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내게 미안하다면, 왕궁에 조금 더 머물러 줘. 자주 와, 막상 갇히니 몹시 심심해. 그리고…… 다니엘에게도 기회를 좀 주고.”
다니엘은 정말 그녀에게 세상의 좋은 모든 것을 해 주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리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선물로 도착하는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몹시 바빠 보였지만 그래도 종종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럴 때마다 리젠은 한 번도 못 먹어 본 음식을 보며 미각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중이었다.
“전하, 저는 이제 아무래도 집에…….”
“안 돼.”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완벽히 회복할 때까지는 그냥 궁에 있어.”
“저 다 나은 것 같아요. 이제 걷는 것도 괜찮고. 개도 개집이 편하다고, 아무리 궁이 좋아도 저희 집 침대가 그리운데요.”
“그렇다면 더더욱 안 돼.”
다니엘이 그녀의 접시에 있는 스테이크를 직접 썰어 주며 말했다.
“여기가 집이 될 수도 있는데.”
“전하, 저는…….”
“마음은 변하는 거잖아.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 너무 굴욕적으로 차인 기분이야.”
리젠이 답답한 듯 물을 마셨다. 다니엘을 볼 때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 다니엘은 동급생이 아니라 이 나라의 왕이었다. 리젠 같은 약제국 말단 직원이 함부로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셰가 외로워하잖아.”
리젠이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셰였다. 아셰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고발한 리젠을 별로 비난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다만 자주 들러 달라고 하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가 리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막상 카이든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무서웠고, 물심양면으로 자신에게 잘해 주는 다니엘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또다시 아셰의 부탁을 무시하고 떠나기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어의의 주장은 또 그녀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가지 마.”
다니엘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게도 기회를 줘.”
그녀가 자신 없이 고개를 떨궜다.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이 먹어지지 않았다. 화려한 옷에, 더없이 맛있는 음식, 그리고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아메탄의 왕이 자신 앞에 웃고 있는데 마음이 쓸쓸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살린 남자가 그저 생각 좀 해 보겠다고 한 뒤 떠난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그 남자가 없어서 느끼는 허전함이 그녀를 참 힘들게 만들었다.
“……네.”
가까스로 리젠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다니엘이 조용히 식사를 마저 하다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리젠, 테스티 왕비…… 면회 갈 생각 없어? 지금 면회 줄이 길어.”
“예?”
“혹시나…… 보면 속이 좀 후련하지 않을까 싶어서.”
“왕자님은, 아니 전하는, 속이 좀 풀리셨나요?”
다니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젠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테스티보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처음엔 몸이 거의 제 마음 같지 않았지만, 막상 또 움직이니 누워만 있을 때보다 괜찮은 것 같았다. 그녀는 시녀에게 부탁하여 걸음을 옮겼다. 석양이 지고 있었으나 감옥 앞은 시끄러웠다. 온갖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중에서는 욕설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과 계란 및 오물을 잔뜩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테스티 전 왕비…… 님을 면회하려는 사람들이에요.”
시녀가 속삭였다.
“사람들이 더 몰려들고 있어요……. 아무래도 그 당시 희생자들이 많다 보니.”
“그렇군요.”
리젠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죗값을 치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테스티가 온갖 굴욕을 다 당하고 있어도, 나람이 죽었어도 르엘라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 앞에 리젠은 차마 당당할 수 없었다. 다니엘이 왜 ‘속이 좀 풀렸냐’라는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루벤 왕자님은 조금 더 멀리에 계셔요.”
“……예.”
저 안에서 테스티는 얼마나 큰 굴욕을 당하고 있을지, 얼마나 악몽 같은 현실에 시달리고 있을지 리젠은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왕족끼리의 싸움이야 아셰 말마따나 서로 각오한 거라고 하지만, 일반인까지 희생시켰다면 그 죄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리젠은 비명과 오열로 가득한 테스티의 감옥을 천천히 지나 루벤의 감옥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사람들로 가득한 테스티의 감옥과는 다르게, 루벤의 감옥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루벤이 아무것도 몰랐음이 인정되어 그는 격리된 곳에 있었던 것이다. 루벤의 죄목은 비였던 나람을 죽인 것으로, 왕가 단독 재판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람이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딱히 그녀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는 사람이 왕가에 없어 어떤 처분이 결정될지는 알 수 없었다.
“…….”
루벤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옥 속의 그는 꼴이 말이 아니었는데, 자살과 자해 방지를 위해 두 손이 묶여 있었고 얇은 재갈이 물려 있었다. 탁한 푸른 눈빛을 보고,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죽지 마세요.”
“……신경 꺼.”
재갈 때문에 약간 새는 발음으로, 루벤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고모도 그런 걸 원하시지는 않을…….”
“왜? 하늘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 그럴 것 같아요.”
이상한 대화가 오고 간 뒤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사실 둘이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거의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르엘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왠지 루벤이 가깝게 느껴졌다. 리젠은 자신이 왜 여기에 온 건지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고모의 일기장을 읽으며 느낀 바를 전해 주고 싶었다.
“뭐,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어요. 왕자님만 안 만났더라면 우리 고모는 살아 있었을 테니까.”
“동감이야. 만일 나 같은 놈만…… 나만 안 만났더라도…….”
그가 씹어뱉듯 중얼거리자,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발끝을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아마 이 결말을 다 알았더라도 고모는 왕자님을 만났을 것 같더라고요. 물론 마법증폭약을 넘기지는 않았겠지만. 그 일기장을 읽으면 다 느껴져요.”
루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감옥 구석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그가 꼭 죽어 버릴 것 같아서, 리젠은 그를 더 이상 원망할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왕자님이 완벽한 남자라서 좋아한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의 표정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어쨌든 명목상 아내를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였고, 연인은 자신과 얽혀서 죽었으며, 큰 죄를 저지른 어머니는 피해자들에게 둘러싸여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교수형이 확정이었다. 얼마나 그가 불행할지 짐작조차 안 되어, 리젠은 그에게 생각했었던 비난의 말들을 모두 삼켰다. 그녀는 할 말을 고르다가 결국 정말로 루벤이 관심 없을 만한 화제를 골라냈다.
“그리고 그때 구해 주신 거…… 정말 감사합니다.”
그 일에는 정말로 관심이 없는 듯 루벤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됐고, 다니엘에게나 가 봐.”
“네?”
“가능할 때 사랑하는 사람 얼굴이나 한번 더 봐 둬. 나도 어느 날 갑자기 르엘라의 얼굴을 못 보게 될 줄 알았더라면, 꼬맹이 입시고 뭐고 밤새도록 끌어안고 안 놔줬을 거야.”
루벤은 나람을 죽이고 난 뒤의 최종 재판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억이 없는 듯했다. 아예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리젠이 다니엘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리젠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어어…… 전하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그럼 누구든. 나 같은 놈 만나려고 시간 쓰지 마.”
루벤이 상관없다는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리젠은 루벤의 말에 또다시 카이든이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선 것이 그녀에게 엄청난 상처를 준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주겠다면서…… 모든 것이 끝나면, 지금쯤에는 그와 행복하게 연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리젠의 시무룩한 표정도 모르고 루벤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르엘라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동이 트기 전이라고 생각했어. 앞으로 더 좋은 날들만 있을 거라고 믿었어. 상황이 더 나아지고, 모든 제약이 사라지면…… 우리에게 훨씬 더 행복한 시간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날들이 내 인생의 유일한 햇살이 비치던 나날들이었거든. 이미 와 있는 빛을 등지고 더 나은 상황만 바라보며 방향도 모른 채 달렸던 거야.”
리젠은 가만히 그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는 양, 상황은 달랐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속에 와 닿았다. 다 각자에게 유일하고 특별하다고 믿는 사랑이 있겠지만, 결국 이 세상 사랑들은 다 닮았구나. 리젠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이름 모를 북쪽 산에서, 작은 침대에 몸을 포개고 더 나은 상황을 기약했던 밤이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을 잡고 두 눈을 마주친 채로 훗날의 사랑만 기다렸다. 사실은 그 짧은 나들이가 무엇보다도 간절하고 따뜻했던 유일한 연애 기간인 줄도 모르고.
“나는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건 르엘라뿐이었어. 세상을 더 뒤져도 아마 그녀 같은 사람은 없겠지. 유일할 것 같은 사랑을 발견한 것 같으면 당장 곁에 두어야 해. 왕이 된답시고 기다리게 했던 것이 가장 후회돼. 그 시간에 외국인만을 배우자로 둘 수 있다는 거지같은 원칙이나 없앴어야 했어.”
리젠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루벤이 하는 이 말을 누구보다도 더 공감할 수 있었다. 당장 곁에 두고, 당장 마음을 말하지 못해 지금 그녀는 카이든의 곁에 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서로의 마음에 확신이 있었던 그날 밤에 말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