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카이든 루스!”
리젠이 악을 썼다.
“아니라고! 나는 널 진짜 좋아한다고! 좋아해! 다니엘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네가 너무 좋단 말이야!”
카이든의 차가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내내, 카이든은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그 여자아이들은 차마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고 입을 내밀며 말했다. 워낙에 표정이 차갑고 가만히만 있어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리젠은 너무 오랜만에 보는 그의 차가운 모습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래?”
그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건 빌어먹을 꿈 때문인 거 아니야?”
“…….”
“진짜로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건 맞아? 꿈 꿔서 그런 건 아니고?”
리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그런 것 같은데. 멀쩡히 잘 살고 있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너 진짜…….”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한데, 그의 검은 눈은 조금도 상처 받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너무 밉다.”
리젠은 눈을 번쩍 떴다. 다시 화려한 샹들리에와 천장 장식이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꾸는 ‘그냥’ 꿈이었다. 벌써부터 꿈 내용이 흐릿한 것을 보아 이것은 카이든과 연결된 꿈이 아니라 그저 악몽이었다. 리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은 계속 두려워하고 있던 장면이 꿈으로 나타난 것뿐이었다.
상상할 수조차 없이 그녀가 좋다고 했는데…… 사실 생각해 보니, 다 꿈 때문이고 그녀를 진짜 좋아한 건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나…… 하지 못한 말이 아직 많은데, 그 말들을 다 하고 나서도 그의 눈빛이 변하지 않으면 어쩌나…… 그녀는 몸이 욱신거려 쉽게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답답했다. 카이든은 정직 처분을 받아 루스에 내려가 있을 것이고, 자신은 몸도 회복되지 않았다.
당장 그에게 달려갈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꿈속처럼 그가 차갑게 돌아설까 봐 두려워서였다. 차근차근 설명하고, 정말 모든 것을 털어 놓으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가 오해할 만한 상황이 맞았다. 결국 정말로 그가 좋다는 말은 못하고, 모든 것이 어물쩍하게 넘어가 버렸다.
그렇지만 리젠이 카이든에게 어떻게 했는데…… 그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정말 죽음까지 각오했으며, 등의 상처에 좋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면제를 먹었다. 아무리 그가 모른다고 할지라도 원망스러웠다. 그의 차가운 표정만 생각하면, 순간적으로 내뿜던 위압감만 떠올리면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졌다. 어차피 이대로 늦은 것, 정말 다니엘의 말마따나 한 달 후에 그가 돌아오면 대화를 나눠 볼까 싶기도 했다.
“저기…….”
끙끙거리며 결국엔 일어난 리젠이 한숨을 쉬며 시녀를 불렀다. 생산성 없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네, 리젠 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부축 좀 해 주시겠어요?”
“예?”
“아셰 왕녀님께 가 봐야겠어요.”
“너무하다. 아셰 왕녀님이 자기한테 평소에 어떻게 했는데…….”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어떻게 그래?”
아셰의 궁 시녀들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다 들리도록 수군거리는 말에 리젠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녀들의 냉대와는 다르게, 리젠에게 아셰는 정말 평소의 방문을 받는 듯이 따뜻한 차를 내어 주었다. 리젠도 평소처럼 반색하며 그녀가 내민 차를 호로록 마셨다.
“역시 맛있네요.”
리젠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마시는 것 같아요.”
아셰가 턱을 괴고,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5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몰라.”
“…….”
“여기에 독을 탔으면 어쩌려고 망설임 없이 마셔?”
“그럼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리젠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셰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푸흡, 하고 한 번 웃었다.
“……독 같은 건 없어. 걱정 마.”
“걱정 안 했어요.”
“진짜?”
“진심으로.”
정적이 흘렀다. 리젠은 괜히 찻잔을 빙빙 돌리다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왕녀님.”
“뭐가?”
“…….”
“진실을 밝힌 것?”
“…….”
“은폐하지 않은 것?”
리젠은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이토록 아셰와 대화가 어려운 적도 또 처음이었다. 사실은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본 윌리엄의 죽음에 대한 분노보다는, 아셰와의 우정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다.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경멸하는 눈빛으로 날 안 봐? 난 오빠를 죽인 여자고, 천연덕스럽게 모두를 속인 사람인데.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로즈리와 지젤을 봤어. 어떻게 예전하고 똑같은 표정으로 날 볼 수 있어?”
“……글쎄요. 아마 시간이 흘러서 그런 것 같아요.”
리젠이 찻잔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것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사실 중 하나였다. 아셰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감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정말 너무 충격적이어서 반은 미쳐 있었어요. 진짜로요. 그동안의 모든 것이 떠오르면서 정신을 놓고 싶더라고요. 근데 더 큰일이 벌어져서 정신을 차린 거고요. 그 이후로 시간이 좀 흐르니까, 그 충격도 완화가 되네요. 충분히…… 충분히 받아들였나 봐요. 사실은 왕녀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과 거의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던 윌리엄의 죽음은 받아들인 지 오래였고, 리젠은 아셰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없앤다는 표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썼던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셰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나니 그녀를 마주하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으나 또 못할 것은 아니었다. 만일 모든 진실을 알아차린 후에 바로 마주쳤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을 수 있었는데, 어쨌든 리젠은 그녀의 정성 어린 보살핌도 받았던 입장에서 그녀에게 무작정 비난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니엘조차 하지 못하는 말을 그녀가 할 수는 없었다.
“리젠, 내가 왜 윌리엄을 죽였는지 이해할 수 있어? 난 제국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어. 그런데 그날 아침, 윌리엄은 억지로라도 나를 보내겠다고 했지. 내가 그토록 버티면서 절대 싫다고 했는데 말이야. 나를 조금이라도 여동생으로 생각한다면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아셰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왕족끼리는, 자신과 길이 다르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야 각오하고 있는 일이야. 너만 아니었다면, 르엘라와 나만의 비밀이었으니 완벽하게 테스티에게 덮어씌울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사실 르엘라도 내게 윌리엄을 죽이라고 그 해독제를 알려 준 건 아닐 테니까.”
“……죄송해요.”
“타국으로 시집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던 나를 위해 몰래 알려 준 거야. 남편이 나를 때리거나 학대하면, 자살하지 말고 차라리 남편을 죽이라고. 절대 원칙을 깨지 않던 르엘라가 그만큼 나를 위해 줬다는 게……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았던 내게 많이 의지가 됐어. 그러니 죄송하다는 말 하지 마. 르엘라의 이름을 더럽혀서 내가 미안하니까.”
“그래도요.”
리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죄송해요. 솔직히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 말밖에 드릴 수가 없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내 나름대로 또 살아남을 거야.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난 윌리엄을 죽인 데에는 크게 죄책감은 없어. 아마 윌리엄도 내 입장이었다면 똑같았을 테니까. 그래서 왕가의 살인 사건은 왕가에서 직접 처분을 결정하는 거야. 다른 살인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거지. 내게는 성분 분석이 가능한 5년이라는 시간이 있는데…… 그동안 왕가의 사람들을 포섭하면 돼.”
“네?”
“어차피 로즈리도 딸을 가지고 있잖아? 지젤을 키우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생판 모르는 나라에 단신으로 보내지는 것이 얼마나 왕녀들에게 폭력인지. 나는 다니엘에게 그 악습만은 없애라고 설득할 거고…… 잘 안 된다면 귀족 여성 운동에라도 합류하겠어.”
“……네…….”
“삶이…… 힘들다. 정말로.”
평민 출신 엘리트인 리젠은 살면서 차별 자체를 별로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여러 가지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귀족들 사이에서 여성 운동이 싹트고 있다고 들었다. 아셰가 거기까지 계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 조금 기시감을 느꼈으나,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교육받은 가치관이 다르니 그녀를 어떻게 판단할 수는 없었다.
“리젠.”
“네.”
“나는 다니엘에게 이용될까 봐, 내가 윌리엄을 죽였단 단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어. 엄마한테도 마찬가지고.”
“아…….”
“네게만 말할 수 있었어.”
리젠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짜증나. 이런 상황에서도 너만이 내 친구인가 봐.”
“죄송해요…… 죄송해요.”
“솔직히 네가 진짜 미운데, 그냥 너다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아마 르엘라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제가 염치가…… 없었죠. 다 알면서 왕녀님의 궁으로 대피하고…… 왕녀님은 저를 정성으로 돌봐 주셨는데 바로 최종 재판에서 그런 말을 하고…….”
“됐어.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아셰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내게 해독제를 알려 준 날, 르엘라에게도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리젠을 아셰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갈무리한 감정의 잔재를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어 흐르는 고통스러운 눈물이었기 때문에 리젠의 표정은 놀랄 정도로 차분했다. 최종 재판 때,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도 리젠은 저런 표정으로 울었다.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사실은 영원히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
“그래도 적어도 나는, 널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아. 특히나 넌 르엘라의 조카잖아.”
“왕녀님.”
리젠이 코를 훌쩍였다.
“자주…… 정말 자주 차 마시러 올게요.”
그녀를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는 약속할 수 있었다.
“그래.”
아셰가 씩 웃었다.
“올케가 될 수도 있는데.”
“……네?”
“다니엘 좀 잘 봐줘. 알잖아. 이젠 오빠가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거.”
말문이 막힌 리젠에게 아셰가 농담처럼 말했다.
“왕의 형제들은 외국인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이상한 법만 없었어도…… 르엘라랑 네가 동시에 왕가의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아쉬워.”