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256)

80화.

“르엘라가 커피를 좋아해서…… 약제국에서 쓰라고 머그컵을 하나 시장에서 샀지. 다음번에 만났을 때 주려고 했는데, 그걸 전달하지 못할 줄은 전혀 몰랐어. 딱히 비밀도 아니었는데, 이제 그녀를 위한 머그컵이 있었다는 것은 세상에 나밖에 몰라. 이별이라는 건 이토록 외로운 거야.”

루벤은 딱히 리젠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는데, 리젠은 심호흡을 하며 그의 모든 말을 가슴에 담았다. ‘다음번’이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굳게 마음먹었던 모든 고백들이 이렇게 흐지부지되고 엉망이 된 지금, 그 사실을 리젠은 누구보다도 더 체감하고 있었다. 더 나은 상황 같은 것은 없다. 한 달을 기다리면 카이든이 아메니티로 올라온다는 막연한 기대로 현실을 또다시 등질 수는 없었다.

“왕자님.”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고 말했다. 그녀의 눈에 무언가 결심이 서고 있었다. 딱히 비밀도 아니었는데,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일이 된다……. 만일 이대로 망설이고 있으면, 그녀는 그녀가 카이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평생 말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가 다시 아메니티로 돌아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기에는, 인생은 정말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니까. 그저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원망으로 망설이고만 있다가는 정말로 그를 놓쳐 버릴 수도 있었다.

“죽지 마세요.”

“이 와중에도 짜증나는 건, 엄청나게 고통스러운데도 불구하고 내가 미치지도 않는다는 거야. 하나하나 모두 후회가 되고, 그저 내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은데, 돌아가서 과거의 나를 정말 죽도록 후려치고 싶은데 정신이 또렷해.”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화가 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5년 동안…… 그 시간 동안…… 그녀를 잊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죽은 걸 받아들여 버렸나 봐. 결국 나도 시간한테 진 거야. 그게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돼.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내 앞에 남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그저 막막하기만 해.”

루벤은 이미 귀찮은 듯 감옥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의 눈에는 전혀 생기가 없었다. 이 수많은 시간을 그저 고통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은 그의 표정이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속에 남았다.

“그래서, 이제는 꽤 괜찮아진 건가요?”

리젠은 다음 날, 어의를 만나자마자 채근하듯 물었다.

“회복이 빠른 편이기는 한데…… 그래도 최대한 휴식을 편히 취하라고 전하께서…….”

“다 낫기만 하면 돼요. 휴식이야 뭐.”

리젠이 밝게 말했다. 어제저녁도 입맛이 없지만 많이 먹었고, 억지로라도 푹 자려고 노력했더니 몸의 컨디션이 많이 나아져 있었다. 어의가 처방해 준 약을 꿀꺽꿀꺽 삼키며 그녀가 스트레칭을 했다.

맨몸으로 왔기 때문에 챙길 짐도 없었지만, 그래도 정리는 하고 가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비싼 옷으로 가득 찬 옷장에서 자신의 옷을 찾아 입고 직접 침구 정리도 했다. 어차피 다니엘의 허락은 받지 않기로 했다.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며 합의하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녀는 정면 돌파를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방구석에 놓여 있던 르엘라의 일기장 등이 담겨 있는 박스를 정리하고 있는데 시녀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다니엘이 황급히 들어왔다.

“리젠?”

“아, 전하.”

그녀가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안 그래도 제가 찾아뵈려고 했는데…….”

“간다고?”

그가 모든 예법도 잊은 채 그녀의 어깨를 잡고 급히 말했다.

“아직 몸도 다 회복 안 되었을 텐데 어딜 가?”

“잘 모르시나 본데, 제가 좀 젊어요. 많이 먹고 푹 자면 이 정도야.”

리젠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덕분에 빠르게 회복하고 가요. 궁이 좋긴 좋네요.”

“리젠.”

다니엘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가지 마.”

리젠의 표정에서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다니엘의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이 자신의 앞에서 이토록 웃음을 잃은 적이 있었던가? 늘 다정한 얼굴로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었다. 마치 하늘을 담아 놓은 것 같은 그의 파란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여기 더 있어 줘.”

“어…… 전하…… 죄송하지만,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녀의 말에 다니엘의 푸른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카이든?”

리젠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카이든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그동안 잘해 준 다니엘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다.

“지금 그 몸으로, 루스에 간다고?”

“저 진짜 괜찮은데요. 휴식은 마차에서도 취할 수 있어요.”

“리젠.”

그가 그녀를 잡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네 곁에 자주 있을 수 없는 것…… 나도 너무 안타까워. 내가 너무 바쁜 것…… 카이든처럼 네 옆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는 것…… 내가 가장 속상해. 대관식이 있고 나서 지금 너무 바빠.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없어?”

“…….”

“부디…… 내 곁에 있어 줘. 내가 그때 했던 말 기억나? 내가 왕이 되어도, 내 옆에서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있어 달라고 했던 그 말.”

리젠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에게 반드시 했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그가 왕이라고 해도, 그녀보다 까마득하게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도 사람 대 사람으로 해야 하는 거절이 있었다.

“나는 너의…… 위트 있는 한마디면 돼. 왕관은 너무 무겁고, 왕도는 너무 어렵지만, 너만 곁에 있어 준다면 나는 괜찮을 것 같아. 내게 기회를 줘. 궁에서 조금만 더 지내 봐. 정말 좋은 모든 것들을 널 위해…….”

속마음을 아직도 남에게 말하는 것이 어려워, 그저 이유도 모르고 하지 못했던 말을 그녀는 이제 정말로 진지하게 전하고 싶었다. 다니엘도 그녀에게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젠은 자신이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다니엘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하. 아주 어린 시절, 저는 전하가 정말 좋았어요.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푸른 눈이 정말 아름다우셨거든요. 학창 시절 내내…… 그래서 전하를 늘 짝사랑했어요.”

착 가라앉은 그녀의 차분한 말에 다니엘이 당황스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근데 그런 건 사랑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전하를 잘 몰라요. 대체 왜 왕관은 무거우신지, 왕도는 왜 어려우신지…… 그리고 전하도 저를 잘 모르세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눈앞의 이 남자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이루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강의실에서 그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울에서 서성였던 그 시간들이 분명 추억으로 존재했다.

“저는 그렇게 밝고 위트 있는 애는 아니에요. 남들 앞에서 그럴 수밖에 없도록 컸을 뿐이에요. 사실은 그래서 솔직하지 못하고, 모든 어둠을 안으로 감춘 기형적인 정서를…… 갖고 있어요. 저, 하나도 밝지 않아요.”

“리젠, 그런 건 앞으로 서로 알아 가면 되잖아.”

“제가 궁에 오고 나서, 저희 꽤 자주 만났어요. 하지만…… 저희 서로에 대해서 뭘 더 알아 간 건 있나요?”

리젠이 조용히 묻자, 다니엘이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떨었다. 누군가의 진심을 거절하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지만, 리젠은 더 이상 농담으로 피해 가며 자신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리젠은 그의 손을 어깨에서 떼고,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어떤 좋은 음식, 비싼 옷, 편안한 침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다정하게 웃으며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이 나라의 왕을 등지고 자신에게 차갑게 돌아선 그 남자에게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제 어둠을 알아주고 이끌어 주는 사람, 부족한 제 모습을 감싸 줄 수 있는 사람한테 갈게요. 제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떠나 버린 나쁜 인간이지만…… 그 차가움을 저도 감당해 줄 수 있으니까요.”

“만일 내가 조금만 더 너와 함께 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전하, ‘만일’ 같은 건 아무 힘이 없어요.”

리젠은 차분히 말했다. 그녀가 수도 없이 해 보았던 생각이었다. 만일 그 약을 카이든이 우연히 마시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 약을 제대로 만들어서 일회성으로 끝났더라면…… 만일 해독제를 더 빠르게 만들어 꿈 연결을 더 빨리 끊을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르엘라의 일기장에 나온 말처럼, 이미 생긴 감정은 덩그러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만일’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자리 잡은 감정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번 사고가 일어나면, ‘만일’ 같은 건 소용없어. 그냥 현재를 봐야 돼. 자꾸 뒤를 보지 말고 앞을 봐.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사건은 한번 일어난 뒤 돌이킬 수 없으니 운명이나 인연 같은 말이 생긴 것 아닐까. 카이든의 말처럼 그녀는 현재만을 보기로 했다.

“…….”

“전하, 좋은 왕이 되실 거예요.”

그녀가 그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말했다.

“저희를 동료로, 소중히 여겨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보내 주실 거죠?”

“리젠.”

“저와 카이든을, 그저 아랫사람으로만 보지는 않으셨잖아요. 정말 아끼신 것 아닌가요? 저희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시고 걱정해 주신 것 알고 있어요.”

“하…….”

다니엘이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한 번도 리젠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저 밝고 명랑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위트 있던 표정과 웃음들은 그저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증거였을 뿐이었나.

“그 녀석이 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헛소리를 했는지는 난 모르겠어.”

다니엘은 리젠의 간절한 눈빛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

“네 얼굴을 보고도 계속 그딴 헛소리를 하거든 다시 아메니티로 달려와.”

리젠이 쿡쿡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서 다니엘의 얼굴에 다시 씁쓸한 미소가 걸리며, 푸른 눈이 살짝 휘어졌다. 서로 웃고 있지만 웃음 뒤에 무언가 거대한 감정을 감춘 채로 대화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너를 알아 갈 기회를 내게도 주면 되잖아.”

“……생각해 볼게요.”

그녀가 단발머리를 넘기며 편안히 말했다.

“지금은, 앞만 보고 가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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