그는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리젠의 주먹이 다가오자 어렵지 않게 몸을 움직여 피하고 설렁설렁 침대 위를 뛰었다. 그 성의 없는 태도에 살짝 화가 난 리젠이 몸을 돌려 발을 차자, 그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뒤로 돌아가 허리를 안고 털썩 누워 버렸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녀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감고, 양팔을 감싸 안아 한 바퀴 굴러 엎드려 버린 그가 씩씩거리는 리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리 네가 대학 시절 대단했더라도, 난 수사국의 훈련까지 받은 직원이야. 덤빌 사람한테 덤벼.”
“아악! 분해! 힘 한번 못 써 보고 지다니!”
그녀가 몸을 들썩였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품에서 꿈틀거리는 그녀를 더 꽉 안으며 그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췄다.
“이런 게 강한 게 아니야. 분하게 생각하지 마.”
“뭐?”
“진짜 강한 건…… 그날, 이브나석의 너야.”
그의 낮은 목소리에 리젠이 몸부림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