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256)

84화.

시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리젠에게 쏠렸다. 은발 머리 여자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카이든이 저 멀리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같이 둘의 눈이 마주쳤다. 씩씩거리던 리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든이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빠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 순간 눈물이 고였다. 그가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그가 날아오듯 무대 위로 도약했는지, 어느새 리젠에게 금화를 건넨 사회자가 카이든을 보고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카이든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전혀 수습이 안 되고 있는 리젠의 멍한 눈을 바라보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너…….”

그가 리젠의 귀에 대고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 세상에 둘밖에 없는 듯했다. 폭 안긴 그의 품이 여전히 따뜻해서 그녀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너, 왜 여기에…… 몸은, 몸은 괜찮은 거 맞아?”

대답하려던 리젠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무대 밑에서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카이든 역시 당황하여, 그녀의 손목을 잡고 급히 무대에서 내려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려 있었다. 어느새 카이든과 함께 있던 은발 머리 여자가 헉헉거리며 다가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머, 도련님…… 아메니티에서 그런 별명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아, 형수님, 그게…….”

형수님? 가뜩이나 당황해 있던 리젠은 정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카이든에게는 형이 한 명 있고, 그가 영지를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다. 은발 머리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심인 것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결혼식은 루스에서 하실 건가요? 아니면 아메니티?”

카이든이 이마에 손을 짚고 중얼거렸다.

“거 봐…….”

리젠은 모든 것에 현실감이 없어서, 그저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남의 영지에 함부로 오는 거 아니랬잖아.”

카이든의 형수는 끝없이 질문을 쏟아 내는데다가 절대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이든은 저녁때 다시 저택에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제야 카이든의 형수는 손님맞이 준비를 해야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급히 사라졌다.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흘깃거렸고, 그는 온갖 사람들의 시선을 다 피해 시장 구석에 있던 마구간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어머…… 나, 말 처음 타 봐.”

“일단 여기를 좀 벗어나자.”

흰 말에 리젠을 태우고, 그가 고삐를 잡았다. 그녀는 처음엔 중심을 잡기 힘들었으나 카이든이 뒤에서 잘 잡아 줘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체온을 등 뒤로 느끼고 있자니 모든 일이 다 꿈결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치른 것 같았던 최종 재판도, 해독제를 단숨에 마셔 버리고 이브나석에서 내려가 버렸던 카이든의 차가운 뒷모습도 현실감이 없었다. 말을 달리다 보니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무리도 다 지나고, 드넓게 펼쳐진 평지에 작은 언덕 위 별장이 보였다.

마구간에 흰 말을 다시 매어 두고, 그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별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젠은 쭈뼛거리며 따라 들어가, 그때의 겨울 산에 있던 산장보다 훨씬 더 넓은 별장 안에 벌 서는 것처럼 서서 카이든이 장작을 가져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도와줄까?”

리젠은 쪼르르 달려가 마법으로 손바닥에 불을 피운 뒤 장작에 옮겨 붙였다. 카이든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젠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그가 침대에 앉자 강아지처럼 따라붙어 의자를 끌고 마주 앉았다.

“여기는 왜 왔어?”

카이든이 무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던 조금 전과는 또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리젠이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너 보러. 너 보고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그의 표정이 풀리지 않는 것을 보고, 리젠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하겠다고 왔지만, 끝내 그가 악몽 속에서처럼 차갑게 돌아서면 어떡하지?

“사실은 모든 일이 끝나면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어. 일회성으로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시약 제조법을 고모의 노트에서 보고…… 다니엘의 꿈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실수로 네가 마셨고…… 일회성도 아니라서,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약제국에 들어갔던 거야.”

“…….”

그가 붉어진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꿈 얘기가 나오자 화가 난 건지, 민망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리젠은 눈치를 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진짜 미안해. 그래도…… 1년 안에 해독제를 완성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네 몸에 별 이상은 없을 거고…… 숨겨서 미안해. 근데 숨길 수밖에…… 없어서…….”

“……그랬겠지.”

“근데 정말, 최종 재판이 끝나면 말하려고 했어. 정말이야. 그리고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녀의 눈을 피해 착잡한 표정으로 침대 끝을 바라보고 있는 카이든에게 리젠이 잠시 망설이다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좋아해, 카이든.”

그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렇게 멍하니 놀란 그의 표정을 처음 보았다.

“정말로 너를 좋아해.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다니엘 전하는…… 십 대 때 마음에 품었던 동경 같은 건가 봐. 너를 좋아하고 나서부터 알았어.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는 거.”

한번 이어진 말은 부끄러움 없이 계속되었다.

“화려한 무도회에서 좋은 옷 입고 춤을 추는 것보다, 너와 함께 걷던 이름 모를 산길이 내게는 훨씬 더 소중한 추억이야. 비밀이 있어서 차마 말하지 못했어. 너무 무서웠어. 네가…… 차갑게 돌아설까 봐. 아직도 두려운데, 그래도 네가 돌아선다면 한 번은 붙잡고 싶어서 왔어.”

“아…….”

리젠은 카이든이 이렇게 멍청한 눈빛을 할 수 있는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말을 더듬었다.

“내가…… 내가 가려고 했는데…… 몸은 정말로 다…… 회복된 건지…… 길이 많이 막혔을 텐데…….”

“당연한 거 아니야? 사흘 걸렸어. 그래도, 그래도 잡고 싶었어. 너는…… 최종 재판 때, 나한테 차갑게 돌아서서…… 엄청난 상처를 줬지만…… 그래도 너무 보고 싶어서.”

그녀가 그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생각 다 했어? 만일 생각 중이라면, 더 하지 마. 결론이 나지 않았다면 그냥 나한테 와 줘.”

“……어쩐지 네 꿈은 항상 계속 기억에 남아서 이상했어.”

카이든이 낮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기억나? 나는 네가 널 안아도 된다고 했을 때에도, 사실 멋있어 보이려고 꾹꾹 눌러 참았어. 네가 나를…… 욕망에 어쩔 줄 모르는 짐승 같은 남자로 기억하는 게 너무 싫었어. 그런데 사실 꿈에서, 싫다는 너를 억지로 가지려고 했었던 적이 있었지. 도저히 민망해서 네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더라. 사실은 그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이야. 네가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뭐 그런.”

리젠은 그의 손을 더 꽉 붙잡으며 웃었다.

“질투에 눈 뒤집히면 무슨 일을 못하니? 나는…… 네가 다른 여자랑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생판 모르는 남의 영지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아…….”

카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말문이 막힌 그를 바라보며 리젠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나는 대체 네가 왜 그렇게 나를 바보 같다고 하는지 몰랐는데…… 그 순간 바로 이해가 가더라. 거창한 다른 이유 없이, 그냥 미워서 그런 거 아니야?”

“…….”

“좋아하는 만큼, 그만큼 미워서. 보답 받지 못한 내 마음이 떠도는 것이 안타까워서. 정말로 미워서. 난 아까 네가 너무 밉던데.”

“……몰라.”

“그러니까 그런 걸로 망설이지 마. 나는 꿈속의 네가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 속의 너를 좋아하는 거니까.”

리젠이 미소를 지었다. 카이든은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리젠, 나는…… 그 꿈들이…….”

“나도 꿈 같은 거 꾸기 전엔 너한테 관심 없었어.”

새초롬한 대답에 살짝 놀란 카이든의 검은 눈이 다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단 일이 벌어졌잖아. ‘만일’이라는 건 소용없어. 이미 감정이 생겼는걸. 나는 이제 네 꿈을 꾸지 않아도 네가 좋아. 너는…… 어때?”

“……나는…….”

그가 천천히 일어나 두 손으로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의 등을 짚었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어차피 네 얼굴 한번 보면 정신 못 차릴 거…….”

리젠이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는 걸 애초에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다. 긴 키스가 이어졌다. 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첫 키스였다. 전혀 낯설지 않은 체온이 그녀를 폭 감싸고, 이 순간을 위해 모든 시간들을 힘겹게 달려온 것만 같았다.

“나 여기 집 없어.”

그가 천천히 말을 몰며 중얼거렸다.

“그냥 형네 가족이랑 같이 지내. 어차피 곧 아메니티로 갈 거라. 사실은 조카 생일만 지나면 바로 가려고 했었어.”

“나 그냥 원래 머물던 여관 가도 되는데…….”

“안 돼. 루스가의 손님을 어떻게 그런 곳에 재워? 게다가 지금 거기 가면 너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일 거야. 그 난리를 치고 왔으니.”

“정직…… 어떡해? 나랑 나눠 징계 받지, 왜 바보같이 혼자서…….”

“됐어. 오랜만에 쉬니까 좋아.”

“그래도…….”

“병가 중인 너나, 정직 중인 나나 무슨 차이야? 마음 쓰지 마.”

“징계 전력 있으면 승진에 안 좋을 텐데.”

“수석이라 괜찮아.”

그가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로 말을 몰다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목을 깨물고 말했다.

“누가 수사국 지원 안 하는 바람에.”

“감사히 여겨.”

리젠이 키득거리며 뒤를 돌아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가 안타까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나 때문에…… 그거 책임지겠다고 약제국 간 거야? 그렇게 수사국 가고 싶어 했으면서…….”

“약제국 간 덕분에 모든 게 잘 해결됐잖아. 그럼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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