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256)

81화.

루벤은 대충 담요를 덮고 누워 있다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뭐야?”

그는 눈을 비비고 철창 앞에 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잠이 들면 나람과 르엘라, 테스티와 서쪽 영주들이 뒤섞인 악몽을 꿔 대는 바람에 그저 멍하니 누워 있는 중이었다.

“왜 왔어, 넌?”

“곧…… 일주일 뒤에, 왕가의 재판을 열려고.”

“그래?”

루벤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입김으로 후 불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람을 죽였다. 대륙을 여행하며 가끔 도적들을 만날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살인도 꽤 했지만 여자를 죽인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자신이 이 타지까지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테스티와 얽힐 일도 없었을 테고 한스팀에서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변명 한마디 들어줄 정도의 잔정 정도는 베풀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토록 쉽게 죽일 것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 순간에는 눈이 뒤집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마마마는?”

“…….”

“됐어. 말 안 해도 돼.”

어차피 여기까지 가끔 들리는 욕설과 오열들로 대충 상황이 짐작은 갔다. 루벤은 가타부타 별말 없이 턱 끝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알았어. 이제 가.”

“……이렇게 멀쩡할 거면서, 왜 왕은 되고 싶어 했어?”

“이게 멀쩡한 걸로 보이냐?”

“최소한…… 왕이 안 되어서 분한 것 같지는 않거든.”

다니엘이 철창을 사이에 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루벤은 킬킬거리며 웃었지만 눈에 초점이 없었다.

“왜? 쓰고 나니 왕관이 너무 무거운가?”

“그것도 그렇지만. 가끔 회의에서 열을 올리던 형 생각이 좀 나서. 내가 전혀 모르는 다른 나라들 얘기를 하면서.”

“……난 항상 먼 곳만 봤어.”

루벤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장 가까이 두었던 여자 하나 못 지키면서 무슨 왕이냐. 왕은커녕 제대로 된 사람 구실도 못했다.”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었다. 다니엘은 문득 어느 날 밤, 리젠의 행방을 묻기 위해 그의 궁에 갔었던 것이 기억났다. 사실은 루벤과 가진 유일한 추억이기도 했다.

‘뭐, 여기까지 온 네 마음은 이해를 해 주지. 사랑하는 여자를 무사히 볼 수만 있다면 칼을 품은 이복형제가 아니라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때 그의 마음을 이해해 준다는 그 말과, 진심이 스쳐 지나갔던 눈빛을 잊지 못했기 때문에 다니엘이 허탈한 발걸음을 여기로 옮겼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리젠이 떠나고 나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헤매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루벤은 그의 쓸쓸한 표정을 힐끗 보고 나서, 대충 말했다.

“태자가 아니면 무조건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규정은 좀 생각해 봐. 진짜 최악이야.”

“수많은 시간 동안 안건에 올라와도 기결되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회의에 상정해 볼게. 어쨌든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까.”

“어차피 그것도 기원 따져 보면 제국 눈치 보느라 그렇게 된 거야. 두고 봐. 제국은 저물고 있으니까.”

“……그래. 가끔 회의에서 형이 하던 말들이 옛날엔 뜬금없어 보였는데…… 막상 왕좌에 앉고 나니 생각이 많아지네.”

루벤은 별다른 말없이 벽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가지 않는 다니엘을 보며 루벤이 신경질을 냈다.

“뭐야, 여자한테 차이고 나서 왜 여기를 와?”

“어?”

“뻔하잖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놈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궁까지 기어들어 왔는데, 정작 꼬맹이는 너 안 좋아한다고 하던데?”

“…….”

다니엘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다가, 내뱉듯 중얼거렸다.

“내가 리젠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고.”

“뭐, 그래?”

“근데 모를 수밖에 없었어. 난 정말 바빴거든. 나는 궁에 늘 갇혀 있는 데다가, 그 애와 제대로 대화할 시간도 없었어.”

“…….”

“대담한 척하며 보내 줬지만 사실 받아들이기 힘들어.”

루벤은 혀를 몇 번 차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야.”

“어?”

“내가 왜 르엘라를 못 지켰는지 알아?”

다니엘은 잠자코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르엘라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꼿꼿하고 참 바른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루벤과 그런 관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게 얽히는 것이었다. 루벤이 허탈하게 말을 이었다.

“몰라서 그랬어.”

“…….”

“몰라서 그랬다고. 다 몰라서. 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봤거든.”

그가 방 한편에 쌓여 있는 노트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르엘라의 일기장이었다.

“리젠이 아까 이걸 전해 주고 가더군. 주인이 나일 것 같다고. 이 모든 내용을 내가 알았더라면 또 이야기는 달라졌겠지. 물론 말 안 한 르엘라의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무관심했던 거야. 무관심은 자랑도 아니고 핑계도 아니었는데. 너도…… 기본적으로 무관심했던 거 아니야?”

“나는…… 다만 너무 바쁘고…….”

“나도 바빴어.”

루벤이 뒤통수를 벽에 박았다.

“몰랐다는 것도 잘못이야. 너도 보고 싶은 것만 본 것 아니야? 예를 들어 그 꼬맹이가 웃는 모습이라든지, 유쾌하게 속세에 찌든 농담을 던질 때라든지.”

“…….”

“사실은 내 무관심이 그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도 모르지. 넌 왕이고, 이제 그 누구에게도 몰랐다는 핑계를 대면 안 돼. 나 같은 인간은 되지 마라.”

“형.”

다니엘은 루벤에게 처음으로 형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상기해 내며 진심으로 말했다.

“죽지 마.”

루벤을 보면 단 하나 생각나는 말이었다. 최종 재판 때, 카이든이 재빠르게 칼을 쳐 내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자리에서 자살했을 것이다. 지금도 여력만 되면 죽어 버리고 싶다는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는 그를 보며 다니엘이 한참을 머뭇거렸다.

“웃기네. 이제 꺼져. 피곤하니까.”

“죽고 싶다는 얼굴로 있지 말라고.”

“사실인데, 뭐.”

루벤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까 저걸 전해 주러 온 꼬맹이도 그런 소리를 하더군. 그러면서 가 있을 곳도 추천해 주더라고. 그건 좀 생각해 봐야지.”

마지막으로 루벤에게 르엘라의 일기장을 전해 주고, 아셰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떠나겠다는 말을 전하고, 리젠은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웠다. 빠른 회복을 위해 혼자서도 저녁도 많이 먹고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집이었다. 온 집에 카이든의 기억이 가득했다. 그가 저녁을 차려 주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던 것이 생각나 리젠은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간다니까 하는 말이야.’

아셰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재판에서 네가 쓰러졌을 때, 그 멀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먼저 달려온 건 카이든이었어. 오히려 이브나석에서 가까이 있었던 다니엘은 사태 진정에 바빠 카이든보다 좀 늦었지. 다니엘은 분명 널 정말 좋아하지만…… 글쎄, 너만을 볼 수는 없는 사람이기도 해.’

카이든의 이름이 들리자 리젠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두려웠지만, 그래도 그 역시 그녀를 쉽게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니엘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때의 카이든 표정을 생각하면…… 내가 학창 시절 카이든 루스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놀랐어. 그리고 사실은…… 아니다. 직접 가 봐.’

다니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리젠에게 그는 그토록 지치지 않고 다가와 주었다. 힘들고 못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이제는 그녀가 그에게 다가갈 차례였다. 아직도 전하지 못한 마음을 안고, 그녀는 내일 새벽 당장 루스로 향하기로 했다. 악몽에서처럼 카이든이 비꼬고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칠지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생각할 시간? 그런 시간 같은 건 주지 않을 것이다. 시간 앞에 무력한 건 인간의 공통적인 습성이다. 아셰가 범인인 것을 알고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녀를 마주 보고 속을 숨긴 대화도 할 수 있었다. 루벤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르엘라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아서 더 슬프다고 했다. 시간이 사랑의 가장 큰 적이라면, 그들이 나누었던 그 감정이 어쩔 수 없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녀는 지금 당장 그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세상을 더 뒤져도 아마 그녀 같은 사람은 없겠지. 유일할 것 같은 사랑을 발견한 것 같으면 당장 곁에 두어야 해.’

아메탄의 왕도 그를 대신할 수는 없다. 카이든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유일한 감정이 분명 존재한다. 르엘라가 살아 있었다면, 사실 루벤과 똑같은 말을 했을 것 같았다.

‘그런 남자가 나타나면, 절대 놓치지 말고.’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또 뒤를 돌아 떠나가려고 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말 거야. 무섭고 두려워도 내 감정에 떳떳하게 앞만 보고, 그대에게 간다. 그녀는 여러 번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10. 그대에게

“루스요? 거기 서쪽 아닙니까?”

마부가 아주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지금 이동한다는 건 미친 짓이에요. 빌어먹을 테스티 왕비 낯짝이나 보겠다고 서쪽 사람들이 다 올라오고 또다시 내려가는 판에 모든 길이 다 꽉 막혔어요. 급한 일 아니면 한 달 정도 뒤에 가시는 건 어때요?”

“급한데요…….”

리젠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숨을 쉬었지만, 마부는 절대 루스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짜, 꼭 루스로 빨리 가야만 해서…… 그래요.”

“어차피 지금 가 봤자 빨리 못 간다니까.”

마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젠의 간절한 표정을 억지로 모른 척하며 뒤를 돌아서는 마부를 바라보며 리젠이 한숨을 푹 쉬었다. 카이든에게 바로 달려가겠다고 결심한 것이 어제저녁이고 아주 호기롭게 궁까지 나왔는데, 마차 잡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니엘에게 부탁할 정도로 염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그녀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차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 두어 번만 더 거절당하면 백 번을 채울 것 같았다.

“루스? 안 가요.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지금 발 디딜 곳이 못 돼.”

다음 마부도 손을 내저었다.

“저는 꼭…… 루스에 가야 하는데요.”

“말투 보니 아메니티 사람인데 왜 서쪽에 굳이 지금 가겠다는 거요? 그냥 좀 이 사태가 진정된 다음에 가세요.”

“굳이 지금 가야 해요. 부탁드릴게요.”

“나 참…….”

나이가 든 마부의 눈에 갈등이 비치는 것을 재빠르게 눈치챈 리젠이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평소의 두 배로 쳐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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