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루스의 가장 번화가, 겨울맞이 장이 크게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내린 리젠은 제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사례를 굳이 사양하시니…….”
그녀가 약병을 하나 건넸다.
“원래 제가 먹으려고 가져왔는데,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내분께 선물하시면 좋아하실 거예요. 아메니티 귀족들에게서 불티나게 팔리는 거거든요.”
“이거…… 상당히 비싸던데.”
제롬 역시 아메니티에 올라온 김에 아내 선물을 고르고 있다가, 추천 받은 물품 중 하나였다. 피부가 하루 동안 뽀얘진다는 미용 시약이었는데 비싸기도 하고 또 미리 예약을 해야 받을 수 있다고 하여 포기한 참이었다.
“약제국에서 직접 가져온 거라 저는 어차피 돈 주고 안 샀어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리젠이 생긋 웃었다.
“그럼 아가씨는…….”
“더 엉망인 꼴도 봤던 사람이에요. 피부 좀 덜 뽀얗다고 될 일이 안 되지는 않겠죠. 저는 아메니티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받아 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아요.”
루스까지는 꼬박 3일이 걸렸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면서도 리젠은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양 밝게 웃어 보였다. 제롬은 감사 인사를 표하고, 밝고 명랑하지만 이상하게 속을 알 수 없는 아메니티의 아가씨와 담백하게 헤어졌다.
제롬과 헤어지고, 그녀는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씻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뒤 침대에 누워 여독을 풀었다. 하루 푹 쉬고 나니 드디어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사람의 꼴을 좀 갖춘 뒤, 한창 여관이 바쁜 시간을 피해 여관 안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예, 말씀하십시오.”
“카이든 루스라고, 음, 그런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예? 혹시…… 루스 도련님? 지금 영주님 동생분 말씀하신 거예요?”
“네. 음…… 아메니티의 대학 동기인데,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 절차가 어떻게 되죠?”
여관 안주인은 리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에게 부탁할 정도면 절대 귀족 집안 영애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초대장 있어요?”
“네?”
“저택에 계실 텐데, 거긴 초대장 없으면 못 들어가요. 정식으로 도련님이 초대한 사람이라면 초대장이 있을 것 아뇨?”
리젠은 상당히 당황했다. 그녀는 아메니티의 평민으로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귀족의 집이나 영주의 성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에 갈 때도 무슨 초대장을 산하기관에서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여관 안주인이 혀를 찼다.
“아가씨, 아가씨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요? 카이든 도련님이 아무리 나이가 차고 정혼자가 없어도 그렇지, 그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대면 될 일도 안 돼요.”
“어…….”
수도인 아메니티에서 그녀는 평민 출신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왕립고등학교를 나온 엘리트로서 별다른 귀족과의 차별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카이든의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생각해 보니 아메니티에서 다니엘을 보고 싶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기서 카이든은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듯했다.
“카이든 도련님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혼기 찬 처자들한테 생각보다 빨리 퍼진 모양인데, 여튼 우리 여관에서는 못 도와줘요.”
“아니, 정식으로 신청하는 절차도 없나요? 그럼 평민은 카이든의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카이든 도련님은 곧 떠날 사람이라 별달리 손님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던데…… 차라리 그냥 이 시장 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종종 꽤 나오시는 편인데, 우연히 한번 부딪혀 보시던지.”
여관 여주인이 이죽거렸다. 리젠은 한숨을 푹 쉬었다. 보아하니 자신을 카이든에게 집적대는 혼기 찬 여자 취급을 하는 것 같았는데, 또 따져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할 수 없었다.
“어? 저기 저 사람 같기도 하고.”
리젠이 속상해하며 한숨을 쉬고 돌아서는데, 여주인의 눈이 둥그레지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후다닥 달려 나갔다. 저 모퉁이 너머로 검은 머리의 청년이 사라지고 있었다. 너무 흘깃 봐서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리젠은 간절하게 헉헉거리며 모퉁이를 돌았다. 모퉁이를 돌자 시장 한바닥이었고, 바글바글한 사람들 탓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높은 곳…… 어디 높은 곳 없을까?’
그녀가 절박하게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만나고 말겠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며 루스까지 오고, 영지 도련님을 노리는 스토커 취급까지 받았는데 오기가 생겨서라도 그냥 갈 수 없었다.
“자, 다음 도전자 없으십니까? 상금은 이제 금화 두 개!”
시끌시끌한 가운데, 마력으로 증폭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시장 가운데에 크게 마련된 무대 위에서 사회자가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열을 세겠습니다! 도전자가 없으시면, 가릴 티타스가 오늘의 우승자 입니다!”
그녀가 홀린 듯 무대로 다가섰다. 과연 저 위에 올라가면 이 복잡한 길이 모두 한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예요?”
입을 벌리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 중 한 명에게 리젠이 물었다.
“여자 격투요.”
그때, 붉은 머리 여자가 무대로 가뿐히 뛰어 올라갔다.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격투라면, 대학 다닐 때 이후 처음이다. 약제국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토록 즐겁게 했던 대련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아! 한 여성분이 올라왔습니다! 아, 하야틴에서 온 세타닐 프람이라고 하는군요!”
리젠이 팔짱을 끼고 관찰해 보니, 그다지 수준이 높은 대련 같지는 않았다. 하긴, 시장에서 구경거리 수준으로 벌어지는 격투의 수준이 높을 리가 없었다. 딱히 출전에 관련한 절차도 없고,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신청하면 되는 것 같았다. 리젠의 눈에 어린애 장난 같은 대련이 끝나고, 세타닐을 이긴 가릴이 팔짝팔짝 뛰며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다음 도전자 없으십니까? 상금 금화 네 개!”
밑져야 본전이지. 리젠은 씩 웃고 손을 들었다. 사회자의 눈에 띈 그녀가 훌쩍 뛰어 무대로 올라섰다. 과연 시장이 한눈에 다 보였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이든을 찾으려고 하는데, 사회자가 급히 말했다.
“뭐라고 소개하면 되지요?”
“아메니티에서 온…….”
리젠은 무심코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다가, ‘하카트’라는 성을 말하기 무서워서 숨을 들이켰다. 사실은 르엘라 하카트의 마력 증폭약 때문에 이 화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일반인들에게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다니엘의 충고가 있었다. 특히나 서쪽 지역이라면 더 주의해야 했다. 그래서 마차에서 제롬에게도 실명을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
“유진 유니트예요.”
왜 그런 이름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학교 동기이자 행정국에 근무하는 직원의 이름을 댔다. 최종 재판 때 입구에서 만난 그녀가 아마 마지막으로 마주친 일반인이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사회자가 마력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돌을 입에 대고 소리쳤다.
“아메니티의 유진 유니트입니다! 자, 격투 시작!”
과연 아무런 절차도 체계도 없었다. 리젠은 아무리 자신이 부상 중이라고 해도 이 정도 여자아이는 쉽게 이길 수 있음을 예감했다. 이래봬도 인재란 인재는 다 모여 있다는 왕립종합대학에서 여자들 중 격투기 랭킹 1위였던 것이다. 괜히 수사국 전무후무의 인재로 평가받는 카이든과 수석을 다툰 여자가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괴한들을 마주했을 때에도 쉽게 당하지는 않았던 가닥이 있었기에, 그녀는 달려드는 상대를 쉽게 피하고 발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정확히 가격했다.
“커헉!”
숨이 막힌 채로 다시 그녀에게 내지르는 주먹을 가볍게 막고, 리젠은 쉽게 팔꿈치로 상대의 목을 조였다. 너무 쉽게 상대를 제압한 그녀에게 함성이 쏟아졌다. 격투를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나서 그녀가 또다시 간절하게 시장 전반을 훑었다.
“대, 대단합니다! 유진 유니트!”
사회자가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다, 다음 도전자 없을까요? 상금은 이제 금화 여덟 개!”
가릴이 엉금엉금 기어 퇴장하고, 생각보다 리젠이 압도적으로 이겼기 때문에 도전자들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리젠은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선 노점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시야에 편한 복장을 한 검은 머리의 청년이 눈에 띄었다.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열을 세겠습니다! 하나, 둘…….”
멀리서도 눈에 띄는 단단한 체격을 가진 그 남자는 아이 장난감을 살펴보면서 이런 무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메니티에서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카이든을 발견한 그녀의 시간만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고, 또 이렇게 멀리 있는데도 그녀는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섯, 일곱…… 아, 도전자 안 계십니까!”
그때였다. 카이든의 옆에 어떤 은발 머리의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딱 봐도 편해 보이지만 좋은 옷을 입고 예쁜 머리 장식을 한 귀족 영애였다. 카이든이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리젠은 여자와 저렇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카이든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열! 아…… 그럼 이대로 금화 네 개가…….”
리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개고생을 하며 아메니티에서 루스까지 삼 일에 걸쳐 왔고, 여관 안주인에게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하고, 별것 아닌 무대에서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네 말에 얼마나 마음 졸여 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너는 생각해야 한다며 고작 한다는 일이, 지역에 있는 영애랑 시시덕거리는 거였니?
“그럼, 유진 유니트 양, 금화 받으시고…….”
리젠은 순간 그동안의 여정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에 분노가 치솟았다. 아마 카이든과 다른 여자가 저렇게 다정하게 있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해서였던 것 같았다. 저렇게 부드러운 눈으로 웃어 주는 것은 당연히 나한테만 해 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세상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해 여기까지 왔는데…… 반갑고 좋은 만큼 화가 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회자의 마력이 담긴 돌을 빼앗았다.
“야!”
리젠의 앙칼진 목소리가 시장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분노를 담아 소리 질렀다.
“카이든 루스, 이 바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