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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256)

82화.

“두 배가 아니라 이십 배라고 해도 못 가. 갔다가 돌아오는 것만 해도 일이라고.”

그러나 그의 눈이 리젠의 금화에 못 박혀 있었다. 리젠은 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섰다.

“그럼 혹시…… 뭐, 다른 방도라도 있을까요?”

“음…….”

그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우리 같은 아메니티의 마차를 타지 말고, 애초에 서쪽에서 온 사람들 마차를 같이 타요. 서쪽에서 온 마차가 다시 손님을 태우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합석이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편이 나을 거요. 대충 서쪽으로 가는 아무 마차나 탄 다음, 그곳에서 루스 영지로 가는 것이 가장 가능성 있겠지.”

“그럼, 그런 서쪽에서 온 마차를 어떻게 구해요? 어디로 가면 돼요?”

“그건 다…… 인맥인데…… 마부들끼리는 뭐, 같은 식당에서 밥도 먹고 하니까, 내가 알아봐 줄 수는 있지.”

리젠은 재빠르게 금화 하나를 마부에게 건넸다.

“알아봐 주세요!”

“흠…….”

“알아봐 주시면, 그래서 제가 서쪽으로 가는 마차를 탈 수 있게 되면 금화 하나를 더 사례로 드릴게요. 제발 부탁합니다.”

마부는 그녀가 건넨 금화 하나를 받아 들고 씩 웃었다.

“어지간히 간절한가 보군. 내일 오전에 이 자리에서 만나요. 어떻게든 내가 합석 가능한 서쪽 가는 마차를 알아봐 올 테니까. 그 금화는 서쪽 가는 마부에게 주고.”

다음 날, 리젠이 약속된 장소에 나가 있을 때 과연 마차 한 대와 어제 그녀에게 금화를 받아 간 마부가 다른 마부와 함께 서 있었다. 흰 코트에 짐을 들고 선 리젠을 발견한 마부가 손을 들어 알은체했다.

“아가씨,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요. 내가 아주 기가 막힌 합석 상대를 구해 왔으니까.”

“네? 정말요?”

리젠이 환히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달려왔다.

“일단 한 명이라 마차가 좁지 않을 테고, 그리고 루스 지역으로 가는 사람이라고 하니 굳이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될 듯해요. 루스에 도착하면 거기서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라고.”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리젠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금화 하나를 마부에게 건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생긋 웃었다. 마부가 그 금화를 서쪽 가는 마차의 다른 마부에게 건네주며 킬킬거리며 말했다.

“애인이라도 있나 봐? 너무 좋아하는데요.”

“애인 구하러 가는 거거든요. 루스 남자가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활달하게 받아치는 리젠의 얼굴을 보며 파이프를 물고 있던 서쪽으로 가는 마차의 마부 역시 피식 웃었다.

“합석이라, 그런데 합석 대상에게도 요금을 내야 할 거요. 그건 손님하고 의논해 보시고.”

“네! 감사합니다!”

리젠은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 짐을 마부에게 맡긴 뒤 끙끙대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는 살짝 나이가 있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녀가 겨우겨우 마차에 올라타자 안경을 치켜 올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리젠이 머리를 뒤로 넘기고, 챙이 넓은 모자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으며 명랑하게 인사했다.

“합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막막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가 밝게 인사하자 청년이 그저 씩 웃으며 살짝 목례했다.

“요금을 내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면 되나요? 부르시는 대로 다 드릴게요! 아, 근데 참고로 저는 월급쟁이라 엄청난 돈은 없어요. 감안해 주세요.”

“아…… 괜찮아요.”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그래도요. 제가 있어 아무래도 불편하실 텐데.”

“루스 남자가 잘생겼다고 했으니 그 말로 됐어요. 요새 아메니티에는 그런 소문이 도나 봐요?”

“아…… 그건 아니고요.”

리젠은 민망함에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덜컹거리며 마차가 출발했다. 청년의 안경 속 검은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창밖을 힐끗 보고 말했다.

“하지만 루스에서 돌아오면 그런 소문 제가 확실히 내 드릴게요.”

“그럼 루스에는 왜 가시는 건가요? 아, 정확히 어디로 가시는지 알려 주시면 그곳에 내려 드릴게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아, 리젠이라고 부르세요.”

청년은 어렵지 않게 리젠이 말을 돌렸으며, 정식으로 자신이 소개하기 전에 이름만 간단히 말함으로써 신상도 굳이 밝히지 않으려는 것을 눈치챘다. 붙임성 있는 싹싹한 여자인 건 맞지만, 사실 세상사는 눈치가 빤한 것이 분명했다.

“네, 저는 제롬입니다.”

그들은 간단히 악수하고, 미소를 지은 채 각자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제롬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리젠은 턱을 괴고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실 리젠은 아메니티 밖을 빠져 나간 적이 얼마 없었다. 이렇게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 본 것은, 어린 시절 르엘라의 손을 잡고 차르티 수도원에 갔을 때와, 중학교 때 렌토 지역에 휴가를 간 것, 며칠 전 카이든과 북쪽 산에 갔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계속해서 변하는 바깥 풍경만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잠들었는지 눈을 떠 보니 바깥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마차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리젠이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는 것을 바라보다가 제롬이 말했다.

“길이 좀 막히네요. 사실 꼬박 하루면 도착하는데, 이러다가 사흘도 더 걸리겠군요.”

리젠은 밖을 다시 내다보고,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이 부스럭대며 바구니에서 빵을 꺼냈다.

“아까 마부가 주더군요. 식사하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리젠은 빵을 건네는 제롬의 왼손에 반지가 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미 결혼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었다. 별말 없이 빵을 먹던 리젠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말했다.

“역시, 서쪽으로 가는 길이 엄청 막힌다더니 사실이었어요.”

“그 화재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당연히 테스티에게 침이라도 한번 뱉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마차는 덜컹이다가 서고, 덜컹이다가 서는 것을 반복했다. 제롬은 천천히 빵을 다 먹고, 입맛이 없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억지로 빵을 입에 욱여넣고 있는 리젠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래서 왔는걸요.”

“아.”

리젠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테스티 왕비…… 보고 가시는 길이세요?”

“예.”

“어떻던가요?”

“꼴이 말이 아니더군요. 사실 퍼붓고 싶은 말들은 많았는데, 앞에서 다 듣고 나니 왠지 제가 할 말이 없어져 버리는 기분이더라고요. 그래서 조용히 노려보다 나왔습니다. 이미 충분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지옥인 것 같아서. 이미 반쯤은 미친 것 같기도 하더군요.”

“……그렇군요.”

“의외로 저 같은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저 가만히 노려보다가 돌아서는 사람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만으로도 어쨌든 뭔가 하나가 마무리되었다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시지는 않겠지만.”

“고생하셨어요.”

리젠이 진심으로 말했다. 빵을 다 먹고 나서, 챙겨 온 약을 먹고 그녀가 한숨을 폭 쉬었다.

“그 모든 시간들, 다.”

어느새 별이 내려앉은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리젠을 보며, 제롬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런데 어디에 내려 드리면 될까요? 루스가 생각보다 넓어서요.”

“……그런가요?”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지방은 다 하나의 동네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루스에 내려 달라는 말은, 마치 아메니티 아무 곳에나 내려 달라는 말과 똑같아요.”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생각해 보니, 그저 루스에 간다고 결심만 했고 정말 제롬의 말처럼 루스도 하나의 동네라고 생각했다. 꿈에서 봤던 양지바른 언덕과 평화롭게 양이 풀을 물어뜯는 모습만 떠올렸던 것이다. 그래도 영주 아들이었으니 루스에 가서 무작정 카이든 루스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메니티에 와서 다니엘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누굴 찾는데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그건 너무 민폐고요…….”

리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같이 마차를 얻어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민폐인데 더 이상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가장 번화한 곳에 내려 주세요. 거기 여관에 묵으면서 차차 알아보죠, 뭐. 아메니티보다는 덜 붐빌 테니까요.”

“지금 루스는 겨울맞이 장이 크게 열리는 기간이에요. 생각보다 사람 많을 텐데.”

“그럼 더 잘 됐네요.”

환하게 웃으며 리젠이 손을 마주쳤다.

“분명 그 사람도 장에 오지 않겠어요?”

“마차가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군요.”

리젠의 표정을 보며 제롬이 피식 웃었다. 리젠은 순간 그 웃는 모습이 카이든을 닮은 것 같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들도 곧 생일이라, 그에 맞춰서는 가고 싶은데.”

눈동자가 검은색이어서 그런가. 루스에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고 생각하며 리젠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지며 생각했다. 이런 마음으로 마차를 탈 줄 알았다면, 북쪽 산으로 가는 길에 그렇게 잠만 자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한 번이라도 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 감정은 너무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그리움이었다.

“리젠 양이 이렇게 그 사람에게 간절하게 가고 있는 걸, 그분이 알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요.”

리젠이 생긋 웃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은 미소였지만 제롬은 밖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쓸쓸함을 눈치챘다.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 혹시나 하면서도 혼자만의 희망을 놓을 수 없는 마음, 이런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제게 늘 오고 있었는데…….”

그의 검은 눈동자가 꼭 카이든을 보는 것 같아서,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는 그걸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요.”

마차가 느릿느릿, 하지만 확실하게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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